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내게는 아직 어려운 사람 사이 07화

라이킷 37 댓글 3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정지은 Jean Aug 09. 2018

다시 사랑하기엔 난 너무 망가진 걸까

상처가 두려워 만남을 망설이는 나에게

다시 사랑하기엔 난 너무 망가진 걸까?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발견한다. 당장이라도 내 앞의 이 사람이 사라질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불안해하는 마음을 타이르는 내 모습과 함께. 내가 이전의 상처에서 보상받으려 하는 걸까, 그래서 지금 아무 죄도 없는 상대방을 힘들게 하고 있는 걸까. 나 어디, 마음 한 구석이 망가져버린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젠 다신 누군가와 사랑을 마음 놓곤 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려 해도 이전의 연애에서 받은 상처들을 깨끗하게 흘려보내지 못하곤 했다. 그도 그럴게, 지독한 이별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엔 제 각자의 형태를 가진 상흔들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흔들은 점차 내 앞에 놓인 연애를 야금야금 망가뜨렸다. 예전처럼 풋풋한 설렘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서로를 믿기 시작하고, 결국 상대방을 위해 죽기 살기로 자신을 내던지는 연애. 이제 그런 연애는 꿈도 꾸지 못했다.

하나의 방어기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쌓고 있던 이 벽은 결국은 벌어질 관계의 끝에서 내가 상처받지 않게 하기 위한, 그저 나만을 위해 최전선에 놓인 보호막이었다.

내가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날 소중하게 대하지 않을 때의 그 아픔을 이미 알아버렸기에. 그 결말이 얼마나 내 세상을 무너뜨렸는지 실감했기에 그 상처의 파편들을 온몸으로 받아내지 않기 위한 내 나름의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흔히 사랑은 행복한 것이라고 했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사랑은 행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만남, 행복, 이별까지 전부 포함된 패키지 상품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좋은 시간만, 내가 원하는 감정만 느낄 순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에 나는 한동안 사랑이 싫었다. 당장 눈 앞의 행복한 순간들만 있을 거라 허울 좋은 문구로 무장한 가짜 광고 같은 것이 사랑이라면 그런 사랑 따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기필코 이번만큼은,
상처받는 쪽이 내가 되진 않겠어

크게 상처를 받았던 연애가 지나간 후, 내가 했던 다짐이었다. 한동안 나는 가벼운 무게를 가진 연애를 지속했었다. 침대의 머리맡에 짐가방을 챙겨두곤, 내가 내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관계. 이렇게 내가 누군가에게, 혹은 누군가가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할 것도 없이 상처 주거나 받을 일 따윈 없이 그 작고 가벼운 관계들 속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겐 공허함 밖에 남지 않았다. 진중함 대신 가벼움이 결코 내가 받을 상처를 피하게 해주진 않았다. 과거에 받은 상처를 어느 정도 낫게 해주긴커녕, 더 악화시키기도 했다. 사람은 감정이 있기에 어쩌면 가벼움도 하나의 감정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가벼운 상대방에게 가벼운 헤어짐을 고하는 그 순간도. 더 이상 가볍지 않아버린 진심을 가지고 온 상대방이 날 괴물이라고 몰아붙이던 순간에도 난 차라리 내가 그가 생각한 것처럼 잔인한 형상을 한 괴물이길 바랐다. 그래서 내가 잠시나마 이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 또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 또한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혼자 남기로 한 그 벽 안에서, 나는 미약하지만 내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인고의 벽에서 빠져나온 후에야 난 날 둘러싸고 있던 벽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아니 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진심의 흔적들을 발견했다.

단지 내 자신을 방어하겠단 생각으로 내뱉었던 날카로운 말, 진심이 아닌 말들이 결국 상대방을 밀치고 상처주기 되었다는 것. 결국 내 방어기제 때문에 내가 지독하리만큼 피하고 싶었던 상처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새로운 그에게 새로운 사람도, 그리고 좋은 그에게 좋은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제야 그가 내게 전하려고 했던 것을 깨달았다. 사랑이란 건 허위광고임을 알면서도 그만한 값을 매길 가치가 있음을 믿는, 그 자체라는 걸. 비록 깨질 만큼 깨져서 사랑에 닳을 만큼 닳을지라도, 그 사람과의 행복한 그 찰나를 위해서라면 부수적인 아픔까지 다 감수하길 원하는 그 마음 자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사랑을 하기로 했다. 결과가 뻔하고 형태는 같아 보이더라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랑. 또다시 애가 타고 착잡하지만 그만큼 행복하고 달콤한 사랑. 그 전과 같은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과 회의감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전체가 새하얀 스케치북이 될 순 없겠지만, 단 한 장이라도 그 사람만을 위한 새하얀 도화지를 남겨놓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에 행복해하는 소박한 사람이 되어보기로 했다. 이젠 내 자신이 아닌, 그를 위해 말이다.

인스타그램 @jeanbeherenow

keyword

Brunch Book

내게는 아직 어려운 사람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