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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Aug 02. 2018

연애가 끝나도 갑과 을은 그대로더라

너는 갑, 나는 을


오랜만에 그와 마주쳤다. 그는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날 버렸다. 1990년대 말에 인기를 끌었던 가요들의 가마냥 그와의 연애는 아주 흔하면서도 비참해 빠진 사랑이야기 같았다. 사실 난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버린다는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 사람을 만나고부터 바뀌었다. 그 사람은 아주 충분히 나를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나의 그 시절은 참 예뻤다. 아니, 조금은 짜증이 날 정도로 순수했다. 그 시절의 나는 내가 지극히 보통의 연애를 하고 있다고 믿었다. 언젠가 그의 아버지도 만나보고 싶었고 따뜻한 밥도 함께 먹어보고 싶었다.

난 내가 그에게 흘러넘치도록 사랑받는다고 생각했고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추억들을 가지며 이런 날들이 영원할 거라 멍청할 만큼 굳게 믿었다. 단지, 그가 그에겐 너무 완벽한 그의 전 여자 친구에게 다시 향하기 전까진 말이다.

 




내 친구들은 나를 나이팅게일 같은 사람이라 말했다. 전 여자 친구에게 받았던 그의 상처를 보살펴주고 채워줬던 사람, 물론 그 의도가 나이팅게일처럼 그리 숭고하진 않았단 것쯤은 안다.

그에게 있어서 나의 존재는 나이팅게일 보다는 반창고에 가까웠다. 상처가 나으면 언젠간 버려지는 반창고 정도. 마음 한편으론 이미 이런 결말을 알아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난, 그를 위해서라면 반창고의 숙명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더 감정이 깊어지기 전에, 이제라도 친구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내게 이별을 통보하던 날, 그는 내게 말했다. 마치 사람 마음이 잘못 탄 버스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금방이라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통틀어서도 그 이별은 유일무이한 형태였으며 최고로 지독했다. 나를 향하지 않는 누군가를 향하는  이렇게나 아픈 일이어야만 하는 걸까. 처음 알게 되었다. 이렇게 상처 줄 거였으면 애초부터 시작하지 말지 라는 원망도 많이 했다.

이때까지의 진심이라던 마음은 그저 날 대용품으로 삼기 위한 핑계였던 걸까. 나는 나일뿐인데, 다른 누군가의 복제품 같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다. 난 그에게 결코 이 세상에 하나뿐인 무언가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과 함께, 이 이별은 내 감정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래도 진심이었어.

하찮은 기만이었을 뿐인 이 한마디가 날 그의 반경 내에 붙잡아 뒀다. 그때의 난 그가 준 거짓 기대에 목맸고 그가 차린 예의에 내 자신을 위로했다. 그렇게 날 신경 쓴다는 그의 거짓말에 이미 빛바랜 그의 마음을 포장하기 바빴다. 난 그렇게 해서라도 그 사람을 잡고 싶었지만 점점 포장할수록 내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렇게 내 자존감이 바닥을 배회하던 어느 날, 나는 그의 끝없는 희망 고문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별 후 나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잘 사는 게 최고의 복수라며 일부러 과거를 잊는다고 하는데. 난 반대로 그 혹독했던 계절을 잊지 않으려 항상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그래야만 무너졌던 내 마음이, 자존감이 내게 채찍질을 해줄 것만 같았다.


그렇게 2년, 그 지긋지긋한 바닥을 짚고 올라오는데 꼬박 2년이 걸렸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정상에서 본 그 사람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여, 내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마주친 그는 여전했다. 


그는 내게 잘 지내?라고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장난을 치고 웃었다. 잘 지내냐고 묻는 뻔뻔함, 자신이 더 이상 내게 소중하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주제넘은 행동. 이젠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좋아하지 않는, 오히려 미워하는 내 마음을 망각한 그가 밉다. 그의 한결같은 행동들이 너무 싫다.


시간이 지나도, 나는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나에게 미움받기 싫을 뿐이다.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어 죄책감을 덜길 바랄 뿐이다.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 나에게 지금 손을 내미는 것도 알고 있다. 지나간 과거를 현재로 바꾼다는 건 허무맹랑한 연금술과 같다. '잘 지내?'란 말은 나를 걱정하고 신경 쓰는 뜻이 아니다. 그 사람이 나를 '신경 썼던' 과거 따윈 없다. 그저 남일뿐인 현재의 우리 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갑과 을은 변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 갑과 을이 있겠냐는 나의 생각은 이미 과거일 뿐이다. 오랜만에 그와 마주친 순간 알게 되었다. 그와 나의 갑을관계는 아직까지 건재하다는 것을.


그를 사랑하기로 결심했던 순간, 나는 그를 위해 이 세상에서 제일 약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약함을 쓰다듬어 주는 사람이 아닌 휘두르는 사람이었고, 그러기에 난 그 사람을 사랑한 만큼 그의 갑질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내가 잘못된 사람을 만났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이미 시작된 을로써의 마음을 멈출 수도 없었다.


이별 후, 예전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었던 내 자신을 잠시나마 갑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났어도, 그는 갑이고 나는 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분명 나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와 함께 아름다운 것을 보고 기억을 나누고 싶지도, 그 사람을 사랑스러운 기분으로 껴안고 싶지도 않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결론은 그렇다. 하지만 그 사람과 마주쳤던 순간, 평소의 약아빠진 나 자신은 눈 녹듯 사라져 버리고, 그저 계산 따위 없는 벌거숭이의 진심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 선지, 그의 웃는 얼굴에 인상을 찌푸릴 수 없었다. 그저 '나도 잘 지냈지'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스타그램 @jeanbehere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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