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제호 Mar 19. 2024

제6관 사랑 보험 - 1

  약속시간까지는 30여분 정도 남아있었기에 혜연은 교양관 앞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이제 막 대학생이 된 혜연은 영어 동아리에 가입을 하긴 했지만 동아리방에 가있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가입한 지 고작 2주일밖에 되지 않아 사람들하고 데면데면하기도 했거니와 혹시 약속에 대해 사람들이 묻기라도 한다면 잘 둘러댈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도 날이 꽤나 포근해서 외투를 입지 않아도 될 정도였기에 벤치 앞에 앉아서 벚나무들을 감상했다. 캠퍼스 조경을 위해 교양관을 따라 쭉 심어놓은 벚나무는 굳이 벚꽃놀이를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화려하게 만개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경치일지라도 어디까지나 캠퍼스 안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태여 그 앞에 앉아서 벚꽃을 감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늘 교양관 앞 벤치들 중 최소 두 개 이상은 사람이 없었기에 혜연은 종종 벤치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저 교양관 앞 벤치에 앉아있을게요. 끝나고 천천히 오세요.'

  혜연은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한 선배인 동명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동아리 선배인 동명은 2학년으로, 동아리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남자선배들은 군대를 갔다 와야 하고 여자선배들은 취업준비로 정신이 없기 때문에 대대로 2학년이 회장과 부회장직을 맡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그래서 3월 초, 동아리 홍보활동도 동명이 직접 도맡아 교문 앞에서 전단지를 뿌리며 진행했었다. 동명은 키가 183cm에 새까만 머리카락과 오뚝한 코, 큰 눈망울을 가진, 흡사 모델에 가까운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신입생들은 앞다투어 동명에게서 전단지를 받아갔었다. 혜연도 그중 하나였고, 결국 동명을 따라 덜컥 동아리에 가입해 버렸다. 그렇게 가입한 혜연이 처음 동아리방에 방문했을 때, 동아리방에 있던 동명이 웃으며 혜연을 맞이해 주었고, 혜연은 '이게 바로 대학생활이구나' 하는 생각에 살짝 감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동아리에 가입을 하기는 했지만 혜연이 원체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지 신입회원 환영 파티에서도 사람들과 쉽사리 말을 섞지는 못했다. 애초에 알콜 분해효소가 없어서 술을 한잔도 마시지 못하는 혜연에게는 괴로울 뿐인 자리였지만 그래도 동아리 행사라고 하길래 참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 앉아있는 건 생각보다 많이 괴로운 일이었다. 그래도 신입인지라 구태여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으나, 곧 한계에 달해 화장실을 가는 척을 하고 숨을 좀 돌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데 때마침 밖에 나온 동명이 혜연을 위로하며 그다음 주에 점심을 사주겠노라 했다. 어떻게든 동명과 가까워지고 싶었던 혜연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동명을 기다리던 혜연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덥수룩한 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듬성듬성 나있는 수염에 위에는 흰색 줄무늬가 그어진 녹색의 체크무늬셔츠, 아래에는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를 신은 전형적인 공대생의 모습이었다. 하얀 피부에 짙은 눈썹과 큰 코를 미루어볼 때 꽤 준수한 외모를 가졌을 것임에도 딱히 외모를 가꾸진 않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남자가 건넨 인사에 혜연은 경계심을 가졌다. 아직 입학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갑자기 다가와서 인사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약간의 도움을 요청하거나 호의를 베풀고선 결국에는 물건을 팔려고 한다던가 전도를 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혜연의 맘을 읽었는지는 몰라도 혜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이에 대해 해명을 했다.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물건을 파는 것도,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팅은 더더욱 아니구요. 그쪽은 제 타입은 아니세요."

