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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Sep 27. 2018

너도 나만큼 비참했을까

내가 손을 놓으면 끝날 관계


난 이만큼이나 비참해봤어.

'지독한 이별'이라는 주제는 술과 함께 잘 넘어가는 좋은 안주 중 하나다. 때론 아주 기가 막힌 불행도 서로의 입과 입을 통해 희극으로 변하고, 가끔은 짜게 식은 술자리의 분위기를 알맞은 온도로 데워주기 때문이다. 그날도 그랬다. 시답잖은 지인들의 농담으로 시작한 대화는 점점 ‘난 이런 것도 겪어봤어!’ 같은 어마어마한 불행 배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적도 있었다니까? 영화에서 그런 장면 많이 나오잖아. 오빠 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라면서 버스 정류장 앞에서 기다리는 그런 대책 없는 장면들. 그 말도 안 되는 걸 내가 해본 적이 있거든. 한 세 시간 정도인가, 막차 될 때까지 그냥 하염없이 기다렸었어. 내 문자나 전화 깡그리 무시하고 안 온다는 거, 머리로는 아는데도 마음은 그 자리에서 떠날 수가 없더라. 그래서 그냥 계속 기다리는데 아직도 기억나. 그 길고 긴 기다림의 1분 1초가 얼마나 잔인하게 내 마음을 죽이던지. 그땐 그래도 젊어서 체력이라도 있었지, 지금 누가 그 짓거리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걸.


"나는 예전에 남자 친구가 바람을 핀 적이 있어. 해명하면서 싹싹 빌 줄 알고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오히려 너무 당당하게 헤어지자고 통보하더라고. 내 머릿속과 너무 다른 그림이란 걸 아는데 정말 웃긴 건, 나는 그때부터 자존심도 없이 그 사람 발 끝에 매달렸어. 바람피운 것도 없는 일로 할 테니 날 떠나지 말라고. 그런데 그런 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나 지금 너 말고 랑 카톡 하고 있어.' 라고 말하더라. 아마 자기 딴엔 최후의 수단이었겠지. 당장이라도 날 떠나 그 여자 품에 안기고 싶어서. 그 과정에서 내게 줄 상처는 1도 중요치 않았겠지. 그 XX의 그 오만한 표정을 봤어야 해 너네도. "


갖가지 서로의 사연들에게 맞장구를 치고 분노하는 이들 사이에서, 문득 나라고 이 이별들의 주인공이 아니었던 건 아니라는, 조금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왜 다들 이렇게 어딘가 시린 사랑을 할까. 이 아픈 원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왜, 그런 관계있잖아.
내가 손을 놓으면
거기서 끝나버릴 그럴 관계.

내가 손을 놓으면 끝날 관계라는 건, 이미 끝난 관계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상대방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어떠한 해프닝, 그 고통의 터닝포인트까지 가야지만 끝이 난다. 그래서 참 번거롭고, 서럽고, 아픈 관계다 이건.


이렇게 말하는 나 또한 이런 비참함의 당사자였던 적이 있었다. 그 죽고 못 사는 연애의 끝에서도 헤어짐을 말할 용기 조차 없어 망설이는 그의 모습과, 그런 그임에도 마음을 접지 못해 관계의 도돌이표 속에서 헤매는 자신을 지켜보며 말이다. 그 때의 나는 상처나 손해, 자존심 따위 다 제쳐두고 마음의 소리'만'을 들었다. 정적과 삭막한 대화, 함께 있음에도 외로운 시간, 언제라도 내 발목을 잡아끌어 날 집어삼킬 얇은 빙판길 같은 관계를 걸어나갔다.

지만 언젠간 오게 될 내일을 영원히 미룰 수만은 없었다. 그가 내 손을 놓았던 날, 나는 그의 삶 안에서 어떠한 형태로라도 존재하고 싶었다. 그런 나의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친구라도 남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그는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나는 그것이 또다른 시작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그의 옆자리에 돌아갈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내 의지로 꾸기 시작한 악몽일 뿐이었다.

(맞다. 앞서 말한 그 잔인한 터닝포인트가 바로 이 구간이다.)


우리가 연인이길 선언했던 날, 함께 기념으로 맞추었던 망할 열쇠고리가 있었다. 연인이 아닌 친구로 지내던 때에도 항상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던 그 열쇠고리를, 나는 수업을 듣던 어느 날 캠퍼스에서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패닉 상태에 빠져 건물들의 로비, 화장실, 강의실 곳곳부터 잔디밭까지. 몇 시간 동안을 해가 질 때까지 찾다 결국 찾지 못해 울기 직전의 목소리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미안해. 우리 옛날에 맞췄던 열쇠고리 있잖아, 나 그거 잃어버렸어..."

"뭐 그런 걸 가지고 속상해 해. 나는 그거 이미 버린 지 오랜데?"  




그의 대답에 애써 웃어보인 채 집에 돌아오는 길, 그제서야 가방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알아차렸다. 알고보니 가방 안감에 구멍이 터졌고 그 구멍 사이로 열쇠고리가 기어들어간 것을 잃어버렸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내가 가장 허탈 했던 이유는 그 사실을 모른채 몇 시간이나 찾아다녔던 내 행동에 대한 한심함이 아니었다.

그간 얼마나 들고다녔는지 손때가 묻어 낡아빠진, 이젠 몇 물이나 지나간 이 캐릭터 모양 열쇠고리가 뭐가 좋다고. 아니, 그 볼품없는 XX가 이때까지 뭐가 좋았다고. 바보같이 열쇠를 쥐고 다녔던 내 손 위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나는 상처받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은 '척'을 한것 뿐이었다.  내 손에 쥐어진 이 열쇠고리는 우리 사이의 가치나 다름없었다. 내가 소중해 마지않아 항상 품고 지내왔던 이 관계는, 상대방에겐 그저 잊어버리면 그만인 그런 하찮은 관계였다.


그 날, 나는 그 열쇠고리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고, 그 뒤로 다신 그를 만나지 않았다.





'내가 비참한 만큼, 상대방도 비참하면 좋을 텐데' 라는 못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남이 내 감정을 온전히 느껴보길 바란다는  불가능한 일임에도, 공평하지 않은 관계에선 이뤄지지 않을 것을 바라는 것 자체가 욕심임에도. 어리석게 그 과정을 반복하며 고통을 내것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그 모든 일이 부질 없었다는 걸 안다. 술자리에서 아무리 서로의 애달픈 이별 일화를 들어도 남의 이별이 자기 자신의 이별만큼 서럽지는 않은 것처럼, 전남친이 열쇠고리를 잊어버릴 때 내 심정같은 건 생각치도 못한 것처럼. 본인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그 고통을 공감은 하되 공유할 순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이제 상대방이 비참해지길, 아니 과거에 비참했길 바라지 않는다. 그 대신, 내 자신이 앞으로 어떠한 이유에서든 비참해하지 않길 바란다. 누군가의 차가운 마음을 따듯하게 감싸안으려 노력하고 애쓴 혼자의 시간들이 불쌍한 것이 아닌, 기특한 것이였음을 내 자신만이라도 알아주려한다. 결국 내 자신만이 내 감정을 가장 잘 알아주고, 안아줄 수 있으니 말이다.



인스타그램 @jeanbehere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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