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웃다 그치면서 쓴 무용담
ADHD 진단 직후, 나는 고분고분해진 것처럼 보였다. 착해지려 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는 것으로 ADHD 확진이 준 충격을 회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평소 성질머리와 다르게 “미안하다, 죄송하다, 모두 내 탓이다” 소리를 지껄이고 돌아온 날이면, 슬프다 못해 아주 가학적인 심정이 되었다.
당시 스스로의 재판관이었던 나의 판결은 이렇다.
나는 무가치하고, 무규칙 하며
무방비한 데다 무계획적이다.
무례하다는 점으로 보아 무식하고
무책임해서 무능력하다.
그 외 무절제, 무질서, 무기력 기타 등등. 일단 ‘무無’ 자가 붙으면 전부 내 얘기가 되었다.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망친 건 ADHD였다.
내가 정신병자라니? 머리통에 빵꾸가 났다니? 납득하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스스로가 ADHD와 내통한 배신자라 여겨질 때면 내 안의 판사는 사형선고를 내리고 싶어 했다. 그건 자살이어서, 충동이 심해지면 황급히 나 자신의 변호사 역할도 해야만 했다. 근데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불치병을 겪는다는 이유로 완벽한 죄인이 되어 있었다.
그 어떤 김장배추보다 많은 무를 품었으므로...... 내 인생은 본질 없이 오랫동안 맵고 짜기만 했다. 매일매일 눈물을 흘려보내면 지독한 맛들이 중화되려나, 실천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눈물도 염분이어서 담백한 사람이 되자는 장래희망을 좀처럼 이루지 못했다.
나는 이왕 울 거면 거기서 뭔가를 좀 얻고 싶었다. 그러나 집중력이 없고 충동적이고, 항상 멍하다는 건 눈물을 성장의 자양분으로 치환할 수 있는 능력 한 줌 못 가졌다는 뜻이었다. 나는 언제까지나 공연히, 공허하게, 공짜로 슬퍼해야만 했다.
울다 보면 슬픔에조차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화가 났다. 벽을 잡고 비틀대다 자빠져 한 바퀴를 데굴 구른다던지, 상대방에게 “자지 마”라고 전송한 메시지에 어쩐지 ‘마’ 자가 쏙 빠져있다던지 하는 일들이 늘 벌어졌다. 저린 다리를 펴다 실수로 술상을 냅다 걷어찬 후 얼기설기 치우다 보면, 눈물이 쏙 들어가고 폭소가 나왔다. 아무리 혼자라도 박장대소한 후 다시 우는 건 이상하니까 나는 자주 눈물을 그쳤다.
매일 울고 웃고 그치고...... 반복되던 새벽은 어느 날 내게 슬픔의 속성을 귀띔해 주었다. 깊은 슬픔은 있어도 영원히 지속되는 슬픔은 없다는 거였다. 집중력이 상당히 부족한 나는 필연적으로 남들만큼 슬플 수 없었다. 슬픈 채로 계속 살 수도, 슬퍼서 죽어버릴 수도 없었다. 축복인지 박복인지 결론을 내리기 힘들지만 그 때문에 오래 연명하고 있는 건 사실인 듯했다.
얼마 후 결국 우는 것에도 질려 버렸다. 홀로 운다는 건 홀로 인생을 배워보겠단 다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모든 종류의 배움에 뜻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게 외로움은 지루함과 같았고, 지루함은 언제나 조루함보다 나빴다.
눈물은 다 쓴 물조리개처럼 멈추었다. 당시엔 눈물 때문에 매일 습한 얼굴에 곰팡이가 필까 두려웠지만, 뺨은 곧 그 어떤 물기도 없이 건조해졌다. 나는 이제 안구건조증에 시달린다. 동태 눈깔을 빛낼 최소한의 수분감도 없다. 이런 상태가 행복인지, 행복에 대한 오인인지 궁금하나 답을 찾지 않기로 했다.
나는 무가치하고, 무규칙 하며 무방비한 데다 무계획적인가?
무례하다는 점으로 보아 무식하고 무책임해서 무능력한가?
그렇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묻는대도 부정할 말은 없다. 하지만 이젠 팩트의 궤적에 치이는 대신 재투성이 혼란을 다뤄보기로 했다. 그러니 나에 대한 설명들을 이렇게 고칠 수도 있겠다.
내가 참 무궁무진하고, 어떤 면에선 무고하다고.
무미건조한 일상은 무사함의 증명인 거라고, 단지 상상력 하나로 머릿속에 무성영화 상영관을 차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무수히 많은 날을 살며 그래도 무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무용함과 무용은 한 끗 차이라 삐걱대는 나날도 전부 춤이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