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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지 Feb 07. 2021

나의 절친에게 바치는 글

"주말 등산 어때?"

"주말 등산 어때?"

"OO아, 이번 주말 등산 어때?"

"오호, 나야 좋지!"

"그래, 7시 거기서 보자"

"그때 보자고~"


십 년도 넘게 한 달에 두어 번. 이렇게 나는 OO이에게 톡을 보내고 OO이는 유쾌하게 답을 보내온다. 가끔씩은 일정이 안 맞아 못 볼 때도 많지만 대부분은 서너 번의 톡으로 등산 일정이 잡힌다.


OO이와 나는 꽤 오래된 절친이다. 20대 후반에 처음 만나서 지금까지 쭉 같은 도시에 살며 '기쁠 때나 슬플때나' 크고 작은 각자의 일상을 소소하게 나눈 지 벌써 17년째다. 그리고 등산은 이 친구와 내가 십 년 이상을 함께 해 온 취미다. 속이 상해도 "등산 갈까?", 즐거운 일이 있어도 "등산 어때?", 심심할 때도 "등산 콜?" 그렇게 우리는 수백 번 높은 산, 낮은 산, 험한 산, 그저 그런 앞산과 옆산, 그리고 건너편 산을 오르내렸다. 그때마다 이런저런 속상한 일, 좋은 일, 원망하는 일 등등 소소한 이야기들로 꼬불꼬불한 산책로를 채우고 또 채웠다.  


한 명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른 한 명은 "그래?", "좀 그렇다", "진짜?", "그래서, 네 감정은 어땠는데?"... 당시의 감정과 느낌을 다시 되짚어 주고 추임새도 넣는다. 가끔씩 솔직한 조언을 보태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듣는 것이다. 사실 나에게 OO이는 최고의 경청자다. 내 이야기를 이 친구보다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나는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그래서 나는 뭔가 고민거리가 생기면 이 친구의 조언이 누구보다 절실하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백 번의 등산에서 이 친구만큼 내 일상을 묵묵히 들어준 사람은 없었기에. 그렇다고 무조건 내 편이 되어 내가 잘했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냥 있는 그대로 느낀 대로 자기의 솔직한 의견을 말해준다.

"OO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OO아,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OO아, 내가 좀 성급한 것 같니?"


바로 어제도 사소한 고민거리로 나는 OO이의 번호를 눌렀다. 고민으로 시작해 최근에 읽고 있는 책에 대한 내용, 정치와 경제적인 이슈들까지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거의 2시간 정도 나누었다. 예전에는 개인적인 일상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면 요즘은 가족, 철학, 정치, 사회적 문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친구와의 토론에 빠져든다.


사실 이 친구와의 인연을 돌아볼 때마다 '같이 커왔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철없던 20대 후반에 만나 40대가 된 지금까지. 내 인생의 거의 절반을 함께 했다. 단순히 함께 했다기보다는 함께 '성장했다'는 말이 더 맞다. 사실 20대 초반이면 우리의 신체적인 성장은 거의 멈춘다고 보면 된다. 바로 노화의 시작이다. 반면, 정신적 성장은 어떨까. 나도 그랬고 많은 사람들이 신체적인 성장과 다른 의미의 성장을 가끔씩 혼동한다. 내 몸이 다 커서 성장을 멈춘다고 나의 다른 것까지 멈추지는 않는다. 20대가 되어 하나의 성인으로써 역할이 본격화되면서 우리는 정신적인 성장을 (사춘기와는 또 다른)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나의 또 다른 성장은 20대 후반에 시작되어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막 또 다른 성장의 기지개를 켜던 20대 후반에 나와 OO이는 처음 만났다.


그렇게 나는 OO이에게 영향을 주고, OO이는 나에게 영향을 주면서 우리는 40대를 함께 맞이했다. 나에게 이 친구는 조금은 고집스러운 원칙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변화를 싫어하는) 조금은 수동적인 자신의 태도를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있다. 내가 30대가 되어 수영을 시작하면서, 무척이나 폐쇄적이었던 삶에 대한 태도가 운동을 통해 많이 바뀌었다. 그런 나의 변화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OO이에게 그것은 좋은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몇 년 뒤 동네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한 OO이는 아마추어 선수로 지역대회에 참가할 정도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독서에 취미를 붙인 OO이의 작년 한 해 도서관 책 대여량은 무려 100권이 넘는다. 나름 다독가라 자부하던 나에게 큰 충격을 안긴 숫자였다. 내가 몇 번 아무거라도 좋으니 써보라고 할 때마다 글 쓰는 건 죽어도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하더니, 최근에 노트에 조금씩 끄적이기 시작했다고 어제 통화에서 수줍게 또 고백한다.(이 친구의 가능성은 과연 어디까지인 걸까.)  


