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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이소 Jan 18. 2021

택배노동자를 대하는 나의 이중적 태도

조금 더 여유를 가져도 좋을 텐데 말이죠.



금요일 오후. 월요일 오전에 주문한 택배가 오지 않는다. 송장번호 조회는 어느새 하루일과가 되었다.


[서울 북부 TML]


화요일부터 같은 곳에 멈춰있다. 정확히 어떤 작업 중인지는 모르지만 오늘도 택배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였다.








주문한 물건은 '줄 없는 줄넘기'였다. 엄마가 보던 ‘미운 우리 새끼’라는 방송의 출연자가 한 시간 씩 줄넘기를 해서 살을 20kg을 뺐다나 뭐라나. 줄넘기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은 중학교 수행평가 점수로 여실히 증명되었지만, 줄 없는 줄넘기라면 문제없었다. 주문한 ‘디지털 노라인 줄넘기’는 손잡이 끝에 달린 동그란 추가 돌아갈 때마다 손잡이 화면에 횟수가 표시되는 최첨단(?) 홈트레이닝 도구였다. ‘이 녀석만 있으면 체지방 5kg 따윈 손쉽게 없애버릴 수 있을 거야.’ 만화 속 3류 악당 같은 대사를 곱씹으며 다이어트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심지어 금요일이 되도록 나의 줄넘기는 한 곳에 머물러 움직일 줄을 몰랐다. 운동복과 의지는 준비가 되었는데 물건이 없으니 영 운동할 맛이 나지 않았다. ‘줄넘기가 안 와서 살을 못 빼고 있잖아!’ 몸무게가 줄지 않는 이유가 택배 때문이라는 경이로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 즈음, 판매자를 닦달했다.


[사회적 이슈로 인한 택배물량 폭주 및 배차 지연 등의 사유로 지연되고 있습니다. 고객님의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붙여 넣은 듯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고 봐, 별점 1점 줘 버릴 거니까.’ 고약한 심보였다. 며칠 전 과로사한 택배 노동자의 기사를 SNS에 공유한 사람 치고는 공감력이 없는 모양새였다.



   





열심히 공유했던 기사는 어느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지병 없이 건강한 30대 청년이었다. 연휴 및 비대면 문화 확산으로 물량은 급증했으나 인력은 지원되지 않았다. 고된 노동 끝에 집에서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택배 노동자의 처우 문제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택배노동자 과로사’라고 검색하면 수두룩하게 기사가 쏟아져 나온다. 전국 택배 노동조합은 “더 이상 죽어가는 동료를 지켜볼 수 없다.”며 사회적 총파업을 선언했고, 올 1월에야 국회에서 택배기사 과로사 방지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처럼 택배노동자의 처우 개선에 대한 문제는 전면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어야 할 사회적 문제로 자리 잡았다. 나 역시 깊이 공감하고 그들에게 연대했다. 


그러나 얄팍한 연대는, 줄넘기가 5일 동안 터미널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물에 젖은 미농지처럼 흐물흐물해졌다. 택배 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한 사회적 이슈에 기꺼이 공감하고 지지하지만, 내 택배는 3일 안에 오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이다. 


대체 왜 나는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걸까?          








씩씩거리며 SNS를 보는데 마침 ‘택배 재촉하지 말자’는 글과 함께 사진이 올라왔다.




순간 숙연해졌다. 배송을 닦달하던 내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우리 동네 택배 기사분도 어쩌면 몸을 다쳤거나, 휴식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같이 솟아올랐던 감정이 슬금슬금 구석으로 도망쳤다.



화를 내던 나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터미널에 5일 씩이나 방치해두다니, 왜 할 일을 안 하는 거야?’


빨리 배달이 안 되니 게으름 피우는 택배노동자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러나 택배 기사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해가 된 것이다. 누구나 직업적인 의무를 가지지만,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의 맥락을 이해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음을, 나는 무시해왔던 건 아닐까?








얼마 전 혹한 속 내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아이 사건도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 날 체감온도는 영하 17.3도였다. 양부모의 학대로 사망한 아이 사건으로 화두에 오른 아동학대 이슈에 기름을 붓는 뉴스였다. 내복 아이 엄마는 순식간에 5살 아이를 집에 홀로 방치한 아동학대범이 되어있었다.


나 역시 뉴스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추운 날 내복만 입은 아이가 발견된 정황에서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겼다.



그러나 판이 뒤집혔다. 한 방송의 인터뷰로 그 날의 일을 더 깊이 들을 수 있었다.


아이 엄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주 5일 일 8시간 근무해 월 140을 받고 있었다. 조건부 수급자였기에 일을 하지 않으면 수급 자격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였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반일제로 전환하고자 했으나 급여가 반으로 줄고 새로운 교육을 받아야 하기에 그마저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날따라 아이는 일어나기 싫어했고, 출근시간은 임박했다. 정부 지원 수급 일자리를 원하는 대기자가 끝도 없는 상황에 엄마는 일을 놓을 수 없었다. 아이와 함께 보호시설을 나오기 위해 월세 보증금을 악착같이 모으던 때처럼, 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전남편은 월 10만 원의 양육비조차 보내주지 않았다. 그녀는 생계의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인터뷰 속 아이 엄마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잘못이라 했다.


아이 엄마는 분명 잘못이 있다. 그러나 과연 개인의 잘못으로 결론 지어 끝낼 수 있는 문제일까? 양육비 지급에 대한 강제성이 없는 법, 한부모 가정의 생계지원, 일자리 지원 및 양육 보조의 부재 등 복지 시스템 전반에 대한 지적. 아이 엄마의 사연에 귀를 기울였기에 사회적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섣불리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버렸다면 그저 ‘아이를 혹한으로 밀어 넣은 잔인한 모정’으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이제는 무슨 일이든 판단하기 전에 한 템포 쉬어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커다란 사회적 이슈뿐만 아니라 가족, 친구, 직장 관계 등 일상적인 부분부터 시작했다. 거창한 사명감은 아니다. 그저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무도 나의 상황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억울하고 서러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줄넘기는 일요일 오전에 도착했다. 택배가 늦어 운동을 못한다는 비약적인 변명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그저 일요일 오전에도 뛰어다녔을 택배 기사님의 모습이 그려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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