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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몸을 치료합니다.

물리치료사의 몸 이야기(BPS(Biopsychosocial) model

 전국시대, 문지(文摯)라는 명의가 있었다. 당시 제나라의 왕은 민왕(閔王)이었는데 수많은 걱정으로 인해 몸에 이상이 생기게 되었다. 병으로 인해 몸져누운 민왕을 치료하기 위해 민왕의 태자는 송나라의 명의, 문지를 불러 진료를 보도록 하였다. 민왕의 상태를 살펴본 문지는 비록 증상은 몸에 나타나나 마음의 병임을 인지하고 태자를 불러 이야기한다.


“전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화를 내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제가 그리했다간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이를 전해 들은 태자는 왕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목숨을 보장할 것을 약속하고는 치료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문지는 왕의 화를 돋우기 위해 3번이나 진료 시간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 이미 화가 날 대로 난 왕의 앞에 나타난 문지는 신발을 벗고 예의조차 갖추지 않은 채 나타났다.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문지를 보며 결국 극도로 분개한 민왕은 욕을 하며 문지의 행동을 문책하게 된다. 그러자 신기하리만큼 민왕의 증상이 호전되며 병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최근 의료 분야에서 몸에 나타난 병적인 증상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모델이 하나 있다. 이른바 BPS(Biopsychosocial)라 불리는 모델로, 몸에서 통증 등을 볼 때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환경적인 요소를 복합적으로 고려해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의 이론이다. 언뜻 보면 특별해 보이지 않을 수 있으나 이 이론의 등장으로 몸과 사람 자체에 대한 이해가 바뀌었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몸이 아프다는 신호는 뇌가 감지한다. 비록 다친 건 신체의 다른 부분일지 몰라도 조직 자체가 통증을 느꼈다기보다, 다쳤다는 사실을 뇌가 해석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과거의 관점으로 본다면 몸의 이상을 알아차렸다는 건 이미 신체 어딘가에 손상을 입었다는 결과로서만 인식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민왕의 사례만 보더라도 어딘가 다치지 않아도 몸이 아픈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다쳐야만 몸이 아프다는 과거의 시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 바로 BPS 모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픈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사람을 보았다. 첫째, 생물학적 요소이다. 이는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관점으로, 신체가 실제로 다친 경우 나타나는 증상들을 말한다. 쉽게 말해 다쳤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두 번째는 심리적 요소이다. 뇌는 아픔을 해석한다. 그런데 다쳤거나, 혹은 아팠던 기억이 남아있다면 뇌는 아픔과 더불어 두려움도 기억한다. 문제는 이렇게 남은 두려움이 몸의 상처 없이도 아픔만을 남긴다는 점이다. 앞으로 몸은 기존에 아팠던 상황이 야기되면 자연스럽게 아프다는 해석을 해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상처나 염증 같은 구조적 문제는 전혀 가지지 않은 채 말이다. 이처럼 심리적 요인은 신체적 손상 없이도 아픔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최근 연구에서는 사람의 태도나 신념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은 사회환경적 요소이다. 앞선 두 가지 이유는 모두 개인적이거나 내적인 조건들이다. 하지만 사회나 환경적인 것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적 사유들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한 번쯤 다음날 회사나 학교에 간다는 이유로 일요일 저녁부터 소화가 안 됐거나 아팠던 기억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스트레스나 심리적 불안감을 유발하는 사회적 환경이나 관계가 사람을 아프게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이 아프다는 것은 몸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아픈 사람을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알 수 있을 만큼 복잡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정신과 병동이었다. 인턴 시절 정신과 협진으로 인해 정신과 병동에 방문하여 치료를 진행한 적 있다. 처음으로 가보는 병동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마음으로 환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외출은커녕 외부에서 쳐다볼 수도 없도록 잠겨있었다. 그리고 긴장하게 하는 외부와 다르게 병동 내부는 여가 시설까지 갖춰져 있는 만큼 생각보다 안락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바로 환자였다. 분명 기록상에서 정신과적 진단 외에는 다른 진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환자는 아프다 소리쳤다. 차분한 분위기를 이어가다가도 갑자기 울면서 아프다 하면 정신과 전공의가 달려와 이야기를 한참을 들어주어야 잠잠해졌다. 지금의 나는 조금은 알 수 있지만 당시의 나는 그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현상만을 치료해야만 했다. 몸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다. 이를 깨달아야 사람에 대한 이해도, 치료도 가능하다.


 얼마 전 심하게 몸이 아플 때 감정적으로 무너지는 경험을 해보았다. 몸소 경험해보니 현대 의학에서 말하는 몸을 치료하는데 마음을 이용하거나 반대로 마음을 치료하는데 몸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직접 와닿게 되었다. 몸과 몸, 마음과 마음만을 연결하는 단편적인 시각을 넘어 사람 그 자체를 치료한다는 개념이, 변해가는 시대에 발맞춰 가고 있다.

 사실 거창하게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이는 지식의 변화일 뿐 사실 문지의 이야기처럼 이미 오랜 옛날부터 본능적으로 환자를 치료하는데 이용해 왔다. 허나 그 지식을 알고 하는 치료와 모르고 하는 치료는 실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마음을 만지는 말과 환경이 몸을 낫게 할 수 있으며, 반대로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말과 환경은 병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더욱이 신체를 치료하는 치료사가 이를 안다면 환자가 스스로 할 수 없는 몸을 넘어선 마음과 환경의 변화를 만들어줄 수도 있다. 이것이 치료사가 환자의 마음을 더 세밀하게 어루만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학이 발전은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더 미궁 속으로 빠뜨리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단순한 진리라고 생각한 막연한 지식조차도 깨버릴 때면 혼란스러움을 야기하고는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 또한 별거 아니게 보일지라도 이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진통과정을 겪어왔다. 허나 이 같은 과정을 통해 분명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길로 나아가고 있다. 몸이 아픈 사람을 보며 서로를 이해하고 상처 주지 않는 사회. 마음을 보듬어주며 아픔을 공감하는 동료. 별 것 아닌 위로의 말. 이런 작은 행동이 사람의 몸을, 아니 인생 전체를 치유해줄 수 있는 좋은 처방이 된다는 증거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마음은 몸을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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