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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Oct 04. 2018

항상 비워뒀던 '당신'이란 자리

이젠 없앨 때가 되었다.


새벽 두 시. 항상 이때쯤엔 이런 풍경이었다. 신분증이 없지만 들여보내 달라는 스무 살짜리들의 애교를 거절하고, 누군가가 토해놓은 화장실을 치우기 싫어 다른 아르바이트생들과 투닥거리고, 술기운을 빌려 서로에게 닿는 연인들의 대화를 귀동냥하는, 그런 풍경들이 슬슬 나오기 시작할 때.  


대학시절, 나는 칵테일 바에서 꽤 오래 알바를 했었다. 마치 사랑스러운 연인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무엇이라 하나를 딱히 꼽기 힘들 정도로 그 시간들이 좋았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공간이 좋았고, 유쾌한 분위기가 좋았고, 누군가에게 내가 만든 음료를 대접할 수 있는 뿌듯함이 좋았고, 밤과 아침의 경계 사이에 부는 바람에서 느껴지는 쌉쌀한 괴리감마저도 좋았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이어가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는 새벽 두 시는 또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날 만큼은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썰렁한 분위기가 이상해 지상으로 나가보니 후드득, 문을 열자마자 비가 쏟아져 들어왔다. 역시, 궂은 날씨 때문이었구나.




비가 와서 내가 왔어.

손님도 없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점점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냥 생각이 아닌, 그의 생각에.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그는 우산이 없다고 하는 날 데리러 오며 이렇게 말했다. "비가 와서 내가 왔어." 그 뒤로 비가 올 때 비를 핑계로 나를 찾아오기도, 내가 그를 찾아가기도 했었다. 우린 그 하나의 암묵적인 룰을 참 철저히도 부지런히 지켰다. 물론 그라는 비가 내 세상에 그치기 전까지.


사실 그는 누군가를 적시는 비 같은 사람이기보단, 포근하게 안아주는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따듯하고 온기가 가득한 사람이라, 만약 햇빛에 향기가 있다면 그의 품에서 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이런 낯간지러운 생각을 뻔뻔하게 하는 나 자신이 놀라울 만큼, 그의 햇빛에 그을린 자국들은 여전히 선명했다. 내 마음 한구석에 그를 위한 빈자리는 항상 존재했으니 말이다.


한참 위험한 공상에 빠져들고 있을 때, 날 둘러싸고 있던 소음과는 다른 소리가 들렸다. 이건 달칵 달칵 - 거리는 셰이커 안의 얼음 소리도, 한참 전부터 시작했던 시끌벅적한 디제잉 소리도 아닌, 내 오른쪽 주머니 안에서 느껴지는 진동이었다. 핸드폰을 지그시 바라보던 나는 이내 깜짝 놀라 액정을 뒤집었다. 화면 위에 뜬 건 그의 이름이었다.


사람마다 평생 잊지 못하는
누군가가 있지 않아?

누군가의 첫사랑, 혹은 마지막 사랑. 신기루처럼 가까이 있지만 닿을 수 있는지는 모르는 상상의 대상까지. 그는 내게 그런 의미들 중 하나였다. 그가 내 마음 한 구석의 자리를 단단히 차지했던 이유는 내 쓸데없는 오기에도 있었다. 끈질기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 끈질겨지는 마음, 서랍의 한 구석에 박아놓고선 혹여나 싶어 그 서랍장을 계속 열어보던 못난 고집들은 내 마음 한 구석에 그를 켜켜히 쌓아두었다.


그래서 이렇게 비와 함께, 내 떠올림과 함께 와버린 그가 더 미웠다. 정말 양반은 못될 사람. 결국 그 서랍장 안의 기억들을 한번 더 열어보게 만드는 못된 사람.


야속할 만큼 오래도 울리는 진동을 감내하며, 나는 긴 고민에 잠겼다. "어쩌면 그도 날 잊지 못하고 만나고 싶었던 거야. 우린 이렇게 다시 만나야 할 운명인지도 몰라."와 같은, 그를 처음 만난 날부터 헤어진 후 지금까지 날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그놈의 운명론. 잠시 떨쳐내었다고 생각했으나, 그의 진동 한 번에 그 모든 가설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우리 사이엔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운명을 참 닳고 닳은 단어로 만들었다. 나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우리가 운명이었다면, 만약 그가 내 마음속 빈자리를 채워 줄 평생의 연인이었다면. 그는 지금보다 과거인 날에, 밝은 시간에, 덜 흐트러진 정신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라는 걸.


그래서 결정했다. 내 손과 마음 안에 퍼지는 이 울림을 견뎌내기로. 그가 내일 아침 일어나 어제의 기억들을 잘 추스를 때까지. 그렇게 자책한 시간만큼 내게 등을 지고 멀어질 때까지 나 또한 멀리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한 번 마음을 그렇게 먹자, 그 뒤는 쉬웠다. 전화가 끊기고 난 뒤 진동은 다시 오지 않았다. 아마 그에겐 단 한 번으로도 족했을 것이라 생각하자, 괜스레 마음이 씁쓸해졌다.


누군가를 위한 빈자리라는 건 아름다운 마음이라기 보단, 끝없는 공허함이다.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갈망하며 살아간다는 건 그런 의미다. 도달할 곳 없는 욕심을 끝없이 품고 사는 건 본인만이 가장 불행해지는 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를 위한 빈 자리를 없애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니, 내 목구멍을 간질이던 모든 말들을 마음에 삼키고, 이 거짓이 사실이 될 때까지 되뇌일 것이다.


당신은 이제 내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은 이제 그 무엇도 아니다.




인스타그램 @jeanbehere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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