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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Oct 11. 2020

ADHD가 글을 쓰게 되기까지

장편은 포기했지만

성인 ADHD 진단을 받던 날. 나는 의사 말고도 상담사를 만났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 안 나지만 착했던 것 같다. 내게 글을 참 잘 쓴다고 해주었기 때문이다. 근거는 병원에 제출한 A4용지 3장 분량의 증상 기록이었다.


2016년 2월, 나라는 사건의 피해자이자 피의자로서 작성한 증언들은 이렇다.


- 나는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다. 뻔뻔하거나 낙천적이어서가 아니라 이틀 전 일도 잘 생각이 안 난다. 내 기억은 수조 안에 가라앉은 동전 같다. 나는 가끔 수조 밖에서 동전을 보기도 하지만 거기까지 손이 안 닿는다. 그러다 보면 수조 자체가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다. 나는 도미노처럼 살고 싶다. 그런데 흩어놓은 퍼즐처럼 산다. 나도 나를 못 맞춘다.


- 나의 특수성이 사람들의 자유를 해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야 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나는 도덕성도 배웠다. 내 삶이 통제가 안 되는 건 거기에 이미 모든 통제를 털어 넣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겐 특별히 잘하려고 한다. 때론 그게 너무 소모적이라 다 지겹다.


- 나는 생각이 무척 많다. 매일 매 순간 항상 늘 무슨 생각을 한다. (...) 주로 순간적인 단상들이다. 눈에 비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느라 오히려 앞이 흐려진다. 그래서 치일 뻔하고 부딪치고 어딘가에 박는다.


- 내가 우울증이라고 느낀 적은 없다. 우울증이라기엔 나쁜 기분의 지속이 짧다. 그 후엔 멍해지는데 멍한 와중에도 끊임없이 뭔가를 생각한다는 게 미칠 노릇이다. 차라리 깨끗하게 텅 비었으면 좋겠다.


- 늘 이해가 안 되는 건 호불호의 번복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어제는 동생이 방에만 들어와도 싫었는데, 오늘은 방을 통째로 줘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징징대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못 쓰겠다’며 절단나버리는 글이었다. 다시 보면 탁월한 설명이라기 보단 자기 연민을 덕지덕지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자기 연민은 때로 방사능보다 해롭기에 그닥 잘 썼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상담사는 진지한 감상을 들려주었다.


“반드시, 반드시 긴 글을 써 보세요.”


재능도 있고 장기 프로젝트가 치료에도 도움이 되리란 게 그의 생각이었다. 당시 이마 속이 등신 바이러스의 숙주라는 판정을 받은 내게는 그 말이 꼭 백신처럼 들렸다. 갑자기 엄청나게 작가가 되고 싶어 졌다. 그의 응원을 끝내주는 장편으로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내 병증은 문학적 소양과 관계된 것이 아니지만, 머릿속 산발적인 언어들을 정제하려면 집중력과의 공조가 절실했다. 하지만 전두엽은 협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를 쓰려할 때마다 개떼 같은 딴생각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나는 백지 앞에서 백치가 되어갔다. 빈칸 투성이인 재능은 재앙이라는 것만 뼈 아프게 배웠다. 전두엽도 맛이 간 와중에 비현실적인 현실을 받아들이자니 힘들었다.


나는 장편을 포기하고, 장편을 원하는 마음조차 포기해 버렸다. 원하지 않으면 가지려고 치열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무심한 듯 엣지 있는’ 태도를 마음껏 가장할 수 있었다.  비겁하다 못해 음침할 정도의 방어기제였지만 그때 나는 실제로 비겁하고 음침해서 그게 왜 나쁜지 몰랐다.


 “글 같은 건 관심 없어.”


이 말은


 “글 쓰고 싶어. 그런데 하나도 못하겠어.”


보다 오천 배는 쿨해 보였다.


