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뒤, 명석은 부모님 댁에 있었다. 결국 연정과는 합의하에 이혼을 했고 양육권도 연정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에 따라 재산을 분할해주어야 했고, 어떻게든 지키려 했던 집을 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집은 적당한 값을 받았지만, 차는 사고로 폐차를 해야 했기 때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집을 판 돈의 대부분을 연정에게 주어야 했고, 남은 돈들은 유족들과의 합의금과 보상금으로 사용해야 했다.
명석에게 남은 돈이라고는 장애 등급을 받고서 받은 보험금이 다였는데, 그마저도 대부분은 보상금으로 지출하고 수중에 남은 돈은 고작 천 오백만 원이었다. 결국 명석은 어쩔 수 없이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살면서 일자리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금방 일자리를 구하리라 기대했지만, 예상외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명석에게는 한 회사의 대표를 지냈다는 꽤 좋은 경력이 있었기에 본래대로라면 많은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야 했지만, 이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지기도 했고 평소 행실이 딱히 좋지 않았기에, 그런 명석을 동정하거나 도움을 주려는 사람도 없었다. 일반 경력직으로 지원을 하면, 명석의 특별한 경력으로 인해 많은 곳에서 면접을 볼 수 있었지만, 평판 조회를 통해 명석의 일을 알게 된 회사들은 모두 명석을 채용하지 않았다. 가끔 명석을 채용하려는 곳도 있기는 했는데, 정작 명석이 지원한 자리가 아니라 장애인을 위해 마련된 자리를 제안했다. 당장에 수입이 없는 명석은 그거라도 해야 했지만, 가뜩이나 면접을 보러 다니는 것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그런 자리에서 일을 하는 것까지는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고, 명석은 계속해서 부모님 댁에 얹혀서 살 수밖에 없었다. 전에 돈이 많을 때 부모님 집에 지원이라도 넉넉히 해드렸다면 그래도 꽤 지내기 좋은 곳이었겠지만 부모님 댁은 몇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냉난방도 잘 되지 않는 낡디 낡은 집이었다. 교통도 좋지 않아서 가까운 시내라도 가려면 4시간에 한 대씩 오는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경운기를 몰고 나가야만 했다.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저 옷을 벗었다가 껴입었다가 하면서 살아야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명석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점점 구직 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고, 결국에는 매일 방 한구석에 누워 잠만 자거나 자지 않을 때는 술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명석은 도대체 자신의 인생이 어디서 어떻게 꼬인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1호가 말한 보험금은 대체 어떤 것이었으며, 대체 자기가 뭘 잘못했길래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술을 마실 때마다 신을 향해 험한 욕을 내뱉으며 분노를 표출할 뿐이었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늘 술에 취해 하늘에 대고 신을 욕하는 명석을 보며 이웃 주민들은 서울 가서 성공했다더니 미쳐서 돌아왔다며 명석을 손가락질했다.
어느 날 그런 명석을 보다 못한 명석의 아버지가 명석을 불러 앉혀놓고 얘기를 시작했다.
"명석아."
"…"
명석은 부모님 댁으로 돌아온 이후로 아버지와는 거의 얘기를 하지 않았었다. 밥을 먹기 위해서라도 어머니와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아버지와는 딱히 그럴 필요도 없었거니와, 그동안 남남인척 모른 척 살았던 주제에 재산을 잃고 인생이 망하자 뻔뻔스럽게 다시 부모님 댁으로 들어온 자신이 쪽팔리고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명석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명석의 소식을 듣고는 흔쾌히 명석을 받아주었으며, 그 이후로도 그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고 간간히 명석에게 용돈을 주며 명석을 놔두었었다.
"명석아, 그… 괜찮으면 아빠 친구가 약 배달하는 일을 하거든? 약 공장에서 받아다가 돌아다니면서 약국에다가 납품하는 일이야. 공장에서 약을 싣고 약국에서 약을 내리고 해야 해서 어느 정도 몸을 쓰긴 해야겠지만, 약 자체가 무거운 게 거의 없어서 힘도 별로 안 든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배달일이니까 운전만 할 줄 알면 별다른 기술도 필요 없고."
"…"
"거기서 배달할 사람을 뽑는다는데, 어떻게… 한번 해볼래? 너 아직 운전도 할 수 있고, 저 정도 일이면 다리 하나 없는 거는 문제도 안될 것 같은데."
명석은 아버지를 쳐다보지 않고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얘기를 듣고 이었다.
