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그날 저녁, 명석은 상진에게 연락해서 지분을 넘기겠다고 했다. 대출뿐만 아니라 이혼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서도 돈이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상진은 명석의 지분을 다해서 15억에 사겠다고 했다. 명석은 너무 싸다며 20억을 불렀지만, 상진은 너무 단호했고 당장에라도 돈이 급했던 명석은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지분 양도를 위해 명석이 사무실로 방문했으나 정작 상진이 나오지 않았고, 대리인이 나왔다. 심지어는 명석을 사무실 안으로 들이지 않고, 회사 앞 작은 카페에서 서류를 작성했다. 서류 작성이 완료되고 대리인이 상진에게 전화를 걸자 잠시 후, 명석의 계좌로 정확하게 약속한돈이 들어왔고 명석은 그 돈을 써서 대출을 일부 상환했다. 이로써 명석은 회사를 잃었지만, 그나마 집과 차를 보전할 수 있게 되었기에, 본격적으로 이혼에 대처할 차례였다.
명석은 이혼 소송을 대비해 집으로 가지 않고 바로 변호사를 찾아 변호사 사무실로 향했다. 변호사와 상담을 해보니, 명석의 자산이 크게 불어난 것은 결혼 이후기 때문에 법원은 연정이 어느 정도 재산 형성에 기여를 했다고 인정해서 30%가량은 분할해 주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또한 명석이 양육권을 가져오기는 많이 힘들 것이라고 했다. 이를 들은 명석은 다른 건 몰라도 양육권을 갖고 오고 싶으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장기간의 소송도 불사할 것이라 했지만, 변호사는 만에 하나라도 연정이 명석의 폭언이나 욕설 등 가정폭력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100%로 지게 될 것이며 쓸데없이 시간과 돈만 낭비하게 될 것이라 설명했다.
변호사의 얘기를 들은 명석은 짚이는 게 너무 많았고, 연정이 남겼던 문자메시지로 미루어, 하루이틀 준비한 게 아닌 것으로 짐작했기에, 아마도 증거가 있기는 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에는 변호사의 의견에 따라 조정을 신청하는 게 제일 나아 보였다.
또한 변호사는 명석이 어떻게든 양육권을 갖고 오고 싶다면, 적어도 그에 준하는 대가를 건네주고 가져와야 한다 했다. 그렇게 하더라도 명석이 주 양육권자로써 적합한지를 따지고 들면 승산이 많이 낮아질 수 있다고도. 하지만 그나마 그 방법이 소송으로 가는 것보다는 조금 더 확률이 높은 방법이라고 했다.
변호사의 얘기를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결국 조정과정에서 자존심을 굽히고 연정에게 양육권을 넘겨달라고 사정해야 하는 것이었기에, 명석입장에서는 꽤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것이었다. 심지어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기는 돈을 더 넘겨줘야 한다는 것도 꽤나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회사도 잃은 마당이기에 재산을 더 많이 떼어 주는 건 명석에게 있어서 꽤나 치명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명석에게는 그나마 아들인 연우를 데려오는 게 최소한의 타협점이었기에 조정을 신청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내용과 협의 사항은 변호사가 연정 측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하고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아무리 빨라도 몇 개월은 걸릴 것이라 했기에, 일단 명석입장에서는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집에 돌아온 명석은 소파에 누워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명석이 생각해 보니 1호에게 보험금 지급 신청을 한지 어느덧 열흘이 지나 있었다. 처음에는 정환이 투자를 하는 형태로 보험금이 지급된 것이라 생각했었으나, 만약 그게 진짜 보험금이었다면, 명석은 그 보험금을 그대로 날린 셈이었기에 왠지 보험금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투자금이 보험금이 아니라면 상진에게 지분을 넘기고 받은 돈이 보험금일 확률도 있었다. 또는 지급까지 늦으면 2주 정도 걸린다고 했으니, 아직 지급이 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명석이 1호를 만나지 않았다면, 보험금을 최대한 뜯어내기 위해 그런 일들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명석도 여전히 회사에 지분을 가진채 떵떵거리고 살고 있을 터였다. 그런 경우에도 연정이 이혼을 요구해 올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과는 달리 그 상황에서의 이혼소송쯤은 별거 아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지금의 명석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집과 차뿐이었다.
