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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희 Sep 30. 2022

8화. 이제 고지가 눈앞이다

(장편소설) 저주 딜리버리 프로젝트


왜 나에게만 자꾸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건 너무하잖아.


김 선생님의 아파트에 얹혀 지내기 시작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난날이었다. 매일 아침 산사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아파트에서의 생활은 나름대로 쾌적했지만, 그 안에선 도무지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 익숙한 물건이라곤 액정이 나간 휴대폰 하나뿐인 집에선 어디에 앉는 것도 화장실에 가는 것도 불안했다. 가장 불편한 장소는 주방이었다. 김 선생님은 매일 저녁 내게 고급스러운 요리를 한 상 가득 차려주었다. 몸에 좋아 보이는 음식들이 차례차례 새하얀 접시에 담겨 새하얀 식탁 위에 놓이면 일어나서 이라도 닦고 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요리를 애초에 하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매일 이렇게 대접받는 식사에 불평을 할 수는 없지만, 멸균상태의 실험실에서 먹는 것 같은 식사는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김 선생님은 아침 식사 시간에 내게 신선한 과일 주스와 함께 영양제 대여섯 가지를 항상 챙겨주었다. 겨우 뜬 눈으로 한주먹 가득 알약을 입에 털어 넣고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학교에 동거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할 수 있겠다는 핑계로 출근은 각자 따로 하기로 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동시에 현관을 나서서 김 선생님은 차에 올라타고 난 언덕 아래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첫날 학교 뒷문에서 내려준다는 걸 겨우 말렸는데, 운동이 될 테니 나쁠 것은 없겠다고 하고는 그날 저녁 내게 스마트워치를 선물이라며 건넸다. 어제도 정말로 걷기 운동을 즐기는 척 팔을 휘적휘적하며 내려가다가 김 선생님의 차가 정말로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후 곧장 오른쪽 소나무 숲으로 뛰어들었다. 15분 정도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우리 동네가 한눈에 보이는 빈 공터가 나왔다. 높게 자란 풀을 헤치며 땅이 꺾이는 부분에 다다르면 녹슨 공사표지판 옆으로 아래로 내려가는 시멘트 계단이 있다.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 큰 도로를 건너서 한참을 골목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지붕 대신 파란 천막이 씌워진 우리 집이 보였다. 반쯤 떨어진 '위험' 딱지가 붙은 대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 최대한 조용히 다시 닫았다. 그리곤 곧장 대문 근처의 작은 장독 위에 가방과 스마트워치를 풀러 올려두었다. 그리고 옆의 큰 장독대의 뚜껑을 열고 비닐봉지 안에 든 운동복을 꺼내 서둘러 갈아입고는 입고 있던 흰 셔츠와 작은 바지를 가방 위에 얹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두와 양말을 벗고 꺼내 둔 슬리퍼에 발을 집어넣으면 작업 준비 완료.


작업 시간은 30분을 넘기면 안 된다. 산책로를 아무리 길게 둘러봐야 아파트에서 학교까지 1시간이면 도착한다는 걸 눈치채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에서 집까지 20분, 집에서 학교까지는 10분 정도가 걸린다. 서둘러야 한다. 안방(이었던 곳)으로 들어서서 불타고 물에 젖어 악취를 풍기기 시작하는 물건들을 하나씩 들어 마당으로 집어던졌다. 도중에 조금이라도 쓸 만한 물건들이 보이면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 집어넣었다. 피해가 적은 현관에 지난번에 사둔 플라스틱 박스들이 한가득 쌓여있을 테지만 열쇠가 없어서 문을 열지 못한다. 양말 한 짝, 정체불명의 충전기, 보험회사에서 받은 플라스틱 부채, 한쪽이 살짝 깨진 레몬즙 짜개... 불이 가장 심하게 붙었던 안방엔 건질 만한 물건이 많이 없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커다란 봉투가 금세 가득 찼다. 묵직한 봉투를 번쩍 들어 '산'이 쌓이기 시작한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앞에 턱 가져다 두었다. 그리곤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이제 고지가 눈앞이다. 매일 아침 그리고 주말마다 집에 와서 거실 창문을 타고 들어가 안방의 옷장까지 길을 만든 지 거의 한 달이 지났고, 비로소 옷장에 팔이 닿았다. 절반 이상이 불타버려서 옷장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저 잿더미 아래 어딘가에 보석함, 아니면 홀로 남은 금덩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팔을 뻗어 안을 파헤치려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벌써 25분이 지났나. 오늘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거의 다 왔는데. 아쉽지만 오늘은 아침 수업도 잡혀있고 슬슬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한 김 선생님의 눈을 피하려면 지금 가야만 한다. 재빨리 현관 옆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가서 손과 얼굴을 벅벅 씻었다. 그을음이 생각보다 쉽게 씻겨지진 않지만 꼼꼼히 씻어낼 시간이 없다. 나중에 학교에 가서 마무리하면 된다. 대문 앞에 놓인 옷가지들로 갈아입은 후 비닐봉지 안에 들어있던 물건 들 중 서너 가지를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마지막으로 스마트워치를 다시 손목에 차고 보니 남은 시간은 8분 남짓. 달려야 한다.



