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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레몬 1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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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Sep 25. 2023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4)

  "나는 삼 남매 중에 막내야. 위로 7살 차이 나는 형이 있고 5살 차이 나는 누나가 있어. 그래서 아주 이쁨 받으면서 자랐지. 집이 좀 잘 살았어. 지역 유지여서 땅도 많고 그래서 부족한 거 없이 살았지. 어딜 가도 사람들이 막내 도련님이라고 불러주면서 이뻐해 줬어. 어느 정도로 잘 살았냐면, 그때는 보통 집안에서 한 명도 대학을 보내기가 어려웠거든? 근데 우리 집은 나랑 형이 둘 다 대학을 갔어. 진짜 잘살았던 거지. 아버지가 늘 말씀하시길 당신 재산은 당신이 다 쓰고 갈 거니까 우리 셋 보고 공부 열심히 해서 알아서 자립하라고 하셨어. 대신에 잘 자립할 때까지는 뭐든지 다 도와주겠다고. 그래서 형부터 열심히 공부만 했어. 다른 애들이 부모님 밭일 도와드리고 그럴 시간에 공부만 하니까 당연히 공부를 잘했지. 그래서 서울로 대학을 갔어. 누나는 자기가 대학을 가기 싫다 그러더라고. 스무 살이 되면 바로 일할 거라고. 그래서 누나는 고등학교를 나오자마자 바로 공무원이 됐지. 서울로 올라가서 무슨 동사무소에 취직을 한 거야. 형도 서울에 있으니까 형이랑 같이 자취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나 혼자 남았잖아? 나도 공부 열심히 하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살아서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그렇게 잘 되지는 않더라고 그래도 어찌어찌 시험 쳐서 서울로 대학은 갔지. 이야, 그때만 해도 집이 아주 난리였어 난리. 자식 셋 낳았는데 셋다 서울 갔지. 그중에 둘은 대학을 서울로 갔지. 아주 부모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서 다니셨던 게 기억이나."

  할아버지는 잠시 말을 끊고 잔을 들었다. 나도 잔을 들어 양속으로 할아버지가 든 잔에 부딪혔다. 할아버지는 소주를 한입에 털어놓고는 육포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말을 이었다.

  "대학을 가서도 좋긴 했어. 나는 다른 친구들이 뭐 과외니 뭐니 하면서 열심히 돈 벌면서 할 때도 그런 거 안 했거든. 자취방도 그냥 부모님이 구해주고, 용돈도 따박따박 주시고 하니 뭐 아쉬운 게 없었지. 그래서 맨날 술이나 먹고, 기타나 치고 그러면서 다녔어. 성적은 그냥저냥 나올 정도만 공부를 했지. 그러다 보니 장학금 같은 건 받아보지도 못했고. 그렇게 어영부영 살다가 군대를 갔다 왔더니 이제 좀 있으면 졸업하고 취업을 해야 하는 거야. 근데 알런지 모르겠지만 그 시대는 대학을 나왔다 그러면 진짜 어디든지 아무 데나 취업이 가능했거든. 나는 건축과여서 건설사로 취직을 했어. 그때는 진짜 사방 천지가 아파트다 뭐다 짓는다고 난리였거든. 그래서 월급도 꽤나 높았고 말이야. 그래서 한 스물 일곱 때 딱 회사를 들어간 거야. 근데 이게 참 당신도 해봐서 알겠지만 회사생활이라는 게 쉽지가 않아. 그때는 더 그랬어. 맨날 야근하니까 9시 전에 퇴근은 해보지도 못하고 토요일에도 나가야 하고, 회식이라도 할라치면 부장님들 옆에서 비위 맞추면서 밤 12시, 1시, 2시 막 새벽까지 술 먹고도 다음날 재깍 출근해야 하고. 아주 사람 사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때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지 뭐. 그렇게 꾸역꾸역 한 삼 년 버티니까 이제 도저히 못하겠는 거야. 사람 사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도 명절마다 부모님이 아주 대견해하시면서 잘한고 있다고 칭찬해 주시는 걸로 버텼는데,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겠더라고. 그래서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하다가 누나한테 전화를 했지. 누나한테 회사 못 다니겠다고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막 눈물이 줄줄 나와 아주. 그렇게 엉엉 울면서 전화했더니 누나가 뭐라는 줄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요?"

  "나보고 '니가 우는 소리를 하는 걸 보니 결혼할 때가 됐네'라고 하는 거야. 진짜 우리 누나지만 그때는 아주 때려주고 싶더라고."

