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슬로바키아 심리상담사에게..!
발리에 도착하자마자 요가의 성지인 우붓으로 끌리듯이 향했다. 우붓은 공항 쪽 도심으로부터 택시로 약 1시간 ~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숲 속 도시이다. 메이플스토리의 엘리니아 같은 느낌이랄까.
다음날 새벽 6시경 눈이 자동으로 떠졌고, 또 불안감으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인생에 대한 온갖 걱정들이 휘몰아치는 흙탕물 속 모래들처럼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많은 생각과 걱정들에 압도되는 기분이 들 때 베개를 꼭 껴안았더니 조금 나아졌다. 8시로 요청했던 조식을 억지로라도 먹으니까 조금 더 나아졌다. 그래도 식욕은 돌아왔구나. 이 정도의 불안감은 살면서 처음 느껴봤다.
불안을 1에서 10의 범위로 생각해 봤을 때, 수능 보기 전날이나 면접보기 직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 직전의 불안감 등을 9~10으로 본다면, 이 때 매일같이 느껴지는 불안이 거의 9~10 수준이었다. 수능이나 면접은 한순간이고 금방 끝나지만, 이렇게 모호하고 강렬한 불안을 지금처럼 계속 느끼고 있는다면 내 심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 버릴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요가원 문은 아침 일찍부터 열었을 테니, 침대를 박차고 일단 나가기로 한다.
Yoga Barn에서는 나름대로 내가 듣고 싶었던 클래스를 골라 들었는데, 첫 번째 class는 이 쿵쾅대는 심장을 운동 때문이라고 착각시키기 위해 격한 운동클래스를 들었다. 결론적으로는 극적으로 좋은 효과를 보았다. 온몸이 긴장과 불안으로 굳어있었는데, 한 순간 사르륵 풀리는 기분이었다. 온 몸에 땀이 거의 샤워를 하듯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더운 날씨에 몸의 수분을 다 땀으로 쪽 빼버리니 엄청나게 개운해졌다. 역시 운동은 만병통치약이다.
그리고, 아무리 홈트를 좋아해도 역시 운동은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들과 같이 하는게 훨씬 재미있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게 된다. 운동을 하니 또 강제로 식욕이 생겨서 식사를 했는데, 원하는 음식을 실컷 먹어도 돈이 별로 안 나오는 기분이 정말 최고다. 메뉴 두 개에 음료수 하나까지 시켰는데 1만 원 남짓 나왔다. 밥을 든든히 먹고 나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 맨날 아침밥 안 먹는다고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엄마 말이 옳다. 내가 먹는 게 내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이후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클래스를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식사 후에도 2시간 정도가 남아서 Yoga Barn에 다시 돌아가 죽치고 앉아 있기로 했다. 여기서 운명적인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소리가 들리는 코티지에 앉아 낮잠이라도 때리려고 하는데, 한 여자애가 다가왔다.
Do you mind if I seat here?
기꺼이 앉으라 하고, 살짝 눈치를 살피다가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혼자 가만히 있으니까 또다시 올라오는 그 불안감을 도저히 감당하기가 힘들어, 누구든지 말할 상대가 필요했던 참이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Jessica, 슬로바키아의 심리치료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심리치료사라니!! 지금 나한테 제일 필요한 게 심리치료인 것 같은데. 관심이 갔다. 그녀는 심리치료와 명상에 대해 더 깊이 배우기 위해 40일 정도 우붓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마침 오늘이 마지막 날이고 내일 출국하는 날이라는데, 이 만남이 참 운명적으로 느껴졌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고민들과 마음 상태에 대해 나누기 시작했을 때, 예상도 못한 대상으로부터 참 많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한 것은 물론, 자신이 겪었던 불안들도 공유해 주고 도움이 되는 책들도 추천해 줬다.
부모님의 기대에서 나를 분리하는게 나도 참 어려웠던 것 같아.
같은 연령대의 여성으로서 부모님과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한창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뒤이어 커리어 고민, 여성으로서의 삶, 남자와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는데 어찌나 이렇게 말이 잘 통하던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하다 보니 점차 불안감이 사라지며 놀랍게도 마음의 안정이 찾아왔다. 그녀도 처음 나를 봤을 때 에너지가 너무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게 느껴졌는데, 대화 후에 내가 참 편안해 보인다면서 기뻐해줬다. 어쩌다 세상 낯선 사람에게 멘탈 테라피 비스무리한걸 받게 되었는데, 행운이랄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해줬어야 하지만 못해주고 있던 말들을 낯선 타인에게 들었다. 진로 앞에서 고민이 되는 건 당연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때 절대 죄책감 느끼지 말라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믿고 자신감을 가지라고. 세상에는 언제나 나보다 그 길을 먼저 간 사람들도,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도 수두룩할 거다. 그런 사람들이랑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아 나는 아직 너무 부족해, 아직 아는 게 없어' 라며 인생을 유예하고 머뭇거리지 말라는 말. 반대로, 아무리 대단한 학위가 있고, 대단한 커리어가 있어도, 내가 여전히 나를 믿지 못하고 나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 이 불안하고 외로운 에너지는 항상 나를 따라다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Fake it til you Make it
불확실에 완전히 노출된 상황이 참 괴롭기도 하지만, “이것도 다 인생 여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결국 내 인생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온통 마음이 말랑하고 연약해져서 툭 치면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흐물거리던 상태로 온 이번 여행에서 생존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새로운 환경, 믿을 건 오직 나 혼자인 이 상황에서 오히려 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아가는 내가 새삼 낯설고 새롭게 보였다.
특히 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요가는 사실 ’ 내가 뻣뻣하기 때문에 할수록 스트레스 받는다!'라는 핑계를 대며 한 달 배워보고 이별을 선언했던 운동 종목이다. 하지만 여기 와서 가장 먼저 요가원을 찾은 걸 보면, 요가는 단순히 신체 단련이 아니라 멘탈 수련에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운동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나 보다. 마음이 요동칠 때 도움이 되는 명상, 심신수련과 같은 것들의 종합선물세트랄까.
이후 Jessica와 함께 참석한 여성들만을 위한 여성 요가 (자궁 수업) 시간에서도 참 좋은 메세지를 얻었다.
모든 지혜는 내 안에 있고, 정답도 내 안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심각해 보이고 앞이 안 보이는 미래에 대한 문제들이 사실은 아주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 (요가 수업이지만 대화와 메세지 전달이 주를 이룬 이 수업도 거의 테라피 세션에 가까웠다.) 요가 선생님도 본인이 자궁 수술을 할 때, 무조건 다 떼어내야만 하는 옵션만 있는 줄 알았지만, 일부만 제거해도 문제없는 옵션을 찾았다는 자신의 에피소드를 공유해 주시며 말씀해 주셨다.
There are options.
그 한 마디가 참 마음을 깊이 울렸다. 그러니까, 인생에 더 다른 옵션이 없다고 느끼면서 좌절하지 말고 항상 ’ 내게 더 좋은 옵션'을 찾아 나서는 끈기와 힘을 가졌으면 좋겠다. 사방이 꽉 막혀 오갈 데 없다고 느껴질지라도 옵션은 언제나 있을 테니까. 내가 살아온 세상 속에서 아직 보이지 않을 뿐이니까. 우리는 언제나 옵션을 찾을 수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