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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랭해질 예정입니다

인사평가 기간입니다

by Jeader

"오늘까지 개인 평가서를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오전 9시 출근하고 조금 지나고 나의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친절하게도 내가 이미 신경도 안 쓰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예측하기라도 하듯 문자를 보내 스스로 개인 평가서를 작성하기를 종용한다. 작년 내가 작성한 서류를 열어보니 몇 년간 크게 변화가 없었구나 싶었다. 계속 승진에서 누락하는 십년과장에서 만년과장으로 진화하는 삶이었기에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변화되는 내용이라고는 이 부서에서 저 부서로 돌아다녔다는 사실 뿐이었다.


"올해는 창작자의 능력을 발휘해야겠다!"

글쓰기라고 말하고 하소연을 작성하는 나의 비범한 창작 능력에 불을 지펴서 올해는 제대로 나를 기술해 보겠다고 작정한다. 마침내 내 안에 꿈틀거리는 창작의 천재성을 발휘하려고 했으나, 마침 다음 주 회의 자료부터 전화로 이것저것 자료를 요청하는 사람들로 인해 창작의 의지는 다시 귀찮음으로 변해버렸다. 남들은 모두 잘한다는 멀티태스킹 능력은 나에게 애초에 없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에게 가능한 멀티태스킹은 자면서 코를 고는 정말 쓸모없이 놀라운 능력뿐이다. 그래서 뭐라도 써야 하니 작년에 내가 한 일들의 실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앗! 나의 성과가 떨어졌음이 드러난다. 실적이 떨어진 이유를 전 우주의 탓으로 돌리는 창작을 하고야 말았다.


"건의사항에 건의하는 게 아니라고!"

과거 인사를 담당하는 팀장님한테 건의사항에 건의를 적어내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의를 적으라고 칸을 마련했지만 처음에는 불만만 적는다고 한다. 그러다가 기대가 사라지면서 건의할 것이 없는 지경으로 변해 빈칸으로 제출한다고 말했다. 과거 내가 작성한 건의사항을 읽어보니 그때는 건강한 제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도 관심 없어 일기장에나 써야 할 쓸데없는 칸 채우기는 아니었나 반성하게 된다. 그렇다. 모든 칸을 채울 필요는 없다. 여백의 미가 중요한 것은 개인 평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올해 나의 개인 평가서는 빈칸이 유난히 많구나. 현실적으로 건의사항의 건의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 사장님은 능력에 비해 급여가 적어 인상이 필요하다는 짜고 치는 고스톱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이거 어디에 필요한 건가요?"

문득 자기를 기술하는 시간을 통해 느낀 감정은 정말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다. '어린 왕자'의 술 취한 것이 창피해서 계속 술을 마신다는 술 취한 주정뱅이의 삶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밥벌이를 하기 위해 일을 하면서 자존심을 버리며 나를 갈아 넣는다고 해도 밥벌이까지 시원치 않는 삶의 반복이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자긴 올해도 승진하긴 어려운 것 아니냐고 하소연하는 입사동기의 불만을 들으며 우리 회사의 인사 평가를 다시 생각해 본다. 나의 개인 평가서는 과연 어디에 필요한 건가요?


내가 쓰는 보고서의 최종 소비자는 누구인가? 145

그러니 직장 사수가 시키든, 팀장이 시키든 처음부터 제대로 물어봅시다. 이 질문이 일을 1/10으로 줄여줍니다!

“어디에 필요한 건가요?(누가 요청한 건가요?) = 이 글의 최종 소비자가 누구인가요?”

《일 잘하는 사람은 단순하게 합니다》(박소연, 더퀘스트, 202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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