  "누님은 결혼을 하셨구요?"

  "어어, 누나는 진즉에 결혼했지. 같은 동사무소에 다니는 사람하고. 그 형님이 사람이 참 좋아서 좋더라고. 부모님도 아주 좋아하셨고. 약간 곰처럼 듬직하면서도 순한 그런 느낌이 있어."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했다.

  "암튼, 그러더니 누나가 당장 일요일에 정장을 입고 누나네로 오라는 거야. 그래서 왜 그러냐니까 잔말 말고 오래. 그래서 뭐 별 수 있나, 그냥 그렇게 정장을 차려입고 누나네로 갔어. 그랬더니 집에 들어오라고 하기는커녕 당장 나를 끌고 가더라고. 딱 가보니까 다방인 거야. 그렇게 다방을 따라 들어갔더니 웬 아가씨하나가 누나보고 '주사님!' 하면서 부르더라고. 그러더니 누나가 나를 글로 델구가서 그 아가씨 맞은편에 앉히고 누나는 그 아가씨 옆에 앉더라고. 그러면서 자기네 동사무소에 일하는 아가씨라면서 갑자기 소개를 해주는 거야. 그래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가만히 있으니까, 누나가 혼자 막 떠들어. 이 아가씨가 일을 참 잘한다느니, 동생이 좀 낯을 가린다느니, 둘이 참 잘 어울린다느니 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한 30분을 혼자 떠들더니 자기는 들어가 봐야겠다면서 일어나는 거야. 그러더니 내 손에 돈을 쥐어주면서 귓속말로 '저녁까지는 같이 먹고 들어가.'라고 하고 가더라고. 그래서 뭐 어째. 그렇게 앉아서 이것저것 물어봤지. 나이는 몇 살이냐 사는 데는 어디냐 부모님은 뭐 하시냐. 그러다 보니까 시간 돼서 저녁 먹고 집까지 바래다줬지 뭐. 그랬더니 밤에 누나한테 전화가 온 거야. 어땠냐 다음에 볼 거냐 전화번호는 받았냐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더라고. 그래서 그냥 말했지. 예쁜 건 모르겠고 아가씨가 참 순하고 참해 보인다. 전화번호를 받기는 했다 그러면서. 그랬더니 누나가 '그럼 됐다.' 하고선 전화를 끊더라고."

  "그래서요? 그 아가씨한테는 연락하셨어요?"

  "그래 뭐 다시 전화했지. 만나서 밥이나 먹자 하면서. 그때는 뭐 별게 없었어. 그냥 밥 먹고 차 마시고 그런 거 말고는 할 게 없지 뭐. 그래서 몇 번 만났는데, 부모님한테 전화가 온 거야. 그러더니 대뜸 언제 데리고 올 거냐고 물어보시는 거야. 아마 누나가 뭐라 말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모르겠다 하고 끊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 아가씨랑 내가 지금 연애를 하는 게 맞나 하는. 그래서 그다음에 만났을 때 물어봤지. 우리 연애하는 거냐고. 그랬더니 그 아가씨가 어떻게 그런 걸 물어보냐고 화를 내는 거야. 그래서 나는 '이야 이거 영락없이 차였구나' 싶어서 집까지 바래다주고 말았어. 그렇게 한 삼일 있으니까 또 누나한테 전화가 와서 너 미친놈이냐 뭐 하는 거냐 이러면서 아주 그냥 온갖 욕을 퍼붓는 거야. 그래서 왜 그러냐 했더니, 알고 보니까 그 아가씨는 당연히 나랑 연애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걸 물어보니까 내가 자길 갖고 놀았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울면서 누나한테 말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말했지, 아니 나는 갖고 논 게 아니라 부모님이 소개해달라 하는데 연애를 하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어서 물어봤다. 나야말로 차인 줄 알았다고. 그랬더니 누나가 그제야 진정하고선 알았다 하고 끊는 거야."



  할아버지는 다시 본인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고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잔을 왜 들고만 있어? 먹을람 먹고 말람 말지."

  "아 얘기를 듣다 보니까 저도 모르게 잔을 들고 가만히 있었네요."

  할아버지는 다시 나와 건배를 하고 술을 쭉 들이켰다. 

  "자, 그래서.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그새 까먹었네."

  "누나가 알았다 하고 끊으셨다고 하셨어요."

  "아, 그래. 그러더니 다음날 그 아가씨한테 전화가 왔어. 자기가 오해를 한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그래서 사과하고 싶다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사과는 필요 없고 미안하면 이번 설에 같이 우리 부모님 보러 가자고."

