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명석은 정환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겨우 투자금을 유치해서 어음을 처리했다. 정환은 서류 작업이 다 끝난 후에야 입금을 할 예정이었지만, 이상하게 빨리 진행을 하고 싶어 하는 명석의 재촉 때문에 서류에 서명을 함과 동시에 바로 투자금을 입금했다. 아마 며칠만 더 늦었다면 회사는 부도 처리가 되었을 것이고, 명석은 최소한 배임 혐의로 고발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결국 정환의 투자금 덕분에 회사는 부도위기에서 벗어나 명석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부도 위기를 벗어난 명석에게는 집과 차를 담보로 한 대출과 이혼이 남아있었다. 명석은 우선 담보를 청산하는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명석이 생각하기에 어차피 연정은 집에서 살림만 해왔던 터라 스스로 자립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고, 결국에는 본인에게 숙이고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집과 차를 담보로 받은 대출은 모조리 회사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기에 당장 투자금을 회수해서 빚을 갚기는 여의치 않았다. 적어도 투자금을 꺼내오거나 배당금 등을 통해 대출을 갚기까지는 적어도 1~2개월은 걸릴 터였다. 따라서 명석은 본인의 지분을 담보로 새로 대출을 받아 집과 차를 담보로 한 대출을 갚을 생각이었다. 흔히 말하는 돌려 막기였다.
비상장주식을 담보로 한 대출을 받기까지는 심사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기에 그 사이 이혼을 처리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정은 여전히 연락이 없었고, 소재도 요원한 상태였다. 명석이 보기에 연정이 소송을 할 능력은 없어 보였기에 곧 우는 소리를 하며 연락이 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명석의 예상과는 다르게 연정은 조금의 연락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연정에게 주었던 신용카드를 끊어두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꽤나 버틸만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명석의 집 우편함에는 법원에서 소장이 와있었다. 명석이 이혼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자 연정이 소송을 건 모양이었다. 소장을 본 명석은 불같이 화를 내며 집안의 물건들을 다 때려 부수었다. 감히 본인에게 소송을 걸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연정을 죽이고 싶을 정도였다. 사람을 고용해서 연정의 행방을 찾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연정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기에 명석은 그저 화를 내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소장을 받은 그날, 명석은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받기로 했던 캐피털에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XX캐피털입니다. 전화받으신 분이 장명석 고객님 맞으신가요?"
"어."
"다름이 아니라 저희 쪽에 비상장주를 담보로 대출 신청을 주셨는데, 가치평가가 그리 높지 않게 나오셔서 고객님께서 신청하신 만큼의 대출은 어려울 것 같아서 전화드렸습니다."
"뭐?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장명석 고객님께서 신청주신 금액은 20억이신데, 저희 쪽 평가에 따르면 최대로 대출해 드릴 수 있는 금액은 4억 원이라서요."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가진 지분이 얼만데, 어? 니들이 뭔데 내 지분을 고작 4억이라고 판단을 해?"
"말씀하신 가치 평가는 심사 쪽에서 진행하는 거고 저희는 그대로 전달받아서 처리하는 것뿐이라 자세히 설명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원하신다면 심사 쪽에 상담을 신청해 드릴까요?"
가뜩이나 화가 나있던 명석은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으며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이혼 소송에 대출까지 막히니 명석은 다시 짜증이 났다. 기껏 투자금을 받아서 부도는 막았지만 여전히 명석에게 남은 일들은 원활히 진행될 기미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뭐 하나라도 해결을 하기는 해야 했기에, 명석은 집을 나와 회사로 향했다. 사실 집과 차 정도는 은행에 넘어간다 한들 명석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회사의 지분을 꽤 가지고 있기에, 법인 명의로 집과 차를 대여해서 쓰면 되었고, 돈은 추후 배당 등을 통해서 조달하면 될 문제였다. 하지만 천하의 장명석이 돈을 갚지 못해서 집과 차를 은행에 빼앗긴다는 것은 명석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되면 투자자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줄 것이고, 이는 곧 회사의 투자금이 빠져나가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어떻게든 막아내야 했다.
그래서 명석은 도저히 내키지는 않았지만 상진에게 돈을 빌리기로 했다. 명석은 상진 따위에게 돈을 빌려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집과 차를 빼앗기는 것보단 나아 보였다. 어차피 상진은 돈을 쓸 줄도 몰라서 쌓아만 놓았을게 뻔했고, 자신이 빌려 달라 하면 빌려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명석은 회사가 이만큼 큰 데에는 상진보다는 자신의 공이 더 크다고 생각했기에,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회사에 도착한 명석은 차를 세우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사무실로 올라갔다. 사무실 출입문 옆의 리더기에 출입 카드를 대자, 빨간색 X표가 뜨면서 삑삑삑 경고음이 울렸다. 명석은 다시 출입카드를 댔지만, 또다시 경고음이 울리며 문이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을 더 시도해도 경고음만 울릴 뿐 문이 열리지 않자, 명석은 소리를 지르며 문을 두드렸다.
