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있을 생각은 애초에 없었는데...
"조만간 퇴직하겠군!"
회사의 10년짜리 장기 계획 수립 TFT에 들어갔다. 첫 상견례를 하는데 계속 '누가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멈추지 않는다. 밥값으로 의무적으로 찍어내듯 만들었던 업무 보고서에 그저 지나가는 소망 같은 예정사항을 적었던 이유로 빠삐용처럼 이곳까지 흘러왔을까 싶다.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하여 동동거리며 살아온 나에게 왜 이런 장기 계획을 수립하는 일을 맡기다니 나의 심정은 정말 '아이러니'라는 단어와 '왜?'라는 글자만 눈앞에 떠다닌다. 그렇군 대책 없이 희망적으로 마무리하는 나의 보고서 글쓰기가 이런 참사를 불러왔나 싶다. 그렇다. 나는 10년 장기 보고서의 결과를 증명하기 전에 꼭 퇴사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그래서 저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회의실로 오라고 해서 왔는데 도대체 나의 역할을 모르겠다. 여기 모인 사람들도 모두 외계인에 납치된 지구인들의 표정이다. 이런 당장 내일 쓰러져 강제 퇴사할 것 같은 나에게 장기라는 뜬구름을 잡아야 하는 어색한 분위기는 영어 하는 사람들 사이에 낀 이방인 같은 느낌이다.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은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이곳에 나를 멤버로 집어넣은 사람이 분명 나를 가장 만만한 구성원으로 판단했을 것이라는 옆자리 동료의 설명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끌려온 사람들의 조합을 톻해 동료의 예리함에 다시 감탄을 하며 최종 보고서 마감일을 노려본다. 장기 계획 수립이라 그런지 보고서 마감일도 멀리 있는 걸 봐서는 장기간 이곳에서 시달릴 예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조직은 어떤 미래를 꿈꾸나요?"
회의에서 그 누구도 명확하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다들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분위기로 보아서는 브레인스토밍을 빙자하여 배를 끌고 산으로 가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다들 그럴싸한 비전을 제시하고 과제를 도출하면 된다고 쉽게 말한다. 하지만 어제까지의 프로젝트를 통해 내가 배운 것은 그럴싸한 실천 계획도 최고 의사결정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쉽게 엎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 시대 양반의 심사가 뒤틀리면 의례적으로 엎어버리는 가벼운 밥상과 같다. 수많은 보고서가 있었지만 우리가 여기까지 좌절하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마주하며 흘러왔던 것은 그 변덕이었는데 장기 계획이라니 머리가 무겁다. 보고서를 받는 분의 심적 안정을 위하여 대표님의 작은 노고에 아주 큰 보상을 위한 급여 인상이 필요하며 반대로는 더 이상의 부채를 늘리지 않는 묘안을 찾아야 한다. 마른 수건에서 더 짜낼 물은 나의 눈물뿐인가 싶다.
"탈출은 어쩌면 의지순입니다."
어려서는 공산당이 제일 나쁜 조직이라 배웠다. 돼지로 묘사되는 독재자가 의사결정을 마음대로 하고 조직의 모든 구성원들의 수고를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지옥으로 배웠다. 하지만 공산당보다 더 나쁜 독재가 판치는 곳이 대한민국의 회사인가 싶다. 이제 이들이 만족할 수 있는 조직을 넘어 말로는 공익을 추구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장기 계획을 수립하라고 말한다. 씨를 뿌리지 않지만 맛있는 열매를 키워내야 하는 임무는 언제나 신화와 같은 허황된 스토리가 필요하다. 매일 묶인 채 다시 재생하는 간을 독수리에게 파 먹히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올림포스 산에 묶이기 이전에 제우스에게 맞서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우선 열심히 보고서를 쓰고 탈출하는 이카루스처럼 날개를 만들어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게 눈에 띄지 않는 상태로 무탈하게 도망가야겠다.
20. 치명적 불꽃 – 프로메테우스 92
올림포스 산 위에 쇠사슬에 묶인 그는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간을 독수리에게 매일 파 먹힌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제우스에게 맞서며 활동을 펼친다. 노동의 벌을 받은 인간은 자기 이마에 땀 흘려 스스로 일하고 그 결과에 만족하는 활동의 기쁨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번식해야 할 의무가 생긴 인간은 여성, 이타성, 섹스의 쾌락 등 전에 모르던 것들을 새로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통의 운명을 걸머지게 된 인간은 그와 동시에 안락의 기쁨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모호하고 뒤죽박죽이지만, 이전과 달리 전혀 새로운 인간, 이 매력적인 필멸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스 신화 백과사전》(샤를 페팽, 이숲, 2019.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