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는 것은 사실 미안한 마음도 진실
사람들은 지각하는 인간을 싫어하고, 공교롭게도 나는 거의 매번 지각을 한다. 5분, 10분, 40분, 2시간....... 범위도 이유도 다양하다. 준비가 늦을 때도 있지만 넉넉히 여유를 둬도 길을 헤매거나 대중교통을 잘못 타 결국 늦는다. 가장 일찍 나오더라도 가장 늦게 도착하는 일이 허다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냐면, 욕을 먹는다.
제목에 쓴 “지 결혼식에도 늦을 년”도 참다참다 분개한 부모님께 먹은 욕이다. 부모님만 날 욕하는 건 아닐테니, 나의 외출은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욕먹는다’로 수렴되는 설계 미스 알고리즘 같다. 어쩌면 나는 집순이가 아니라, 밖에서 정상인만큼 기능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하고 요새에 틀어박힌 것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내 지각은 ADHD 증상들의 복합적 결과물이지만 이런 변명은 한국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다. 지각 앞에서는 모두 한 마음 한 뜻의 결과 주의자가 된다. 내가 겪는 어려움을 아는 사람도 열이면 열 “다 떠나서 지각은 네 의지”라고 충고한다. 2시간 걸릴 것 같다면 3시간 전에 나오고, 3시간 걸릴 것 같으면 4시간 전에 나왔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런 게 가능하면 애초에 ADHD가 아니라는 역설 때문에 답답해진다.
더 역설적인 건 지각을 안 하는 것보다 지각하고 사과하는 게 훨씬 쉽다는 것이다. 죄짓고 꾀만 부리는 놈 같지만, 너무 지각하다 보니 화내는 사람들의 심리를 학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지각자보다 지각 후 뻔뻔하게 구는 자를 100배는 더 싫어했다. 이걸 머리로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경험으로 터득한 게 유감이지만 어쨌든 그러했다.
그래서 나는 지각이 발생하는 순간 연극적으로 비굴해진다. 이때 지각의 당위성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최악이다. 사람들은 ‘용서하는 위치’에서 결정권을 행사하며 일종의 보상을 받자는 것이지 내 변명에 용서를 강탈당하고 싶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라고 한 다음 “내가 그것까지 계산하지 못해서 정말 정말 죄송”이라고 덧붙이는 게 내 나름의 생존법칙이다. “10분 밖에 안 늦었는데?” 대신 “10분이면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투 승패가 바뀐 시간인데 길바닥에서 허투루 보내게 해서 미안하다”라고 하는 게 훨씬 낫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진짜 10분 만에 워털루에서 졌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 방금 지어냈으니 아마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런 점이 연극적 비굴함이라는 전략의 일면이다.
사실 나는 지각에 대한 도덕적 견해가 없다. 그래서 상대에게 미안함을 표시하는 만큼 실제로 미안한 건 아니다. 왜냐면 진실로 노력했음에도 주의 지각력, 방향 감각, 지도 해석 능력, 시간 설정 능력의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해 늦었기 때문이다. 내 이유들은 오로지 나에게만 너무 현실적이어서, 나는 사람들이 어째서 늦지 않을 수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30분 걸리는 루트를 정녕 30분 만에 찾아온다는 사실이 내게는 경이로울 정도의 비현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앞선 인사이트가 있다. 인간세상 갖가지 갈등이 대부분 ‘미안하단 한 마디면 될 걸 왜 그걸 안 하냐’는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내가 뻔뻔하게 굴면 지각 이상의 갈등이 발생한다. 그게 진심으로 싫어서 내 연극적 사과는 결국 진심이 된다. 나는 거짓말을 못하니 사과엔 어떤 식의 진심이든 퍼담아야 티가 안 난다.
ADHD를 겪으며 느끼는 건, 나를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다시 구하는 것도 언제나 ADHD라는 것이다. 정상인이라면 아무 일도 없이 그저 0이었을 일상을 나는 -1,000까지 곤두박질친 후 다시 +1,000을 회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한때는 그게 수치스러웠지만 이젠 그냥 성장할 기회가 많은 것이려니 한다. 어차피 돌고 돌아 360 도면 정상이 되겠거니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사람들을 너무 기다리게 하며 살았기 때문에 내가 완성되길 기다리며 지루해 할 자격이 없는 듯 하다. 시간 개념이 없는 대신 약간의 염치가 있다. 그래서 내일도 “내가 왜 늦었냐면” 대신 “내가 왜 늦었든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을 것 같다. 어쨌든, 종류가 무엇이든 진심을 가득 담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