심지어 후자의 경우 내뱉는 순간 상대로부터 “왜?”라는 질문이 수반되므로 더더욱 비참한 느낌이 있다.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난 의미 없는 깜지를 쓰기도 힘든 돌대가리라 아예 새로운 글은 창조할 수가 없어.”라고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어쨌든 “장편을 쓰라”는 말을 들은 후 완성한 건, 나를 죽도록 괴롭히던 전 회사 사장의 이야기뿐이다. 놈이 비곗 덩이 신체 때문에 안마의자에 껴서 뒈진다는 졸렬한 내용의 꽁트였다. 그 글은 완전히 쓰레기라는 면에선 회의적이지만 유일하게 A4 15장을 넘겼다는 면에선 희망적이었다.


나는 늘 궁금했다.


타자 살해 열망이 고작 A4 용지 15장의 동기부여를 준다면, 200장을 쓸 수 있는 동력은 어디서 얻어야만 할까? 왜 나는 오로지 집중력이 없다는 사실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일까. 내가 병아리라면 껍질을 깨고, 건물 안에 갇혔다면 창문을 깨겠지만 머릿속 개떼 문제로 해골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상에 책들이 수두룩 빽빽한 것을 보면 누군가들은 이미 집중력의 자급자족에 성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들은 집중력 행성의 1등 시민으로 선별된 듯했다. 그것은 멋지고 대단한 일이지만, 나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는 슬펐다.


나는 출판이란 업적을 이룬 사람들에게 항상 경외감을 느꼈다. 안다. 모든 책이 훌륭하지는 않다. 작가와 출판사가 대머리가 되어가는 아마존 밀림에 사과해야 하는 책들도 수두룩빽빽이다. 존경스러운 건? 어쨌든 원고 집필부터 출판까지 모든 과정에 집중하고 인내했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들은 집중하고 인내함으로써 자기 글을 시장에 내놓고 평가받을 기회라도 얻었지만 나는 실패에도 실패한 사람이었다.


ADHD가 된 후로 작가가 되자는 꿈 따위는 완전히 접어 버렸다. 머릿속 용량이 부족하니 꿈꿀 시공간도 부족했다. 꿈이란 추상적인 것이지만, 규모를 키워주려면 현실 속 공간감이 필요한 법이다. 당시 내 현실은 절망에 휩쓸려가 남은 것이 없었고, 눈에 봬는 게 없으니 시야는 매일 좁아졌다. 쓰는 글이라곤 업무 메신저나 카카오톡뿐이던 시절도 길었다.


@동료 이름 안녕하세요, ㅇㅇㅇ팀 정지음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작업 3번 파일로 진행 부탁드립니다. 문의사항이 생기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따위나 친구들 단톡에


- ㅇㅇ

- ㄴㄴ


를 쳐대는 게 문장 활동의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은 브런치도 하고 있으니 비약적 발전이라고 본다. 변한 것은 없다. 여전히 글을 못 쓰고 머릿속 개떼들은 잡생각을 낳는다. 뭘 쓰든 퀄리티에 비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다만 이제 시야가 좁아지다 못해 외눈박이가 되어서 아주 작은 변화도 아주 큰 발전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큰 실패에선 작은 비통함 밖에 못 느낀다. 실력을 올리는 대신 나 자신의 기준치를 재설정했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가려는 욕심들은 결국 나를 무수한 완벽에서 추방시켰다. 허접스러움을 묵인할 때 실행력이 생기고, 스타트가 있어야 진행 사항도 있다는 걸 브런치를 통해 배우고 있다. 그래서 앞서 발행한 6개의 브런치 글을 고치지 않는다. 그건 발행 자체에 의미를 둔 것들이고, 목표는 달성됐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글을 보는 사람에게 ADHD가 있거나, 다른 문제가 있어서 헤매는 중이라면, 본인의 능력이나 작업 과정보다 목표치를 바꿔보는 건 어떨까 싶다. 그냥 완벽해지는 것보단 모자라다는 면에서 완벽해지는 게 훨씬 쉽다. 모자람은 꽤 괜찮은 친구이다. 걔가 나를 거장으로 만들어주진 못해도 거장이 될 지 안 될지 모르는 아마추어로는 만들어 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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