'그년에게 말렸어. 씨발.'
일단 명석은 앞으로의 일을 걱정했다. 운이 나쁘면 양육권을 가져오는 대신에 재산의 절반을 떼어줘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명석에게 남는 돈이라고는 집과 차를 처분한 금액의 절반인 7~8억 정도뿐이었다.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전까지의 삶을 영위하기에는 모자란 액수였다. 그 돈으로는 기껏해야 수도권의 적당한 아파트를 살 수밖에 없을 것이었고, 무엇보다 회사에 대한 지분을 잃고 쫓겨난 지금, 새로운 일을 구하는 것도 문제였다.
나름 이름이 있는 중견기업의 대표였기에 다른 곳에 가서도 한자리 꿰찰 수도 있었지만, 워낙 소문이 빠른 업계인지라 이미 명석의 퇴출에 대한 얘기를 들은 기업들이 많을 것이었고, 그런 그들이 명석을 써줄지도 의문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명석은 당연히 본인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그런 것들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으나, 자존심이 계속해서 박살 난 지금은 본인의 능력에 대해 스스로도 의심하는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새로이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아 보였다. 거기에 더해 명석이 생각하기에 본인보다 못나고 모자란 인간들에게 고개를 숙여가며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라이 씨발, 어떻게든 되겠지. 최소한 한두 달은 놀아야겠어.'
결국 명석은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이번 기회에 푹 쉬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다.
소파에서 한숨 자고 해가 진 한참뒤에 일어난 명석은 자포자기하는 기분 반, 홀가분한 기분 반으로 차를 몰고 단골이었던 바로 향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주에 한 번은 들르던 곳이었는데, 최근에는 여러 일들로 바빠서 도통 방문하지 못했었다.
명석이 바에 들어서자 바텐더가 바로 명석을 알아보고는 인사를 했다. 보통은 누군가를 대동해서 방문을 했었기에, 혼자 온 명석을 보고는 바텐더가 무언가 말을 걸려 했지만, 딱히 명석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기에 간단하게 안부정도만 물었다.
명석은 바 자리에 앉아서 키핑 해놓았던 위스키를 꺼내달라고 했다. 평소와 달리 간단한 안주조차 시키지 않고 연신 술만 들이켜는 명석을 보며 바텐더가 서비스라고 몇 가지 간단한 안주를 내주었다. 하지만 명석은 그런 서비스를 고맙게 여기기보다는 이제 자기가 이런 동정을 받아야 할 정도로 추락했다고만 느꼈다. 그래서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계속해서 술만 들이켰다.
불과 1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위스키를 한 병 가까이 비운 명석은 그대로 바를 나섰다. 바텐더가 명석을 붙잡고 택시나 대리기사를 불러주겠다고 했지만, 명석은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다며 거칠게 뿌리치고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대리기사를 호출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으나, 이미 많이 취하기도 했거니와, 평소에 다른 사람들이 불러주기만 하고 직접 불러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대리기사를 부르는 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상담원에게 귀머거리도 당신보다는 낫겠다는 폭언을 퍼붓고는 스스로 차에 올라타 운전대를 잡았다.
명석은 밖에 서있을 때는 똑바로 서있기조차 어려웠으나, 앉아서 운전대를 잡으니 그래도 생각보다는 정신이 멀쩡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은 조심스레 시동을 걸고 천천히 주차장을 나섰다. 술을 먹은 상태인지라 천천히 조심스럽게 운전을 해 큰길로 향했다.
좁은 도로를 벗어나 큰길로 향한 명석은 점점 더 속력을 냈다. 늦은 밤이라 차들도 별로 없기도 했고, 술기운 덕분에 속도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심지어 술을 먹지 않았을 때보다 운전이 더 잘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또한 차의 주행보조기능 덕분인지 차가 비틀거리지도 않고 똑바로 나아갔기에 꽤 안정적으로 느껴졌고, 그래서 더더욱 안심하고 속력을 올렸다.
그렇게 몇 분 간 운전하던 명석은 쏟아지는 졸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10초 뒤, 명석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차에 전해진 충격으로 눈을 떴고, 명석이 눈을 뜬 직후, 교차로를 가로지르던 트럭과 부딪히며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