"벌이는 얼마 안 되지만, 그래도 먹고살만큼은 준다더라. 방안에만 있으면 너도 심심할 텐데 소일거리로 어떨까?"
"생각 좀 해볼게요"
명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딱히 명석을 잡지 않고 놔두었다. 명석이 방에 들어가 눕자 거실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화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명석이 자존심 상하게 뭐 그런 얘길 하고 그래요. 그래도 월에 몇 천씩 벌던, 회사 사장님이었는데."
"내가 뭐 자존심 상하라고 얘기했나. 그냥 그 자리가 좋아 보이길래 얘기한 거지 뭐. 몸 아프다고 계속 방안에만 있으면 기분만 더 안 좋아지니까 소일거리 하라고 그런 거야 그냥. 내가 뭐 큰돈 벌어오라는 게 아니잖아."
"그래도 그렇지 애가 급이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 명석이가 그런 일이나 할 그런 애가 아닌데."
"어허, 그런 소리 말어. 사람일이라는 게 원래 올라갔다 내려오기도 하고 내려갔다 올라가기도 하고 그런 거야. 당신 말대로 명석이가 급이 높으면 금방 다 털고 다시 뭐라도 잘하겠지."
부모님의 대화에 명석은 새삼 부모님께 미안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은 항상 명석에게 큰소리 한번 내지 않으시고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시면서 키워주셨었는데, 단지 집에 돈이 많이 없어서 지원을 많이 받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성공하자마자 부모님을 남처럼 내친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나마 연정이 명석 대신에 자식 노릇을 열심히는 했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고마워한들 연정은 떠난 지 오래였다.
두어 시간 뒤 명석은 방을 나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거 할게요."
명석의 말에 아버지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냥 용돈벌이 한다고 생각해. 나도 일손 부족할 때 가끔 가서 도와줬는데 별거 없더라고. 아, 그리고 대신에 그게 있어."
"…?"
"차는 지원이 안된대. 기름값은 지원해 주는데 기본적으로 자기 차가 있어야 하더라고. 회사차까지는 지원이 안된다더라."
명석도 아버지도 차는 없었기 때문에 차를 새로 사야 한다는 얘기였다.
"알았어요. 새로 사야겠네."
다음날, 명석은 차를 사러 중고차 시장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약을 실어 날라야 하기에 트럭이 좋을 것 같았으나, 약품의 변질과 도난 우려가 있어서 트럭은 안되고, SUV나 해치백으로 구매해야 한다고 했다. 명석의 덩치라면 SUV를 사야 했지만, 돈을 아끼기도 해야 했거니와 한쪽 다리만으로 SUV에 탑승하는 건 꽤나 힘들어 보였다. 심지어 약을 싣고 내릴 때마다 수시로 오르내려야 했기에 SUV를 살 수는 없었다. 결국 해치백으로 결정해서 차들을 둘러보았다.
해치백은 애초에 수요가 적기 때문인지 중고 매물 자체가 너무 적었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 차거나 아니면 꽤나 오래된 차들이 대부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기 위해 연식이 꽤 된 차들을 보았는데, 너무 오래되어 에어컨도 잘 나오지 않았고, 여러 옵션들이 빠져있었다. 가격은 천만 원도 채 안 되는 가격이었기에 돈을 아끼기에는 적합했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차 안에서 보내야 했기에 그래도 돈을 조금은 더 쓰기로 하고 비교적 연식이 얼마 되지 않은 차를 골랐다. 천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지불하고 차량을 인수받아 곧바로 취등록세를 납부했다.
막상 운전을 시작해 보니 명석은 왼쪽 다리에 의족을 차고 있어서 운전을 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지만, 그래도 무릎 아래쪽이 없다 보니 왼쪽을 지지하는 힘이 약했고, 그래서 몸이 자꾸 왼쪽으로 쏠리려 하는 바람에 꽤나 많은 힘을 주어 자세를 바로잡고 운전을 해야 했다.
명석이 집에 가서 이 얘기를 하자 명석의 아버지는 명석을 데리고 시내 목공소로 향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목공소에서는 명석이 차에 탔을 때 의족을 빼고 다리를 올려놓아서 몸을 고정할 수 있도록 나무 발판을 맞춤 제작해 주었다.
계좌이체로 발판 값을 목공소에 지불하고 나니 명석의 통장 잔고는 정확하게 0원이 되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명석의 아버지가 말했다.
"어떻게 보험금이 딱 필요한 만큼만 들어왔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