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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과 절망

물리치료사의 마음 이야기(출산과 아픔)

 살아가는 인생 중 최고로 축복받는 순간을 뽑아보자면 아마 출생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마주하는 모두의 환희에 둘러싸여 행복함을 만끽하는 생애 몇 안 되는 시간. 그런 의미에서 산부인과는 대부분이 삶을 마무리하는 병원에서 유일하게 생을 시작하는 축복의 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했던가. 모두가 행복을 만끽하는 행복의 순간, 예외의 순간에 놓이는 사람들이 있다. 축복이 절망이 되는 사람들. 새로운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과 건강을 바친 숭고한 사람들을 우리는 만나곤 한다.


 출산은 고결하고 숭고하나 과정만큼은 처절하다. 일련의 과정을 다 서술할 수는 없으나 그 어려움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모두가 아는 사실일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빗대어 출산의 아픔을 이야기할 만큼 말이다. 이토록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는 건 누군가의 희생을 감내하지 않고는 쉽지 않은 일이다.

 고달픈 과정의 끝에 모두가 웃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모진 여정을 견디지 못했을 때 축복은 절망으로 뒤바뀐다. 많은 빈도는 아니나 일 년으로 치면 꽤 많은 숫자의 환자들이 출산 중 뇌출혈이 생겨 찾아온다. 우리에게 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히 죽음의 고비는 넘겼다는 이야기이지만 그것만으로 새로운 가족을 맞이한 엄마가 병상에 누워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보통은 아기의 육아에 정신없을 온 가족이 아픈 엄마의 간호에 매달려 있다. 아이를 위해 몸 바쳐 고생한 엄마의 투병 생활에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갓난아이는 어느새 뒷전이 되어 엄마와 아빠의 손길을 기다린다.


 이런 상황에 놓인 환자를 치료하게 될 때면 어느 순간부터 환자뿐 아니라 가족과 아이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엄마에게 인지라도 남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적어도 아이의 사진에 기뻐할 수 있다면, 아이를 품에 안아볼 수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조차 없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혹여나 약간의 인지기능이 남아, 아이의 사진을 보고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볼 때면 내가 보호자라도 된 것처럼 감정이 사무친다. 치료사인 내가 이 정도인데 곁을 지키는 가족들은 어느 정도일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아이를 위해 제 몸 바쳐 헌신한 이가 엄마가 아닌 환자로서 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면 가족들의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혹여나 자신들의 탓은 아닐까 자책하시는 환자의 남편과 부모님 앞에서 누구의 잘못이 아님을 말하면 무엇하겠는가. 그저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을 향한 원망뿐이다.     


 몇 년 전 살인 사건에 배심원 자격으로 재판에 참여한 적 있다.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누구라도 부모의 양육이 온전치 못한 아이들의 삶을 책임질 수 없다. 그것이 국가일지라도 말이다. 당시 재판부와 배심원이 결정을 내리는 중 판단의 제1 요건은 부모가 없어진 아이들이었다. 배심원의 대부분은 부모가 없어진 아이들의 거취를 국가가 책임져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재판부의 설명은 달랐다. 그들을 지켜줄 법적 요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설명이다. 물론 국가가 국민의 모두를 책임져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사실이 안타까움을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엄마가 아픈 가정에서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보살핌 속에 자라야 한다. 다른 이들의 평범한 가정과는 다르게 그들 스스로가 겪어야 할 어려움을 희망이라는 단어로 덮기엔 너무 무겁다. 의료진도, 국가도, 그들 주변의 지인도 아픔이 되어버린 가족에게 보낼 수 있는 관심과 도움은 한정되어 있다. 출산이라는 최고의 축복이 절망이 되어버린 순간, 현실은 정말 가혹하다.     


 출산으로 인해 아픈 환자를 볼 때면 ‘엄마’라는 단어의 숭고함이 느껴진다. 비록 누구도 그들을 책임질 수 없다 해도 그들은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해 온 몸을 던져 아이를 지켜냈다. 그것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축복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혹한 현실이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에 그 사실만은 새겨지길 바란다. 적어도 몸이 아닌 세상에 아프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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