금반지들을 찾으면 집을 다시 짓는 게 제일 나은 선택일까? 라벤더 향이 나는 하얀 베개 위에 머리를 빳빳하게 대고 누워 생각했다. 불이 꺼진 어두컴컴한 방엔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김 선생님의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보니 아직 새벽 세 시를 겨우 넘긴 시각이었다. 이곳에선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밤새 굳은 몸을 슬쩍슬쩍 돌려가며 시간을 때우다 다음날 학교 도서실 문을 잠그고 쪽잠을 자는 게 일상이 되었다. 오늘 밤도 한 숨도 못 잘 모양이다. 대신 김 선생님이 확실하게 깊이 잠든 새벽녘에 몰래 안방을 빠져나와 낮에 사서 가방에 숨겨둔 간식을 꺼내 먹는 재미 덕분에 덜 괴로울 수 있다. 다리부터 슬쩍 밖으로 빠져나오자 힘껏 가라앉았던 매트리스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다행히 김 선생님은 미동도 없이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쉬고 있다.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고 '통로 이동'에 숙련된 실력으로 미끄러지듯 거실로 나왔다. 이럴 땐 바닥이 카펫인 것이 상당히 편리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 밤엔 달빛이 약한지 얇은 커튼만 쳐진 거실도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둠에 잠겨있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앞을 비추어 가방이 있는 현관 앞 '우리' 서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재문을 천천히 열자 '내' 책상 위에 놓인 목표물이 플래시에 비쳤다. 한껏 들뜬 마음으로 문 오른쪽의 조명 스위치로 손을 갖다 대자 번쩍 하고 서재 안에 빛이 가득 찼다. 어. 난 아직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 파악이 되었다. 이 빛은 서재방 조명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다. 내 등 뒤, 다른 곳에 켜진 조명 빛이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김 선생님이 그렇게 깊게 잠든 게 아닌 모양이었다. 뒤에서 켜진 불빛을 가리는 내 거대한 그림자가 책상 위 내 가방 위를 덮고 있었다. 뭐라고 변명하지. 잠이 안 와서 책이라도 읽으려고 했다고 하는 게 제일 그럴듯하겠지. 1초 정도 되는 짧은 순간 동안 나름의 시나리오를 준비한 뒤 숨을 크게 내쉰 후 뒤로 돌았다. 그리고 내 목 밑으로 칼이 들어왔다.


주방 아일랜드 식탁 의자에 단단히 묶인 지 5분 정도가 흘렀을까. 안방에서 단발의 괴성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김 선생님도 내 옆에 나란히 사이좋게 입과 손발이 봉인된 채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세 명이었다. 모두 머리에 검은색 모자를 눌러쓰고 검은색 마스크를 끼고 있었는데, 유명한 경비 회사의 로고가 박힌 점퍼를 입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익숙한 듯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착착 방들을 뒤졌다. 목소리도 노출되고 싶지 않은 건지 자기들끼리 대화할 땐 작게 귓속말을 했고, 우리 둘 다 완전히 묶여있음에도 형광등 대신 식탁등 하나만 밝혀 모든 작업을 처리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집안 곳곳에 있던 값비싼 미술품들은 모두 현관 밖으로 빠져나갔고, 아주 쉽게 김 선생님에게 비밀번호도 받아내 안방 옷장 안에 있던 금고 안의 귀중품도 캐리어 안에 담겼다. 왜 사람들은 다들 옷장에 귀중품들을 숨기려고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시 입을 막혀 가쁜 숨을 내쉬는 김 선생님이 나를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러시지? 설마 나를 공범으로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비밀번호를 전달받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다는 듯 칼에 스쳐 피가 나고 있는 목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김 선생님은 더욱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아마 지금 강도들이 입에 물린 천조각과 마스크를 빼준다면 조금의 말 더듬도 없이 무서운 말을 내뱉으실 것이다.


감탄이 나올 만큼 조용하고 신속하고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하고 나간 후 몇 분이 지나자 차 한 대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리고 세 시간쯤 지났을까, 붉은빛이 점점 거실을 비춰오고 있는데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주차장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강도 삼인방이 빠져나갈 때보다 조금 더 시간이 걸린 후 경비원과 함께 집안으로 들이닥친 경찰들이 우리를 풀어주었다. 익명의 신고를 받고 왔다고 했다. 아마도 그 강도단일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은 아파트를 나서기 전 내 목에 반창고도 붙여주고 갔다. 역시 프로는 다르다.


함께 묶여 있던 세 시간 내내 내게 쏟아낼 말이 넘쳐흐르는 듯 이따금 나를 쏘아보던 김 선생님은 막상 경찰이 입을 자유롭게 해 주자 내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물을 부탁해 한참을 마시고, 경찰에게 얼른 이 집에서 나가고 싶다고, 서에 가서 진술을 마무리하자고 했다. 경찰차에선 최대한 나와 몸을 떨어뜨려 앉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아까 몸과 입이 강제로 봉인되어 있었을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았을 만큼 불편한 시간이 지나고 따뜻한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받아 손에 쥐고 딱딱한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김 선생님이 갑자기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진술'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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