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계속 걸어야 한다
딱 5년 전 이맘때 직장 동료들과 놀 권리 스터디 모임을 시작했다. 스터디는 1년가량 지속됐고 그 과정에서 놀 권리를 주제로 캠페인을 만들었다.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잘 놀 수 있기를 바라며 참 열심히도 내달렸다. 그 과정에서 감사하게도 책을 한 권 낼 수 있었고 칼럼도 썼다. TV, 신문에 얼굴도 비춰보고 전국 방방곡곡 강연도 다녔다. 놀 권리 말고도 여러 주제로 옹호 활동을 했지만 가장 마음을 쏟아냈던 것은 놀이였다.
놀이에 관한 활동을 시작했을 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여전히 친구들과 함께 실컷 맘껏 놀지 못하고 있다. 놀이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여러 지자체들에서 긍정적인 신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을 멈추는 기계가 있어야 놀 수 있다는 아이나 하루 10시간 학원에 갇혀 있다는 아이 앞에서 정말 아이들의 삶이 나아졌냐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6년 동안 다닌 회사에서 퇴사한 지 몇 달이 흘렀다. 몇 년 동안 난 무엇을 한 것일까. 어떤 변화를 만든 것일까. 내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한동안 생각이 이어졌다.
캠페인을 하며 일이 점차 몸에 익어갔다. 어디 가면 전문가 소리를 듣게 되었다. 내 자리, 내 영역이 생겨난다는 기분이 들 때는 뿌듯했다. 하지만 뒤가 자꾸 켕겼다. 겨우 한두 번 해본 것과 들은 것, 본 것을 가지고 충분히 씹지도 못한 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았나.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둘러댄 순간들도 많았을 것이다. 변화는 기미도 보이지 않는데 놀 권리 전문가라는 허울뿐인 '나'만 남은 것은 아닌지 내심 두려웠다.
변화를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내가 슈퍼히어로도 아닌데 지극히 미미한 내가 무슨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도 변명할 수 있다. 하지만 거짓 겸양과 합리화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침소봉대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그저 담담히 내가 한 고민과 변화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이 브런치 매거진에 남긴 스무 편 남짓한 글이다. 내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면 더 풍성하고 의미 있게 담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여기까지다.
마무리 글을 쓰며 제목을 뭐로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라는 자화상 시구가 떠올랐다. 단순해 보이는 문제도 들여다보면 복잡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어찌 보면 캠페인을 하며 내게 남은 것인데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처음 놀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는 오히려 선명했다. 아이들의 놀이 문제는 사교육 때문이고 놀이 시간만 확보하면 아이들은 어느 곳에서나 어떻게든 잘 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적과 아군처럼 놀이판에서 좋고 나쁜 것을 툭툭 구별해갔다. 획일적인 놀이기구는 나쁜 것, 모래놀이는 좋은 것. 하지만 지금은 놀이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놀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과도한 경쟁 교육 때문만이 아니라 보육, 환경, 빈부, 지역, 젠더 등등 대한민국의 모든 헝클어진 실타래와 닿아 있다. 놀이만, 공간만, 아이들만 따로 떼어 보면 되레 잘 보이지 않는다. 또한 학교 안에서 놀이 시간을 늘리는 것이 누구에게는 놀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신나는 일이지만 누구에게는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연장이 될 수도 있다. 좋음과 나쁨도 딱 떨어지지 않는다.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넬슨 만델라)
놀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피며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본 느낌이다. 놀지 못하는 아이들은 그 아이들대로, 방치되어 너무 노는 아이들은 또 그 아이들대로 우리 사회의 영혼을 드러낸다. 나와 똑같은 권리를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서 아이들의 개별성과 자율성을 존중했다면 어땠을까? 동시에 가정 안에서 따뜻한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품었다면 놀이 상황도 지금과는 달랐을 것이다.
물이 더러워지면 그 물로 밥을 지어도 문제가 생기고 얼굴을 씻어도 트러블이 난다. 결국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놀이'라는 주제에서 드러났을 뿐이다. 동시에 아이들과 관련한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 문제들은 나타나고 있다. 그게 우리 사회의 수준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함께 엉망진창으로 굴러간다. 그래서 가도가도 답이 보이지 않고 그렇게 복잡했나 보다.
"결국 세상을 움직이는 건 개개인의 깊은 내면의 변화들이 모이는 힘이야"(영화 <동주>에서)
그럼에도 계속 걷기로 한다. 복잡함을 인정하기로 한다. 어차피 문제가 단순하지 않고 변화는 하루아침에 찾아오지 않는 전도요원한 것이라면 그냥 내 앞에 주어진 길을 걸어가기로 한다. 머뭇거릴 필요도 주저앉을 필요도 없다. 어차피 출발선이나 중간지점이나 결승선까지 멀기는 매한가지다. 까마득하기에 오히려 툴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길에 서 있다.
누군가는 잘 달리던 길 말고 왜 새로운 길의 출발선에 서느냐고 말하겠지만 내게는 익숙한 길,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다. 다른 운동화를 신고 다른 풍경을 맞으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리겠지만 이 길이 내 길이다. 계속 걷기로 한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대하는지 살펴보며 내가 할 수 있는 분량의 말과 글과 행동을 하고 싶다. 그 길이 놀이든지 무엇이든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