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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희 Sep 30. 2022

7화. 아무래도 돈이 문제다

(장편소설) 저주 딜리버리 프로젝트


바지가 자꾸 엉덩이에 끼인다. 종일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마다 바지를 잡고 내려야 했다. 이대로라면 곧 펭귄 쌤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옷도 찾아가야겠다. 오후엔 수업이 하나 잡혀있긴 했지만 아직 몸이 덜 회복되었다는 핑계로 점심시간을 틈타 학교를 빠져나와 곧장 집으로 향했다. 더는 집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엉망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내 모든 것이 담겨있는 이곳을 집이 아니면 뭐라고 부를 수 있나.


비장한 얼굴로 내게 내민 조건이었던,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고 몸만 오라는 김 선생님의 집에 들어가 산지 삼 일째다. 당시엔 집에서 쓸만한 짐을 직접 골라올 만한 여력도 없었고 당장 더 낼 병원비도 없었기에 일단 김 선생님의 차를 타고 아파트로 정말 '맨 몸'으로 들어갔다. 재작년에 신축했다는 새 아파트의 입구엔 아직 덜 자란 어린 동백나무들이 열을 맞춰 깔끔하게 심겨 있었다. 차를 세우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갈매기가 수없이 머리 위를 서성이고 파도소리와 통통배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는 우리 동네와 겨우 1km 남짓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조용했다. 김 선생님이 금색 카드 한 장을 꺼내 인식기에 대자 미세한 바람소리처럼 위이잉 하고 자동문이 열렸다. 비슷한 인식기가 달린 큼직한 엘리베이터의 부드러운 움직임에 몸을 맡기자 금세 13층에 도착했다는 표시가 떴다. 김 선생님은 현관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려다 잠시 멈칫하더니 카드로 잠금을 푼 후 나를 돌아보았다.


"이... 이거 받으세요."


내가 말없이 김 선생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허둥지둥 카드를 내게 쥐어주며 현관문을 당겼다.


"비... 비밀번호는 외우기 힘드실 거예요. 드... 들어오세요."


조금 찝찝한 기분으로 김 선생님을 따라 현관에 들어섰다. 먼지 한 점 안 보이는 새하얀 타일 위에 새하얀 운동화를 조심스레 벗었다. 화재가 난 날 난 맨발로 병원에 실려왔었다. 급히 병원 편의점에서 산 슬리퍼를 신고 퇴원하려고 했는데 차에 올라 타자 눈앞에 새 운동화가 불쑥 나타났다.


"이... 이사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내 몸에서 유일하게 하얀색이었던 운동화를 벗자 시커먼 발이 불쑥 드러났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소름이 돋았다. 얼른 방바닥으로 발을 옮겼는데 이번에도 낯선 촉감이 느껴졌다. 집 전체에 카펫을 까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 하고 감탄하고 있는데 이번엔 눈앞에 가죽 슬리퍼 하나가 쑥 들어왔다.


"이... 이것도 선물이에요."


이 날 내가 받은 '선물'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새 양말 다섯 켤레(흰색), 바지 두 벌(검은색), 셔츠 네 벌(흰색), 잠옷 두 벌(아이보리색), 속옷 네 벌(흰색), 구두 한 켤레(검은색), 각진 가방 한 개(검은색). 김 선생님은 내가 방을 하나하나 구경할 때마다 미션이라도 수행한 듯 새 물건들을 하나씩 전해주었다. 사실 그 선물들이 내 신경을 조금 분산시켜주지 아니었다면 난 당장 패닉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기대했던 대로 김 선생님의 아파트는 넓고 깨끗했고, 덩치 큰 내가 들어와 산다 해도 큰 영향을 주지 못할 만큼 넉넉한 공간을 자랑했다. 방과 거실마다 위치한 커다란 창 너머에는 멀리 태풍이 지나고 잠잠해진 바다가 보였고, 새하얀 커튼이 시원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고급 호텔에 가본 적은 없지만 가장 비싼 스위트룸도 여기보단 덜 고급져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이 집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고급스럽다.


집 전체에 아이보리색 카펫이 깔려있고, 천장과 벽 어디에도 몰딩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방문마저도 닫으면 벽으로 보일만큼 비밀스러웠다. 어느 벽을 무심코 짚으면 새로운 공간이 열릴 것만 같았다. 이 이유 외에도 내가 무심코 여기저기를 짚을 수 없는 이유는 많았다. 거실로 들어서자 멋진 풍경이 보이는 커다란 창 앞에 눈길을 사로잡는 조각상 하나가 있었다. 저런 걸 뭐라고 하더라... 루브르 박물관 이런 데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흉상? 울룩불룩 완벽한 근육과 눈에 띄는 얼굴을 지닌 조각상이 오후의 따스한 햇살을 받아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엔 검은색 가죽으로 된 작고 비싸 보이는 안락의자가 하나 조각상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미술품 수집이 취미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크고 값이 상당히 비싼 것들을 주로 모으시는 줄은 몰랐다. 아파트는 전체적으로 방금 이사라도 온 듯 깨끗했지만, 집안 곳곳에 자리한 값비싸 보이는 미술품과 가구들 때문에 행동하기가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 집에선 우리 집과는 달리 통로를 지나기 위해 몸을 가로로 돌려 종종걸음으로 다니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무엇 하나 잘못 건드릴까 겁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산사태는 일어나지 않겠지만, 이 비싼 것들을 실수로 망가뜨리느니 온몸에 멍이 드는 편이 나았다.