  할아버지의 얘기에 많이 당황하여 물어보았다.

  "그렇게 바로요? 아니 뭐 연애를 더 하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몇 번 안 만난 사람한테 바로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고 한 거예요?"

  할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치?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얘기지. 아니 뭐 서로 얼마나 봤다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 그리고 그때는 인사를 드리면 그냥 무조건 결혼해야 하는 그런 시대인데. 근데 웃기게도 그때는 그랬어. 그리고 그 아가씨도 알겠다고 했고."

  "그럼 그 분하고 결혼하신 거예요?"

  "그치. 그대로 그 아가씨가 내 마누라가 됐지. 그냥 뭐 일사천리로 그렇게 됐어."

  "그래도 괜찮으셨어요?"

  "아, 그럼. 막 요새 사람들 보면 이것저것 막 재고 그러는데, 어차피 사람은 살아봐야 알아. 나도 그렇게 성급하게 결혼했지만 막상 살아보니까 둘이 아주 잘 맞더라고. 어쨌든 식 올리고 나 살던 자취방에서 살림만 합쳐가지고 그렇게 시작했지 뭐. 당연히 결혼도 했겠다 돈 벌어야 하니까 회사는 계속 다녔고. 그래서 누나가 결혼할 때가 됐다고 했던가봐."

  혼자 소주를 반 잔 꺾어 마시고는 육포를 하나 집어 들면서 물어보았다.

  "그럼, 사모님은 오늘 어디 가신 거예요?"

  "아, 이 사람 성급하네. 얘기를 그냥 들어봐."

  할아버지는 다시 소주를 따라 마시고는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러고 나서 그다음 해에 바로 딸이 생겼어. 그래서 마누라는 일 그만두고 집에서 애를 봤지. 그런데 이게 참 애가 태어나니까 집이 좁더라고. 그래서 아버지한테 전화를 했어. 손주도 태어나고 해서 이사해야 하는데 미안하지만 돈 좀 보태달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돈이 없다는 거야. 그때 알았지 나도 우리 집 돈이 없어진걸."

  "잘 사셨다지 않았어요?"

  "아 나 어릴 때야 그랬지.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린가 해서 물어봤는데 아버지도 뭐라 자세히 말씀을 안 해주시는 거야. 그냥 요새는 돈이 없어서 어렵다고만 하시고. 그래서 조금만 보태주실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뭐 나야 한 푼이라도 아쉬우니까 알겠다고 했는데 이게 참 이상한 거지. 우리 아버지가 돈이 없다고 이렇게 아쉬운 소릴 하는 분이 아니니까.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서 누나한테 물어봤지. 그랬더니 누나가 다 얘기를 해주더라고. 누나는 결혼해서 애도 있고 잘 살고 있는데, 형이 그러질 못했거든. 대학은 나왔는데 회사를 들어갔다가 그걸 적응을 못해서 금방 나와버렸어. 그리고 딴 회사를 들어갔는데 거기서도 적응을 못하고. 그래서 자기는 직장생활이 안 맞는다 생각한 모양이야. 그래서 뭐 사업을 이것저것 벌인 모양이더라고. 근데 회사를 얼마 다니지도 않은 사람이 뭐 돈이 어디 있어서 사업을 했겠어. 다 아버지한테 손 벌린 거지. 아버지도 그래 니가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해봐라 하면서 땅 조금 팔아서 돈을 보태주신 모양이더라고. 근데 이게 회사 밖은 지옥이라고도 하잖아? 아니나 달라 형이 그냥 아주 쫄딱 망한 거야. 빚도 지고. 그래서 아버지가 그 빚도 갚아주셨는데, 이 형이 또 정신 못 차리고 사업을 하겠다고 달려든 모양이야. 그렇게 무려 네 번을 사업을 말아먹은 거지. 그래서 집에 돈이 하나도 없는 거였더라고."

  "형님이 그러신 걸 모르셨었어요??"

  "나야 뭐 형이랑 그렇게 친하진 않았으니까. 안부전화도 안 하고 그냥 명절 때 가끔 보는 정도였으니. 그냥 사업을 하고 있다. 잘은 안되지만 열심히 하고 있다. 그렇게만 말을 하니까 그런 줄 알았지 뭐."

  "그래서요?"

