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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Oct 31. 2020

금사빠&금사깨 ADHD의 미성숙 연애론

셀 필요 없이 죄다 실패한 러브 스토리

ADHD를 겪으며 단기간에 많은 양의 성숙을 챙기려 노력해왔다. 실제로도 치료기간과 약값에 정비례하게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난 성숙함의 완료보단 ‘성숙해지고 있다’는 미래지향적 환상에 집착 중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집착적 노력으로도 성숙해질 수 없던 분야가 바로 ‘사랑’이었다.


연애라고 해야 옳을까? 어쨌든 나는 한 남자와 오래 보지 못한다. 이건 성별보단 연인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내 방식에 대한 얘기다. 만약 동성애자였어도 가여운 동성 연인과 똑같은 문제들을 겪었겠지. 이성애자란 사실이 비극 같아도, 어떤 여성들을 내게서 구했다는 점에선 이타적 일지 모르겠다.


웃긴 건 연애에 이토록 회의적인 내 별명이 금사빠&금사깨라는 것이다. 나는 사람을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사람들이 꿀밤을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주 내 머리를 때린다. 억울한 면이 있다면 시시각각 새 연인을 필요로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나의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ADHD는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격언을 몸소 보여주는 질환이다. 자꾸만 뭔가를 잊고, 몸을 다치고, 길을 헤매고,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사고를 치는 일상이 티끌처럼 쌓인다. 하루 이틀이 일 년, 오 년, 평생이 되는 순간 태산만 한 타격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1,2,3등의 삶엔 동경을 표하지만 꼴등의 삶에는 동정조차 느끼지 못한다. 언제나 등수로 줄을 세우는 분야의 꼴등을 도맡던 나는 가끔 외롭고 오래 괴로웠다.


괴로움이 생겼을 때 해결법은 간단하다. 일부러 반대로 튀는 것이다. 완벽한 똑똑이가 되지 못한다면 완벽한 모지리에 만족하면 되는 거였다. 한데 그렇게 살려면 조력자가 필요했다. 나 대신 잊은 스케줄과 준비물을 챙기고, 다치기 전 잡아주고 다친 후엔 치료를 해 줄 사람.


애초에 공간 해독 능력이 떨어지는 내겐 지도 보는 법을 알려 주겠단 인간들이 거추장스러웠다. 그보다는 밝을 길눈을 뽐내며 나를 데리고 다니는 가이드 맨이 좋았다. 그의 동기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헌신을 받아도 불편하지 않으니, 이런 역할은 응당 연인이어야만 했다.


대단히 성가신 나를 흔쾌히 돌보는 게 최우선 과업이므로...... 나는 연인의 외모를 시시비비처럼 따지진 않았다. 언제나 내 행동을 주시하는 CCTV면 되었다. 남자가 비빈 짜장밥처럼 생겨서 키가 숟가락만 해도 나를 잘 챙길 것 같으면 괜찮았다. 그가 좋은 사람이냐면, 나도 모른다. 고심해서 판단한 적 없으니 어딘가 확 돌아있을 확률이 컸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을 찾아야 할 필요성에 맞닥트리는 것보단 인격 판단 자체를 유보해버리는 게 쉬웠다.


나는 내가 누굴 만나든 짧게 행복하다 오래 괴로운 후 시시하게 헤어질 거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나의 현재이지만 과거가 될 남자들이 진짜로 ‘누구’인진 궁금하지 않았다. 약간의 자포자기도 있다. 알려고 들면 알 수나 있나? 나는 나 자신을 몰라 29년을 헤맸는데 저 사람을 알려면 몇 년이 흘러야 하는지.


그래도 사귀기 전엔 영원을 꿈꿨다. “우리 둘이 사이좋게 오래오래”는 부자 되는 꿈, 하늘을 나는 꿈처럼 재미있고 기분 좋은 환상이었다. 나는 항상 남친 후보를 최대한 좋아하려고 노력했다. 타인에게 피상적인 관심뿐인 내가 열과 성을 다해 그를 알아가고 공감하고 칭찬하는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그의 인생 조수석에 올라타 버린 내가 있는데 이상한 건, 그때부터 후회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잘하는 짓일까? 나는 손톱을 물어뜯는다. 아니지, 그럴 리는 없지...... 나는 실수했다. 너무 빨리 짝꿍을 정한 죄로 너무 늦게 초조해졌다. 마음을 찡그리며 사랑을 연기하는 건 배덕감이 드는 일이었다. 커플 사진 속에서 실없이 미소 짓는 나를 보고 있노라면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탈력감이 들곤 했다.


그래도 이 시기의 혼란을 견디면 놀라운 진척이 생겼다. 내가 원하는 건 신발 선물이 아니라 풀린 신발끈을 묶어줌으로써 넘어지는 걸 방지해주는 사람이었다. 마트 계산대에서 카드를 꺼내는 사람이 아니라 장바구니에 빼먹은 목록이 뭔지 나 대신 체크하는 사람. 멋진 곳에 데려가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내가 꼭 가야 할 병원이나 회사에서는 데려다주어야 한다.


남자들은 이런 걸 어려워하지 않았고 스스로 뿌듯해하기도 했다. 게다가 나는 칭찬에 몹시 후했다. 내 남자 친구들은 하나 같이 인정 욕구에 목말라 있기 때문에 우리는 꽤 괜찮아 보였다. 이때가 내가 벌이는 연애의 황금기이다. 모든 실수가 개성으로 포용되고 각자 엉망진창인 우리가 서로를 만나 나아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 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길지 않다. 여전히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진상인 데다 근본적인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숙해지면 “이제 좀 알아서 할 때도 되지 않았어?”, “나만 매번 챙길 수는 없잖아.”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나 역시 할 말이 많다. “자기가 약속하지 않았으면 내가 했을 거야. 하지만 네가 한다며?” 이런 식이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 만난 건지 지리멸렬해지기 위해 만난 건지 헷갈릴 때쯤 나는 탈주 욕구를 느낀다.


못난 남자가 사소한 것에서조차 불성실해진다는 건 내게 큰 위기다. 헤어지자 말하면 늘 “고작 이런 일 갖고 왜 그러냐”는 대답이 돌아오지만, 나는 개별 에피소드에 화가 난 게 아니다. 그가 드디어 내 시중들기를 귀찮게 여기기 시작했음이 중대한 이별 사유가 된다. 티끌이 태산을 만드는 게 ADHD라면, 태산 같던 내 영향력이 티끌처럼 날리기 시작하는 게 사랑의 종말인 듯하다.


기분 나쁘지만 내 연애가 유아적이고 착취적이라는 피드백엔 동의한다. 남자가 있어서 편해지는 만큼 그 시기의 내 성장은 멈춘다. 어쩌면 술이나 마약보다 무서운 것이 일상적 안락함 일지도 모르겠다. 술이나 마약은 끊고 싶지만 안락함이라는 건 도무지 스스로 빠져나오고 싶은 상태가 아닌 것이다.


언젠가 “너는 진실한 사랑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친구는 애정의 등가교환이 서툴고 정서가 다소 불안정한 내가 그딴 걸 믿다 재기불능이 될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나는 진실한 사랑보단 진실한 보살핌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둘 다 믿지 않는다. 진실하다는 표현은 영속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불안하기 짝이 없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태를 견디느니 그냥 짝 없는 상태로 사는 게 나아서, 나는 요즘 모처럼 솔로이다. 진실한 사랑은 고양이에게 시도 중인데 인간이랑 하는 것보다 잘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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