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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Oct 11. 2018

사랑이란 감각, 그 잔인한 기억에 대하여

감각을 꺼버릴 수 있는 스위치가 있다면



종로 거리에서 회사 동료들과 회식할 장소를 물색하다 익숙한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다. 옆 술집에서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신 것 같은 아주머니.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왔다.


- 아가씨! 오랜만에 왔네~ 그 때 같이 왔던 총각은 어디갔어?

- 아... 그 사람이요. 음...


내 안색이 안 좋은 걸 눈치챈 아주머니는 질문이 민망해지셨는지 허공을 보며 다른 이야기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침 뒤에선 동료들이 나를 불렀고, 나는 아주머니에게 꾸벅 작별 인사를 드리곤 다시 거리로 나섰다.



결국 그 날 술집 선정은 실패였다. 비싼 안주에 미지근한 맥주하며, 사람이 가득 들어차 대화의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웠던 곳. 어찌보면 아까 마주쳤던 아주머니네가 훨씬 나았다. 그 집, 참 전요리를 잘했는데 말이지. 푸짐하고 따스한 호박전과 수제 막걸리를 떠올리자 금새 쓴 차를 입에 머금은 듯한 씁쓸한 기운이 마음 언저리에 감돌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장에 있는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편지가 함께 끼여있었던 그의 선물이였다. 표지를 쳐다 보는 것만 해도 마음이 아려서, 그런데 버릴 용기는 없어서 소심히 손이 닿지 않는 책장 맨 윗편에 올려둔 책. 그놈의 책을 과감히 집어들어서 쓰레기함에 집어던졌다. (그냥 넣어도 되었으나 그 때만큼은 집어 던져보고 싶었다.)


그 외에도 진열장에 무심히 뒤섞여 들어가있던 그와의 커플 머그컵, 생일 날 선물해준 향수, 독서 좀 하라며 만들어준 책갈피 등...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쓰레기함에 집어 던졌다. 분리수거를 할 때 또 다시 집에 들고 돌아오지 말자 굳게 다짐하면서.





(번거롭게도) 사랑한 뒤엔 이렇게나 많은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그 흔적들엔 많은 감각들이 담긴다. 그와 함께 마시고 먹었던 음식들의 맛, 그의 품에서 나는 냄새가 좋아 따라샀던 빨래 세제의 향, 함께 같은 자리에서 보고 감탄했던 풍경들의 잔상까지. 기억이 남듯, 그 기억들이 담고 있는 야속한 감각 또한 남아버린다.  


이 때까지의 이별 중, 내가 제일 괴로웠던 감각은 후각이였다. 그와 비슷한 향수 냄새를 길거리에서 스치듯 맡고는 길거리 한 복판에 눈물을 펑펑 쏟던 21살의 내가 그걸 증명했다.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향수들 중에 딱 그 향수를 뿌린 행인이 미웠고, 그걸 맡아버린 내가 미웠고, 무엇보다도 내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가 미웠다.


그 뒤로도 첫번째 실연, 두번째 실연... 처음 하는 연애도, 이별도 아닌 주제에 왜 또 같은 희열을 느끼고 같은 아픔에 마음이 무너졌는지는 모르겠다만. 0을 1로 만들고, 1을 0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번거로운 감정들이 싫었다. '뱀파이어 다이어리'라는 미드에 나오는 장면마냥 인간으로써 느끼는 감각에 대한 스위치를 꺼버리고 싶었다.


언제는 좋다고 품고 살던 것들을 다시 외면해야하는, 이 데이기만 해도 끔찍했던 실연의 순간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무조건 버리기'였다. 무엇이든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요소들을 다 떨쳐버리려고 했다. 그사람이 준 자그마한 선물들이나 흔적들, 눈에 띄는 것은 다 버렸고 자주 가던 장소들은 아무리 단골집이였더라도 다신 발을 들이지 않았다.


아마 그 술집의 아주머니도, 내가 버린 책들과 온갖 선물들도 같은 맥락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나는 것들을 다 버리다간 내 존재조차도 사라질것 같다는 생각. 그 사람을 잘라내다간 결국 나란 사람 조차도 없어질 것 같은 두려.


다 버리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항상 그 다음 연애를 할 때 그 사람과 관계된 모든 것을 버려야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랑과, 그리고 그걸 품는 사람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였다. 기억을 강제로 지울 수 없듯, 그 사람과의 연애는 항상 내 안의 어떤 흔적으로 남고, 그것들이 모여 자신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억을 잃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으로써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조건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닌 나아가는 것 뿐이다. 그 연애에서 어떤 추위나 따듯함이 있었든 거기서 성장한 나의 모습들이 모여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의 연애에서 상처를 버리는 것이 아닌, 어느 정도는 그 계절들을 가져가고 싶다. 그러면 언젠가 다시 봄이 오고, 다시 0에서 1이 되었을 때, 그 상대방과 많은 계절들을 나눌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안녕하세요 브런치 독자 여러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의 연재가 이번 회차를 마지막으로 끝나게 되었어요.


꽤 오랜시간동안 제 브런치를 지켜봐주셨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평소에 댓글을 수시로 확인했었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것을 발견하셨을거라 생각해요. 실은 요즘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느라 브런치에 많은 신경을 쏟지 못했답니다. 생각보다 새로운 직장을 다닌다는 건 온 신경을 쏟아 붓는 일이더라구요. 개인적으로 글을 쓸 시간도, 글의 영감(?)이 되는 연애를 할 시간도 부족했던 것 같아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다시 돌아와, 매거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매거진의 제목처럼 저에겐 아직도 어려운 연애라, 참 글도 서투르다고 생각했지만 많은 분들이 구독을 눌러주시고 사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저에겐 브런치를 시작한 지 이제 1년 반이 다 되어가는 지금, 저는 지난 16주간의 경험이 아직도 꿈만 같고 황홀해요.


그러니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하여, 앞으로는 조금 더 진심이 담긴 글, 더 사람들을 따스하게 안아줄 수 있는 글, 제 자신에게도 더 여유로운 글들을 가지고 찾아뵙도록 할게요!


다시 한번, 그동안 제 글을 사랑해주셔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항상 감사합니다!




인스타그램 @jeanbehere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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