"거기 누구 없어? 문을 누가 이따위로 만든 거야? 빨리 나와서 문 열어!"
하지만 명석의 소리에도 누군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다. 화가 난 명석은 더욱 세게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야이 새끼들아! 왜 아무도 안 나와! 니들 다 잘리고 싶어? 어?"
명석은 분노에 차서 문을 계속 발로 찼다. 이러다가 문이 깨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러 번 문을 걷어찼을 무렵, 문이 열리며 상진과 정환이 사무실에서 나왔다.
"아이고, 우리 장사장께서 왜 이렇게 화가 나셨어 그래."
정환의 얼굴을 본 명석은 다급하게 자세를 가다듬고 태연한 척 말을 건넸다.
"민대표님께서는 여기 어쩐 일로…?"
"아, 뭐 별건 아니고 여기 박사장이랑 좀 일이 있어서 왔지."
정환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네, 뭐. 일은 잘 끝나셨나요?"
"그러엄. 아주 잘 끝났지."
"다행이네요 대표님. 근데 제가 지금 박대표랑 급하게 할 말이 있어서요."
"아, 그래그래 둘이 일 봐.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명석은 상진을 보며 말했다.
"상진아, 둘이서 얘기 좀 하자."
명석은 상진의 팔을 잡고 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상진이 명석의 팔을 잡고 명석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
"왜? 빨리 들어와 니 방 가서 얘기하자."
그러자 상진이 말했다.
"너, 이제 여기 사장 아냐."
"뭔 개소리야?"
"너 이제 여기 사장 아니니까 들어가면 안 된다고."
사무실에 들어가려던 명석은 다시 몸을 바깥으로 돌려 상진을 쳐다봤다.
"야, 박상진 그게 뭔 개소리냐니까? 지금 농담할 시간 없어, 빨리 들어와!"
"농담 아냐. 아무래도 이해가 안 되나 본데, 너 사장에서 잘렸어. 아니 잘렸다기보다는 경영권을 잃었다고 해야 하나."
명석은 상진의 얘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에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다니던 상진이 오늘따라 또렷하게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진심으로 하는 얘기로 보였다.
"누가 나를 잘라?"
"내가."
"뭐?"
"내가 잘랐어."
"그게 뭔 소리야? 니가 날 어떻게 잘라?"
"나랑 민대표님 지분 합치면 50% 넘잖아."
상진의 말에 명석은 눈을 부릅뜨고 상진과 정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야 씨발. 둘이 짰다고?"
명석의 말에 정환의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이고 우리 장사장이 화가 많이 났나 봐? 일단 좀 진정하고 목소리 좀 낮춰."
명석은 뒤로 물러나며 손가락으로 둘을 번갈아 가리켰다.
"씨발 언제야? 언제부터 둘이 짠 거야?"
"처음부터."
상진의 말에 명석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뭐?"
"처음부터라고."
"처음부터?"
명석은 상진을 노려보았다.
"니가 감히 저 새끼 꼬임에 넘어가서 나를 팔아?"
상진을 한숨을 쉬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명석을 바라보았다.
"아냐. 내가 끌어들인 거야."
상진의 말에 명석은 할 말을 잃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네가 볼 때 나는 경영이나 이런 거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보였겠지만, 모른 척했을 뿐 나도 나 나름대로 알건 다 알고 있었어. 그동안 네가 배임이나 횡령을 저질렀을 때 어느 정도까지는 적당히 넘어가긴 했지만, 이번에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채권과 어음을 남발해서 회사를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만들었잖아. 이번 건은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어."
"야이 새끼야. 회사가 여기까지 큰 게 누구 덕분인데!"
명석은 상진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이 회사를 위해서 해준 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도를 너무 지나쳤어."
명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진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이제 회사의 경영에 참여할 수 없을 테니, 네 지분은 나에게 파는 게 어때? 값은 잘 쳐줄게."
명석은 당장에라도 상진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상진을 때려봐야 이득이 될 게 없었다. 어차피 더 이상 회사에 출입할 수 없다면 법인 명의를 통해 생활을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앞으로도 회사를 통해 이득을 볼 가능성이 낮았기에, 상진에게 지분을 넘기고 돈을 건네받아 그 돈으로 담보 대출을 갚고 집과 차를 보전하는 게 제일 나았다. 계산이 빠른 명석은 즉각 그 사실을 이해했지만, 본인의 자존심상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얕보던 상진에게 지분을 넘겨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명석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상진은 명석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당장에 그러라는 건 아냐. 어차피 급한 건 아니니까. 집에 가서 잘 생각해 보고 답을 들려줘. 굳이 지분을 들고 있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그게 너에게 딱히 이득이 되지는 않을 거야."
상진과 정환은 자리를 떴고, 명석만 사무실 입구에 오도카니 서서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