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 놀이터 개선에서 놀이터 3.0으로 나아가기 위한 3 STEP
세종, 부산, 서울, 제주, 군산, 안양, 고양, 양천, 노원, 여수, 시흥, 홍천, 전주, 순천... 이들 지자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작년에 놀이터 개선사업을 진행했거나 진행한다고 발표한 곳들이다. 사실 더 많은데 검색하다 보니 수백 개가 나와서 멈췄다. 전국 모든 지자체가 다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앞다투어 놀이터 개선사업에 나서고 있다. 왜 갑자기 지자체들이 열을 내게 된 것일까? 놀이의 중요성이 사회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고, 저출산 시대에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를 어필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요즘 지자체에서 진행하는 놀이터 개선사업은 과거와는 다르다. 옛날에는 지자체가 사업을 알리면 놀이터 업체가 저렴한 예산에 맞춰 빼곡히 놀이기구를 채우고 빠지는 단순한 방식이었다면, 요즘 개선사업은 예산도 커졌고 지자체의 관심도 많아졌다. 디자인이나 놀이기구 종류, 배치도 창의적이다. 물놀이터, 숲놀이터, 실내놀이터, 생태놀이터, 통합놀이터 등 콘셉트도 다양해졌다. 주민과 아동참여, 시민사회 단체와의 협업에 이르기까지 과정에도 당사자 참여가 활발해졌다. 그 결과 새롭고 다양한 놀이터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됐으니 박수 짝짝 치고 끝낼 때일까?
아직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다른 놀이터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이 보이지 않는다. 큰 예산을 들여 놀이터 한 두 곳을 멋들어지게 개선했다는 소식은 이어지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수십 개 놀이터를 위해 무엇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개선된 놀이터 근처 사는 아이들은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세월이 흐르면 조금씩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지금 당장 너무나 많은 놀이터들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덮어놓고 짓는데 치중하고 있다. 지금 개선사업은 아이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왜 놀이터가 외면받는지 살펴보는 과정이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를 알고 그에 따른 해결책으로 개선사업이 나와야 하는데 일단 덮어놓고 새로 만드는 방식이다. 새로 지으면 반짝 이용률이 늘어난다. 원래 잘 이용되는 곳이었다면 큰 문제는 없다. 하지만 노숙자나, 주취자, 교통안전 등 특정 문제가 있는 놀이터라면 몇 달 지나면 도루묵이다.
마지막으로 지자체장의 치적 사업 이벤트를 넘어서야 한다. 지자체장이 놀 권리에 크게 관심이 없어도, 사회적으로 놀이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져 선거에 도움이 안 돼도 아이들의 놀이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놀이터 개선사업이 특별한 이벤트를 넘어서 일상적인 행정 안에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과거 놀이터를 방치하거나 대충 짓는 방식이 놀이터 1.0이었다면 현재는 2.0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개선사업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3.0으로 나아가야 한다. 3가지 step을 함께 밟아보면 어떨까?
문제 해결의 첫걸음은 문제를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것이다. 놀이터도 마찬가지다. 바로 삽 들고 땅부터 파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문제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놀이 자원에 대한 전체 맵핑이 필요하다. 어린이공원 주소 리스트를 배포하는 차원이 아니라 분석이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먼저 지도에 어린이공원을 표시한다. 규모에 따라 작은 놀이터, 중간 놀이터, 큰 놀이터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학교 운동장이나 아파트 놀이터도 표시해준다. 실내 놀이터나 숲, 공터 등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놀이 공간도 함께 넣는다. 각 놀이 공간은 고도나 도로교통 등 여러 이유로 접근성에 각각 차이가 있다. 따라서 대략적인 영향범위를 표시한다. 마지막으로 놀이공간이 정리된 지도에 동별 아동 인구를 얹히면 완성이다.
이런 지도를 보면 가장 먼저 놀 공간이 부족한 지역이 드러날 것이다. 이곳에 놀이 공간을 조성해야 한다. 현재는 이런 과정이 없이 특별한 기준이 없거나 주민 민원이 많은 곳, 사업을 벌이기 용이한 곳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물론 기존에 놀이터가 없는 곳에 새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기초자치단체에서 단독으로 진행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광역시나 중앙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또한 꼭 놀이터 형태가 아니어도 길거리 놀이터나 공공건물의 옥상을 활용하는 옥상 놀이터, 빈 공간에 실내 놀이터를 조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취하든 핵심은 놀이 자원이 가장 부족한 곳에 놀이 공간을 만든다는 정책적 변화이다.
이용률이 떨어지고 문제가 많은 놀이터들은 이유가 제각각이다. 입지부터 잘못된 곳은 아무리 돈 써봐야 노답이다. 풀만 잘 베고 쓰레기만 잘 주워도 아이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곳도 많다. 시설은 그럴듯한데 주취자나 노숙자 문제가 있는 곳도 있다. 놀이기구보다 놀이터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한 곳도 있다. 놀이터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큰돈 들여하는 개보수만이 정답은 아닐 수 있다. 환경진단이 필요한 이유다.