  남자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진 혜연은 할 말을 잃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문학동아리 소속인데 이번에 저희 동아리에서 경연대회를 하거든요. 누가 더 흥미로운 소설 설정을 써오는지로요. 그래서 출품할 걸 다 쓰기는 했는데 이게 잘 쓴 건지 아닌지 판단이 서질 않더라구요.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볼래도 친구들도 대부분 같은 동아리 소속이라 경연에 참가 여부와 별개로 객관적인 판단이 되질 않을 것 같아서, 아예 일면식도 없는 분들에게 의견을 여쭙고 있어요."

  하지만 남자의 해명에도 혜연은 쉽사리 경계를 풀지 못했다.

  "아, 진짜로 저 사이비 아니에요. 사람들이 자꾸 사이비로 생각해서 제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도망가더라구요. 한 번만 읽어주시면 안 될까요?"

  억울한듯한 남자의 표정에 혜연의 마음이 조금은 녹아들었다.

  "그럼 말씀하신 설정을 읽고서 어떤지 말씀드리기만 하면 되나요?"

  "네네. 그냥 가볍게 읽어봐 주세요."

  남자는 혜연에게 작은 비타민 음료와 원고를 건넸다. 혜연은 아직까진 경계심을 다 풀지는 않았기에 음료는 거절하고 원고만 받아 들었다.

  "아, 저 금방 점심 먹을 거라서요."

  "아 넵. 그럼 저는 옆에 벤치에서 리포트 쓰고 있을 테니까 다 보시면 말씀해 주세요."

  남자는 짐을 챙겨 옆 벤치로 옮겨 앉았다. 가방에서 리포트 용지와 두꺼운 전공 서적을 꺼내 벤치에 펴놓고는 반쯤 엎드리다시피 벤치에 쭈그려서 끄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혜연은 약간은 안심을 하고 건네받은 원고의 첫 장을 넘겼다. 원고의 맨 위에는 '인생 보험'이라 적혀있었다.




  30여분 뒤, 혜연은 아직도 원고를 다 읽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곧 동명이 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결정을 하지 못한 상태로 벤치 옆의 남자를 바라보자, 혜연의 시선을 느낀 남자가 고개를 들어 혜연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방긋 웃으며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혜연에게 다가왔다.

  "다 읽어 보셨나요?"

  "아, 아뇨 아직은요. 꽤 기네요."

  "그쵸? 너무 길게 쓰긴 했어요."

  "보험 계약서 형식으로 만드신 건 참신한 것 같아요."

  혜연이 남자에게 원고를 내밀며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원고를 받아 들지 않았다.

  "아직 다 읽지 못하셨으면 가져가서 읽어주실 수 있을까요? 괜찮으시다면 모레 점심때쯤 여기서 다시 돌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원본은 컴퓨터에 있지만 그래도 창작물이다 보니까 유출될 수 있어서요."

  혜연은 남자의 부탁이 조금은 귀찮았다.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원고를, 심지어 조금은 지루하기까지 한 계약서 형태의 원고를 구태여 집까지 들고 가서 시간을 내어 읽어준다는 건 별로 내키지 않을 법했다.

  "대신에, 시간을 내서 읽어주셔야 하는 거니까. 아까 그 음료 대신에 학생회관 식권 10장을 드리면 어떨까요? 아르바이트비로요."

  남자의 제안에 혜연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럼 모레까지 읽어 볼게요. 모레는 제가 오전에 수업이 있어서 1시에나 시간이 될 것 같은데…"

  "네, 1시 좋습니다. 1시까지 올게요. 잘 부탁드려요."

  남자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혜연에게 고개를 꾸벅거리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러자 수업이 끝나 교양관 앞으로 온 동명이 혜연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 그 사람은 누구야?"'

  "아, 선배 오셨어요. 문학동아리 사람이라는데 저 사람이 쓴 원고를 읽고 평가해 주면 식권을 준다 그래서 읽어봐 주기로 했어요."

  동명은 혜연의 손에 들려있는 원고뭉치를 슬쩍 들춰보았다.

  "뭐 딱히 써진 것도 없구만.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