  "그래서 뭐 있나. 아버지가 그래도 나 보태주신다고 따로 빼놓은 돈이 있으셨어서 그거 받아다가 이사를 했지. 그러고 나니까 이제 막 정신이 번쩍 드는 거야. 뭐 그전에도 열심히 살긴 했는데, 이젠 집에 손도 못 벌리지, 애는 생겼지 그러니까 이제 내가 진짜 열심히 벌어야겠더라고. 그래서 진짜 열심히 살았지. 승진하려고 명절에 부장님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인사드리고 선물드리고, 못 마시는 술도 맨날 새벽까지 같이 마셔드리고 그렇게 살았어. 힘들긴 드릅게 힘든데 그래도 그렇게 하니까 승진이 재깍재깍 되긴 하더라고. 다행히도. 그나마 딸애 커가는 거 보는 낙으로다가 버텼지 뭐."

  어느덧 소주병의 2/3가 사라졌고 할아버지의 얼굴이 약간 빨갛게 변했다. 그리고는 나를 보고 얘기하기보다는 그냥 허공에 대고 넋두리를 하는 듯 말을 했다.

  "그렇게 다니다가 보니까 97년에 IMF가 터졌어. 당신도 아나? IMF"

  "당연히 알죠. 저희 아버지도 그때 실직하셨는걸요."

  "그래. 나도 그때 딱 회사가 망했어. 엄청 큰 회사였는데도, 그냥 한순간에 훅 가더라고. 이야~. 그래서 짐 싸서 나왔는데 진짜 막막한 거야. 어디 돈 나올 구석은 없는데, 애가 그때 열두 살이었거든. 돈 들어갈 일 천진데 진짜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그래서 뭐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더라고. 일단 차를 팔고 저금해 둔 돈을 보태가지고 트럭을 하나 샀어. 평생 장사랑은 연도 없었는데 일단은 뭐라도 떼다 팔아야겠더라고. 다른데 뭐 어디 재취업을 할라 해도 안되니까 말이야. 그래서 일단은 양말을 떼다 팔았는데, 이게 돈이 너무 안 되는 거야. 트럭에 싣고 막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파는데, 내가 뭐 영업을 해본 것도 아니라서 말주변도 없고 그래가지고 잘 못 팔았어. 하도 남는 게 없으니까 나중에는 집에서 마누라보고 재봉틀로 만들어보라고 했지. 그렇게 원가가 줄어들면 좀 남을까 싶어서. 그래도 거 참 안 팔리더라고. 그래서 그렇게 반년을 했더니 돈이 다 떨어졌어. 그래가지고 안 되겠다 싶은 거야. 그래서 양말대신에 과일을 팔았지. 이게 양말은 있는 거 꿰매서 신고, 안 신고 그러면 되지만 사람이 입으로 들어가는 거는 안 먹을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이게 팔리겠지 싶어서 팔기 시작했는데, 이야 이게 또 안돼. 이게 먹는 장사다보니까 안 팔리면 그걸 그대로 버려야 하더라고. 심지어 과일이니까 물러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사지도 않아. 그러니까 어떡해, 그냥 그대로 또 돈만 날렸지."

  그 당시 일이 생생한 듯, 할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보였다.



  "이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그냥 트럭도 팔고 제대로 장사를 해야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집도 팔고 작은데 전세로 옮겼어. 그리고는 그 돈을 들고 뭘 할까 고민을 했지. 가게를 해야겠다고 하니까 딸애가 막 신이 나서는 슈퍼를 해라, 고깃집을 해라 막 그러는 거야. 지가 먹고 싶어서. 근데 막상 슈퍼든 고깃집이든 하려니까 겁이 막 나는 거야 이미 다 말아먹었으니까. 이게 막 형 생각도 나고 그러더라고. 우리 집안이 사업이나 장사에는 소질이 없구나 싶고. 그러다가 딱 생각이 난 게, 술장사를 해야겠다 싶더라고. 맥주랑 소주야 뭐 재고가 남아도 계속 보관도 되겠다 싶어 가지고. 그래서 겨우겨우 호프집을 하나 열었네. 근데 뭐 어디 사람을 쓸 돈이 있나. 그래서 애엄마도 맨날 나와서 주방에 서빙하고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그러면서 둘이서 아등바등거리면서 겨우겨우 유지를 했지. 그랬더니 그래도 사람이 먹고살만큼은 겨우 벌이가 되더라고. 그래서 그나마 좀 다행이다 싶었지. 근데 이게 또 그사이에 애는 쑥쑥 자라잖아? 애가 중학교도 가고, 고등학교도 가고 그러니까 돈이 너무 많이 드는 거야 돈이. 그러다 보니까 학원이라도 좀 제대로 보내고 싶은데 돈이 없잖아. 그래서 그냥 맨날 학교에 남아서 야자나 하라고 시켰지 뭐. 그래도 애가 철이 너무 일찍 들어서 그런가 군말 없이 맨날 야자하고 그러고 오더라고. 그러더니 웬걸 나중에 대학을 덜컥 붙어서 오는 거야 애가."