나도 함께 참여한 사례가 있다. 2017년 세이브더칠드런과 군산시, 벤처기부펀드 C Program은 군산시에서 놀이터 전체를 대상으로 환경 진단을 실시했다. 접근성과 위생, 안전, 유지관리, 놀이성 항목을 시민조사원이 놀이터에 직접 방문해 진단을 했다. 이 결과 각 놀이터 상황에 맞춰 개선이 필요한 영역을 찾을 수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환경진단을 아예 법에 넣은 나라도 있다. 웨일스는 2010년부터 놀이 환경 진단을 의무화했다. 이에 따라 지자체는 주택단지를 만드는 과정에 아동놀이 영향평가를 실시한다. 또한 장애아동이나 빈곤아동과 같이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놀이환경 조성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다.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아이들의 의견을 수렴한다. "너는 원하는 모든 곳에서 놀 수 있니?", "놀 때 얼마나 안전하다고 느끼니?", "네가 놀 때 어른들의 반응은 어떠니?"와 같은 질문들로 놀이 환경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하고 직접 아이들이 환경진단에 참여하기도 한다.
"만약 내게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오직 1시간만 주어진다면 나는 문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데 55분을 쓰고, 해결책을 찾는데 나머지 5분을 쓸 것이다."(아인슈타인)
환경진단은 문제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문제를 알고 나면 해결책을 찾는 일은 쉽다. 개선사업을 결론으로 정해놓고 문제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닌 진짜 문제 찾기에 나선다면 새로운 차원의 놀이터 활성화에 이를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얼마 전 모험놀이터가 생겼다. 우리 동네 국회의원이 후보 시절 예산을 따오겠다며 선거에서 공약을 했고 당선 이후 행정자치부로부터 특별교부세 7억을 받아내 놀이터를 만들었다. 공약을 지킨 국회의원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 동네 국회의원이 신도시 젊은 부모들 표에 관심이 없었다면 과연 모험놀이터가 생길 수 있었을까? 우리 동네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 대부분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개선사업은 시장과 국회의원, 교육감의 지대한 관심과 노력으로 '특별'한 예산이 집행되어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라고 우리는 선거를 한다. 특별한 예산도 시스템의 일부이다. 하지만 특별한 예산은 장기적이고 연속적인 사업을 위한 예산은 아니다. 일시적이고 당장 내년을 기약할 수 없다. 그저 장들의 관심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지금처럼 놀이터 한 두 곳을 개선하는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재선이라도 되면 다행인데 새로운 분이 오시면 전임자의 색채가 강한 사업을 이어서 할지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의 놀이환경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더 큰 그림과 장기적인 비전을 그릴 수 있을까?
사회적인 관심이 조금이나마 있으니 이렇게 개선사업이라도 일부 하지만 관심은 언제든 사라지기 마련이다. 다시 1.0 시절로 돌아갈 것인가? 놀이터를 수리하고 청소하기에도 빠듯한 예산이 책정되고, 놀이터는 도시 개발이 있어야만 지어지는 현재 시스템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 특별하게 하고 있는 긍정적인 프로세스를 정규화하고, 좀 더 큰 비전을 세우기 위한 시스템 만들기가 필요한 이유다.
광역자치단체와 중앙정부의 역할이 시스템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광역자치단체가 일상적인 놀이터 유지관리를 위해 기초자치단체에 장기적으로 예산을 매칭해 지원해주는 것은 어떨까? 유지관리에 충분한 예산이 반영되면 수 억씩 들어가는 개선사업을 몇 곳 진행하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한 환경진단과 같은 번거롭지만 꼭 필요한 일이나, 놀이터 개선의 기획과 디자인, 참여활동은 광역에서 맡아서 할 수도 있다. 중앙정부는 놀이터 활동가를 양성하고 놀이터 맵핑을 비롯한 관련 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센터나 연구소를 설립하는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놀이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도 기초자치단체나 일부 지자체장들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온 나라가 함께 해야 할 때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덮어놓고 짓자는 사람 중 하나였다. 가장 쉽고 빠른 길이고, 이걸 해보고 저걸 해봐도 어차피 결론은 놀이터를 다시 짓는 것으로 수렴된다고 생각했다. 놀이터가 가진 고질적인 문제는 좋은 과정을 거쳐 잘 만들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믿었다. 어쩌면 놀이터 2.0은 내 과거에 대한 고백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파트너 기관의 만류와 아이들과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특히 현장을 여러 차례 방문할수록 개선사업에 바로 들어가는 것이 원인은 내버려둔 채 현상에만 집중하는 대증요법에 머무를 수 있다고 느꼈다. 놀이터가 만들어진 동네 아이들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 수 있었을지 몰라도 '다음'을 위한 제안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놀이터 3.0은 놀이터 2.0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다. 놀이터를 제대로 된 과정을 거쳐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질문을 던지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노고가 쌓여 놀이터 개선사업은 해외 전문가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제는 잘 만들어진 놀이터들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이야기할 때다.
이야기의 시작은 역설적이게도 놀이터에서 줌-아웃해야 한다. 놀이터와 놀이터 사이, 놀이터와 동네 사이, 놀이터와 시스템 사이를 오갈 때 우리는 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메인사진 by Christian Che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