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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COCO Jun 17. 2024

엄마성 성본변경 신청 - 가정법원 출석 후기

나도 울고 판사님도 울고

성본변경 신청은 3개월째 진행 중이다. 내가 진행하고 있다기보다는 법률 행정의 종잡을 수 없는 속도를 따라 흘러가고 있다. 어머니의 인감서류 등 법원이 요청한 자료를 추가로 접수한 후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가사비송 느단**** 서울 가정법원 출석일자 통지. 전자소송 사이트에서 확인 바랍니다”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도 법원 출석일정 나왔어.”

“언제인데?”


동생은 3주 전 의견청취를 위한 출석 요청을 받았다. 같은 날 신청서를 접수했지만 나에게는 별다른 통지가 없었는데 3주의 시간차를 두고 같은 날 출석하라는 명령이 도착한 것이다. 출석하지 않으면 벌금이 50만 원이라는 것도 놀라웠다.


무슨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일까? 조리 있게 잘 말할 수 있을까? 어버버버 이상한 소리 하는 거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신청서만 제출하면 인용이 되거나 안되거나 둘 중 하나 결판이 나겠거니 생각했는데 법원출석이라니. 느긋하게 벤치에서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경기에 투입이 결정된 만년 2군 선수가 이런 심정일까.


“몸 풀어. 다음에 너 들어가. “

네? 저요?




엄마성 빛내기 프로젝트

나와 여동생이 가정법원에 접수한 사건은 내 성씨를 ‘신’에서 ‘강’으로, 아빠의 성에서 엄마의 성본인 진주강씨로 변경할 수 있도록 법원의 허락을 구하는 ‘가사비송’ 사건이다. ‘엄마성 빛내기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변호사들과 세미나를 하고 신청서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내용을 숙지했다. 신분을 증명하는 증명서와 범죄이력, 신용정보 등 필요한 각종 서류들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3월 8일 여성의 날, 나는 온라인으로, 동생은 직접 가정법원에 출석해 신청서를 접수했다. 엄마성 바꾸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다른 수십 명의 여성들이 같은 날 전국 각지에서 관할 법원과 전자소송 사이트를 통해 성본변경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가정법원 면접 당일

동생과 같이 서울가정법원으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어쩐지 긴장되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다. 제출했던 신청서를 다시 읽어보고 아침에 추가로 받은 성본변경 판례를 살펴보았다. 혹시나 거절당하거나 이유가 충분치 않다는 의견을 듣게 되면 추가 근거로 제출할 판례들이었다.


30분 정도 여유를 두고 도착했다. 주차장 엘리베이터에서 두 여자를 마주쳤다. 흐느끼며 울고 있는 젊은 여자, 그런 그녀를 부축하는 나이 든 여자. 모녀일까. 무슨 사연일까. 이곳이 법원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다투는 곳. 특히나 가정 법원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간의 일이니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간단할 리 없겠지. 슬프고 화나고 아프고 힘든 감정들이 오가는 곳이구나. 좋은 일로 오는 곳은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 숙연해졌다.


201호 법정 문 앞 대기 의자에 앉아 신분증을 확인하고 순서를 기다린다. 변호사와 함께 온 사람들, 변호사들, 외국인, 혼자 온 여자, 그리고 나와 내 동생. 변호사를 동반한 쪽은 모두 유산이나 재산 관련된 문제인 것 같다. 심각한 사건들 사이에 우리 사건은 소송의 대상도 없고 그냥 내 성을 바꾸고 싶다는 정도이니 대단치 않다. 갑자기 좀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잘하고 가자 우리.


드디어 우리의 사건번호와 이름을 부른다. 드라마에서 보던 세트 같다. 앞쪽에는 한참 단이 높은 곳에 판사가 앉아 있다. 나랑 나이가 비슷한 것 같다. 법복을 입고 검은색 안경을 쓴 젊은 판사님이다. 다행이다.


우리는 조금 뚝딱거리면서 조금 멀찍이 떨어져 각자 마이크 앞 의자에 앉았다. 낯선 상황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판사가 우리 둘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성본변경 제도는 이혼 후 재혼 가정의 자녀들이 아버지와 성이 다른 것으로 인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40년이 넘도록 사용하던 성인의 성본을 바꾸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 판단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판사는 그 후 아버지에게 의견 청취를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와 여동생의 의견 청취를 요청한 것처럼 법원은 아버지의 의견도 청취했다. 과연 아버지가 어떤 의견을 전달했을지 짐작할 수 없었다.


동생의 성본변경 신청 사건의 내용이 먼저 아버지에게 전달되었다고 한다. 내용을 들은 아버지는 10년 넘게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이런 일로 연락이 온 것이 몹시 언짢다고 화를 내셨다고 했다.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하려는 것인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법원의 조정을 요청했다고 했다.


동생과 나는 서로를 마주 보며 황당한 표정으로 웃었다.  

판사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런데 언니분의 사건이 이후에 추가로 전달되었고 의견을 바꾸셨다고 하네요. 둘이 원하는 것이 그렇다면 바라는 데로 할 수 있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두 분이 행복하기시를 바란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의 무언가가 툭 하고 무너졌다. 주책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터져버린 눈물은 쉼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법정은 한참이나 고요했다. 그리고 판사가 말했다.


“울지 마세요. 저도 운단말이에요.”


누가 울지 말라고 토닥거리면 더 눈물이 나는 법이다. 그 후로 쭉 바보처럼 울다가 나왔다. 여성의 권익과 평등을 주장하는 쌘 언니다운 사건을 벌여놓고서는 판사 앞에서 눈물바람이라니. 이게 아닌데. 정말 나약하고 못났다.


“언니 괜찮아? 아이고…. 나도 살짝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언니가 갑자기 막 울어서 당황했잖아. 근데 판사님도 울고….. “


나는 우느라 보지 못했는데 판사님도 한참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냥 위로의 말이 아니라, 정말 나와 같이 울어준 판사님이었다.


법정을 나와서도 한참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는 나를 동생이 부축했다. 처음 주차장에서 봤던 두 여자의 모습이 재현되었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법정에서 울다니. 그것도 판사님이랑 같이.



1층 카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왜 울었어?”

“몰라 나도.”


사주에 언니랑 동생이 바뀐 형세라더니 이번에도 찔찔 짜고 못나게 구는 건 내쪽이구나. 미안하다 동생아.


동생과 아빠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빠가 얼마나 무책임한 사람인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인지, 우리에게 잔인하도록 무관심했는지. 마지막 기억 속 그가 얼마나 별로인 사람인지.


좋은 기억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짧지만 분명하게 빛나는 아빠와의 추억을 회상했다. 나는 실없는 농담으로 엄마를 결국 웃게만들던 아빠를 떠올렸다. 그리고 동생은 초등학교 일학년때만들기 숙제를 정말 잘 만들었다고 아빠에게 크게 칭찬받았던 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행복하길 바란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수고하지 않았던 그의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세계평화를 기원합니다, 같은 그런 말일뿐이다. 그런데도 그 한마디가 이렇게 나를 울리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실은 이 글을 쓰면서도 아주 많이 울었다. 도저히 글을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의미 있는 날이라 시간이 너무 지나기 전에 기록해두고 싶은데 매번 그 순간을 떠올리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스타벅스에 앉아서 울고 길을 걷다가도 운전을 하다가도 울었다. 지금은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다, 분위기상 여기서는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 이렇게 마무리하자.


안녕,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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