  "대학을요?"

  "어어, 그것도 나나 형이 나온 데보다 훨씬 좋은 데를 딱 붙었더라고. 이야 그러고 나니까 이게 사람이 막 눈물이 줄줄 나는 거야. 애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또 애가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으니까 돈걱정도 한시름 덜기도 했고. 그러니까 이게 막 사람 사는 기쁨인가 싶고 그러더라고. 그렇게 내내 힘들게 살았던 게 딱 보상받는 그런 느낌 있잖아. 그래서 애는 이제 대학 들어가고 나는 계속 가게를 하고 그렇게 살았지 뭐."

  여기까지는 그냥 우리네 부모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생 얘기인 듯했다. 이 뒤에 얘기를 마저 들어야 이 먼 속초까지 와서 가게를 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할아버지도 나도 이제는 술잔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그저 계속 말할 뿐이었고, 나도 물만 계속 들이켜면서 얘기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 애가 딱 이제 방학이 돼가지고 그러는 거야. 같이 어디 놀러 좀 가자고. 그래서 어디를 갈까 하다가 마누라가 바다를 가자 하대. 자기는 바다를 한 번도 못 봤었다고 하면서. 그러고 보니까 나도 바다를 본 적이 없는 거야."

  "신혼여행 때 안 가보셨어요?"

  "이 사람아, 그때 신혼여행 그런 게 어딨어. 그냥 식 올리고 양가 인사드리고 오면 끝이지 뭐. 지금처럼 결혼했다고 회사에서 휴가 주고 그런 게 없었어."

  괜히 머쓱해져서 물을 들이켰다.

  "그래서 어차피 일요일에는 장사가 잘 안 되니까, 일요일에 문을 닫고 바다를 갔다 오자 했지. 근데 이왕 가족여행이니까 차를 한대 빌려서 가잔 얘기가 나온 거야. 그래서 나는 싫다 그랬지. 운전해야 해서 피곤하기도 하고 그냥 기차를 타는 게 싸니까. 그랬더니 딸애가 자기가 과외해서 번 돈이 조금 있으니까 그걸로 차를 빌리자는 거야. 굳이. 그래가지고 그럼 나는 운전만 하기로 하고 차를 빌렸어. 그래서 딱 여기 속초에 와서 바다를 봤지. 나도 마누라도 바다를 처음 봤잖아? 그래가지고 와 이게 엄청 신기하더라고. 마누라는 아주 좋아라 방방 뛰고. 딸애랑 둘이 팔짱을 끼고 아주 그냥 신이 나서 바닷가를 계속 걸어 다니더라고. 나는 운전하고 났더니 피곤해가지고 가게에 들어가서 커피 하나 마시면서 앉아있었고. 그렇게 하루 죙일 바다에 있다가 어두컴컴해진 거야. 그래서 하루 자고 갈까 그냥 갈까 하다가 장사를 쉴 순 없어서 늦게라도 집에 가자 하고 출발을 했지. 근데 가다 보면 알겠지만 여기가 서울이 아니라서 가로등이 별로 없어 고속도로 탈 때까지는. 그러다 보니까 뭐가 보여야 말이지. 그래서 아주 그냥 조심조심 운전을 했어. 근데 이게 차가 빌린 차다 보니까 정비가 제대로 안된 모양이야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길 중간에서 차가 시동이 팍 꺼지는 거야. 그러더니 시동이 다시 안 걸리고 헤드라이트도 꺼지고 막 그래. 배터리 쪽이 뭔가 제대로 고장이 난 것 같더라고. 그래서 어떡해야 하나 싶어서 렌터카 업체에 전화를 했더니 보험접수를 해서 보험차를 보내주겠대. 그래서 참 다행이다 싶었지. 그래서 차 안에 앉아가지고 셋이서 얘기나 좀 하면서 보험차를 기다렸는데, 이게 참 사람 인생이 그렇더라고. 내 맘대로 잘 안돼. 이게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길인 데다가 길이 좀 좁았어. 거기에 배터리가 망가져서 라이트도 못 켜잖아? 그러다 보니까 코너를 꺾어온 트럭눈에는 우리 차가 안보인 거야.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딱 우리 차가 보였을 때는 이미 늦은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그대로 뒤에서 우리 차를 박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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