김 선생님이 왜 내가 이 집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는지 이제는 알 것도 같았다. 맨 몸으로 왔음에도 난 이미 이 집에 멋모르고 잘못 들어온 야생 곰 한 마리가 된 것 같았다. 김 선생님도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여기저기를 서성이자 덩달아 더 불안해진 모습을 보였다.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얇은 유리 조명을 보고 있는 나를 안방으로 끌고 가 피곤할 테니 씻고 좀 자는 게 좋겠다는 명령 비슷한 말을 남기곤 문을 닫았다. 자신의 집이어서 그런지 학교에서 보다는 좀 더 내게 '지시'를 내리는 게 익숙해 보인다. 선물로 받은 옷들은 모두 XXL 사이즈였지만 디자인 자체가 날렵하게 나온 것인지 바지들이 모두 좀 작았다. 김 선생님의 냄새가 나는 샴푸로 적당히 온몸을 씻은 다음 두 다리를 잠옷 바지 안에 넣었을 때, 난 이곳이 아닌 내 집이 꼭 있어야 살아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안방 위 지붕이 있던 자리엔 새파란 천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저승사자 같은 기자의 카메라에 찍힌 그날 저녁 병원으로 돌아와 밤새 집을 되찾을 방법을 모색했다. 모두가 잠든 밤의 병원은 생각을 정리하기 아주 좋은 장소였다. 이따금 들리는 엠뷸런스 사이렌 소리를 학교 종소리라고 생각하며 달빛에 비치는 천장을 칠판 삼아 선택지들을 하나씩 쓰고 지워나갔다.


선택 1. 집을 새로 짓는다.

돈 없음. 탈락. 주택보험이 만료되는 바람에 하나도 보상받지 못했다.

선택 2. 집을 허물고 저렴한 컨테이너 창고를 둔다.

그럴 듯 하지만 휴식을 취하기에는 좀 불편할 것이다. 탈락.

선택 3. 보수공사를 한다.

새로 짓는 것만큼 돈이 많이 들 가능성이 있다. 탈락.


아무래도 돈이 문제다. 부모님의 보험금이 아주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집을 새로 짓거나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금액은 되지 않는다.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야금야금 꺼내 썼으니 지금은 낡은 중고차 한 대를 살 수 있을 정도만 남았을 것이다. 역시 옷장을 찾아야 한다. 할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이 집 외에 내게 크게 남겨줄 유산은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동네 금은방 사장님이 내게 '그럼 그 반지들은 결혼 예물로 가져갈 거냐'라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얘기인즉슨 할머니가 아주 예전에 반지며 목걸이며 금으로 가득 찬 보석함을 들고 와서는 감정을 받고 갔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그땐 집 안이 그렇게 꽉꽉 차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 짐들이 널려있긴 했지만 내 덩치가 지나다녀도 무언가가 떨어지고 넘어가지는 않을 정도였다. 대신 안방은 예외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난 이 집을 진정한 내 집으로 만들기 위해서 할머니가 쓰시던 물건들을 모조리 안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내 취향에 맞는 물건들과 가구들을 하나씩 사서 새로 채워 넣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보석함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미 문이 더 이상 닫히지 않을 정도로 안방은 창고로 변해 있었다. '샅샅이' 뒤졌다고는 하지만 안방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뒤지지는 못했다. 굴을 파듯 안방에서 물건들을 꺼내 헤집어가며 보석함을 찾았고, 그 물건들이 밖으로 하나 둘 튀어나오며 나름 깔끔하게 새 집처럼 꾸며둔 거실이 점점 엉망으로 변해갔다. 안방의 절반 정도를 뒤졌을 땐 짐들이 주방과 옆방을 침범해버린 상태였다. 결국 난 보석함 찾기를 포기하고 언젠가 정말 돈이 필요한 순간에 찾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난 그 보석함이 저 자개장 안에 있으리란 확신이 들었다. 할머니는 귀한 물건이 생기면 꼭 저 자개장 안에 보관했다. 예물로 받으셨다는 비싼 코트도, 아버지가 남긴 유품도, 내가 첫 월급을 받아 선물한 양산도 모두 저 안에 들어가서 절대 다시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거대한 보물 상자나 다름없었다. 그렇담 그 많은 금반지도 저 안에 들어있을 것이 분명하다. 돌아가시며 내게 귀띔하지 않으신 건 서프라이즈를 하고 싶으셨던 걸지도 모른다. 할머닌 동화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으셨으니까. 저 동화 속 성 같은 자개장에서 꼭 보석함을 찾아내야 한다. 내 집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선택 4. 보석함을 찾아 돈을 마련해 집을 짓든 보수를 하든 내 집을 되찾는다.


펄럭펄럭 요란한 천막 아래로 바지를 다시 한번 잡아 내린 후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오늘은 꼭 보석함을 찾고야 만다. 바지도 하나 챙겨가고.


김 선생님의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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