우리가 20대 후반이었을 때 같은 회사 동료로 처음 만났다. 그때는 이 친구와 이렇게 긴 인연으로 이어질 것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왜냐하면 20대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까칠하고 폐쇄적인 사람이었다. 당연히 직장 동료 누구와도 편하게 지내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수수한 성격이었던 OO이와 나는 물과 기름처럼 처음엔 많이도 서먹서먹했다. 나에게 OO이는 '왜 저러지?' 하는 동료였고, OO이에게 나는 '다가가기 불편한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등산을 함께 하면서 서로에게 조금씩 그 불편함을 지우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몇 번, 등산 좋아하는 것 빼고는 거의 정반대의 기질과 태도를 가진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이유를 장난 삼아 찾아본 적이 있다. '서로 달라서, 등산을 좋아하니까, 같은 도시에 살아서, 내가 성격이 좋아서' 등등 몇 가지 그럴듯한 이유가 나왔지만 '바로 이거야'라고 하기엔 여전히 뭔가 부족했다. 어제 통화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나누었다.

"서로 다른걸 너무 잘 아니까, 다른 게 있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그래서 서운한 감정이 생겨도 '삐침'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렇지! 예전 내 결혼식 때 네가 뭔가를 안 해줘서 서운했던 기억이 나네. 근데 그러다 또 말았지."

"아마 너 웨딩촬영을 같이 못 가준 일 아니니? 난 사정상 어렵다고 한 걸 넌 서운했을 수도 있지."

"맞다, 웨딩촬영이었구나. 그런 다음 평상시처럼 나를 대하는 너를 보면서 네 성격을 한번 더 파악했던 것 같아."


그렇다. OO이는 조용하고 수줍음 많은 성격이(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고집과 단단한 원칙을 가진 친구다. 반면 나는 일이든 사람이든 조금은 무모하게 달려들고 좀더 외향적이다. 그러다 상처 받고 좌절하고 그만큼 고민거리도 많다. 그래서 나에게 OO이는 무척 중요한 관찰자다.(어쩌면 OO이에게 나도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OO이는 스스로도 '위험회피형'이라고 말하는 친구다. 그래서 완전 정반대는 아니지만 '위험감수형'에 가까운 나란 사람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 일단 호기심을 가지고 달려드는 편인 나의 태도가 OO이는 가끔은 부럽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 둘의 선명하게 다른 두 가지 기질은 조금씩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십 년 이상을 함께 했다. 문득, 며칠 전 읽은 책의 '상전이'이라는 개념이 머리를 스친다.


바로 빌 게이츠가 "가방에 넣어 다니며 읽은 책"으로 극찬한 사피 바칼의 <룬샷>이란 책이다. 책에서 '룬샷'은 말도 안되고 어처구니없는 아이디어나 프로젝트를 의미한다. 이런 아이디어가 어떻게 인류를 구하는 신무기, 신약, 성공적인 사업 등으로 변모했는지 물리학자이자 제약회사 CEO인 사피 바칼은 '상전이'(모든 것이 변하는 순간 : 즉, 액체가 얼기 시작하고 동시에 고체가 녹기 시작하는 0도의 상태로 고체와 액체 두 가지 상반된 상태가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그 접점에서는 변화가 끊임없이 이루어짐)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오랜 친구와의 좋은 관계가 '상전이'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서로 상반된 기질의 두 사람이 있다. 우연히 '등산'이라는 접점을 통해 꽤 오랜 시간 교류하게 된다. 동시에 서로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을 보완하며 영향을 준다. 그렇다고 상대를 '나처럼 되라'고 강요하거나 부담을 주는 사이는 아니다.(그랬으면 진작에 안 만나는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바로 이런 친구관계를 '상전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룬샷'에서는 기업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혁신을 만드는 '룬샷(팀)'과 일명 '프랜차이즈', 즉 일상적인 기업의 부서들과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하고 모든 구성원이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룬샷이 성공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두 그룹 사이의 균형과 소통을 관리하는 '정원사'의 역할이었다. 그럼 OO이와 나에게는 어떤 정원사가 있었던 것일까.


지금까지 OO이와 나의 관계를 통해 정리해 본, 나에게 '좋은 친구'란 바로 이런  아닐까.

1)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2) 부족하고 다른 부분은 (각자의 속도에 따라) 영향을 주고받으며,

3) 한 가지 접점을 통해 언제든 편하게 볼 수 있는 사람


마지막 항목에서 아마도 OO이와 나는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등산이라는 탁월한 '정원사' 아니 적절한 접점구조를 만난(든) 덕분이 아닐까.

우리에게 유익한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는 것은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바람직한 행위다. 우리는 그들 덕분에 좀 더 나은 사람이 될수 있고, 그들도 성장하는 우리를 보고 좋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건강하고 이상적인 인간관계란 이런 것이다. - 조던 피터슨 - <12가지 인생의 법칙, 혼돈의 해독>에서 발췌

#룬샷 #상전이 #사피바칼 #좋은인간관계 #여자들의우정 #조던피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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