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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혜진 Jean Seo Oct 21. 2023

‘취향’의 마더링-아비투스

고등학생인 딸은 라면을 먹을 때 봉지에 써져 있는 대로 물을 넣으면 짜증을 낸다. 너무 싱겁다고 한다. 간혹 내가 라면봉지에 써져 있는 레시피를 따라서 정석(?)으로 정성껏(?) 끓여서 주어도 여지없이 불호령을 내린다. 아무리 ‘파’도넣고, ‘계란’도 풀어넣고, 면이 붇지 않도록 시간을 조절해 주어도 소용이 없다. 오늘이 그랬다. 사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애들에겐 모든 엄마들이 ‘눈치’를 본다. 행여나 기분이라도 상해서 공부에 방해가 되었다는 얘기라도 들을까 봐, 나름 온갖 보이지 않는 애를 쓴다. ‘라면 대령’하라면 라면을 대령해야 한다.  그런데, 하필 오늘 라면 국물의 '나트륨 함량’에서 시험기간인 딸아이 심기를 건드려버렸다. '즐거움이 먹을 것밖에 없는데 왜 물을 많이 넣었느냐'라며 짜증이 난다고 얘기한다. 딸이 라면을 결국 다 먹지 않고 독서실로 가버렸다. 옆에 있던 대학생인 아들이 한술 더 뜬다. ‘아마 내가 고등학생 때, 지금처럼 민감한 시험기간이었다면 나도 짜증 날 수 있었을 거야’라며, ‘일종의 시위지~’라고 한다. 그저 나는 ‘엄마인게 항상 죄인 사람이다'라며 위안한다.




         

사실, 나는 라면은 국물맛으로 먹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무파마’를 좋아하는데, 우리 딸은 ‘삼양라면’을 좋아한다. 라면의 종류, 끓이는 물의 양, 계란을 넣고 안 넣고… 이 모두가 ‘개인의 취향’이다. 누군가는 수험생은 라면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할 터이고, 어떻게 집밥을 먹여야지 얘한테 ‘라면’이나 끌여주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말이 무의미해지는 때는 아이가 “엄마 오늘은 라면 끓여줘”라고 말할 때이다. 한편, 어떤 사람은 별것도 아닌 것에 뭘 그리 신경쓰냐는 사람도 있다. 어떤 엄마는 같이 짜증내면서, “공부하는 것이 대수니?” 라며 도리어 아이에게 짜증을 낼 수도 있다. 어디에 옳고 그름은 없다. 다만, 매 끼니를 ‘라면’을 먹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당연히 시험기간인 아이의 요구에 따라 ‘고급(?) 취향 라면’을 끓여주며, 딸에게 적극 호응해 준다. 많은 엄마들은 작은 것에서라도 아이가 공부하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공유해 주려고 노력한다. 반면, ‘공부는 지가 하는 거죠'라는 정반대의 ‘방임형’도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똑같은 엄마의 mothering이더라도 자녀의 성향과 지역적 특징, 그 해의 입시제도의 변화등 다양한 변수에 따라서 mothering의 과정과 결과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점은 아무리 변수가 다양하다 하더라도, 각자의 mothering에는 나름의 공통분모인 ‘취향’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아비투스’ (Habitus)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어떠한 결정을 내리며 다양한 사회적 행동을 수행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을 ‘Habitus’(아비투스)라고 한다. 아비투스 ([프랑스어] habitus)는 ‘제2의 본성’과 같은 것으로, 친숙한 사회 집단의 습성 따위를 뜻하는 말로,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Bourdieu)가 규정한 용어이다. 'Habitus’는 일반적으로 개인이 사회화와 삶의 경험을 통해 습득하는 뿌리 깊은 습관, 기술, 성향 및 취향을 말한다. 부르디외(Bourdieu)는 "문화 자본"의 개념을 도입해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증명하기도 했다. 각기 다른 계층의 문화적 가치와 관행을 전달하는 방법과, 이러한 요소가 사회적 계층화와 불평등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데 ‘Habitus’(아비투스)는 유용한 개념이다. (사실,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보이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지만, 여전히 “사회적 계급, 계층”의 존재함을 연구결과가 증명한다.) 왜냐하면, ‘what to do’(무엇을 할까?)를 결정하게 하는 기준과 당연히 여기는 행동을 하는 ‘why?’를 결정하는 것이 ‘Habitus’(아비투스)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들은 가족이 사회의 더 넓은 맥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연구해 왔다. 그중,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가족의 취향, 성향, 경향성’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의 개념은 부르디외(Bourdieu)의 ‘Habitus’(아비투스) 연구와 관련이 있다. 소위, 가족문화, 가정교육, 훈육, 양육등 포괄적 mothering의 모든 범주를 통해 자녀는 부모의 생각과 태도, 가족의 가치와 규범 및 행동을 배운다. 즉, '말하고, 따라서 느끼고, 생각하는 방법'과 '정신적 태도와 인지하는 방식’ 등을 배운다. 삶의 철학과 사는 방식등을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모방하게 된다. 많은 것들을 엄마는 mothering을 통해 자녀와 교환하고 이를 본성처럼 자녀는 학습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문화적 욕구가 양육과 교육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면,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에 따라 엄마가 선택하는 mothering의 방식과 결과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점은 당연히 예상된다. 왜냐하면, ‘아비투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mothering이기 때문이다. 

 




라면하나를 먹어도 사람마다 ‘취향’이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음악과 영화, 여행, 사람을 고르는 것에만 취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 mothering에도 “취향”이 있다. 어느 때에는 정성스러운 ‘집밥’ 레시피로 나만의 필살기로 아이를 위로하기도 한다. 반면, 어느 때는 그냥 라면을 끓여줘도 good mothering이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끓이는 ‘물양’에 좀 더 주의해야 한다~). 공부 분위기를 조성하겠다고 엄마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노력도 중요할 수 있다. 또한, 사교육을 최대한 시켜서라도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도록 mothering 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모두가 나름의 기준으로 mothering을 마치 스스로가 하고 있는 것 밖에 다른 대안이 없는 것처럼 열심히 한다. 이처럼, 교육적 선택을 하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비투스’이고 그것을 나는 여기서 ‘취향’이라 쓴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떠나 분명한 것은 모두가 최선의 노력을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엄마의 mothering은 이미 너무 수고스럽다. 다만, 언제나 중요한 원칙은 있다. 그 어떤 mothering이라고 하더라도 대상인 자녀가 있다는 점이다. 이 ‘대상이 있다’라는 점은 ‘상호성의 원칙’이 관계한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언제나 ‘충돌’과 ‘협상’이 있고, ‘전쟁’과 ‘평화’가 반복되는 대서사시의 일부라는 점이다. 그래서, 어떠한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를 만들어가고 싶은지 먼저 결정해야 한다. 우리 가정에서 교육과 관련하여서는 이 소위 ‘취향’이라고 불려질 수 있는, ‘가치, 와 ‘습관, ‘관행, 루틴’을 만드는 것이 엄마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것이 때로는 허용적일 수도 있고, 엄격할 수도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에 엄마는 가정 내의 큰 원칙, 즉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큰 대의명분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구체적인 마더링과 관련한 모든 결정에서 이것을 고민하는 것이 중요한 절차이다. 왜냐하면, 나의 현재의 무분별하거나 성찰하는 과정이 없는 ‘우왕좌왕’하는 원칙 없는 훈육에서 자녀는 엄마의 감정쓰레기통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고, 역으로 누가 어른인지도 모를 정도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아이로 자라나 버릴 수도 있다.

 





더 나아가,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를 가족과 교육이라는 맥락에서 먼저 잘 설정하려는 노력이 없을 때, 사교육에 휘둘리거나, 주변 친구에게, 또는 ‘사춘기’이거나 ‘수험생’이라는 발달과정에 따라 크게 동요되는 mothering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러한 힘든 청소년 시기가 끝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인가에 대한 원칙 없는 mothering으로, 결국 나의 노후를 위협하는 자녀리스크를 엄마인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재의 자녀교육은 미래의 '나'를 위해 더욱 심각히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물론, 자녀와의 ‘관계’의 단절은 당연히 연속선상에 있는 얻고 싶지 않은 ‘덤’이다. 그래서, ‘Family habitus’(가족 아비투스)를 가족과 교육이라는 맥락에 적용될 때, 가장 사랑하는 아이를 위한다는 나의 ‘취향’은 지금 거주하는 '동네'분위기나, 그때끄때 떠돌아다니는 정보에 엄마의 마음이 동의한 것에 기초를 둔 결정은 아니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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