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혜연은 집에 돌아와 계속해서 원고를 읽었다. 딱히 재미가 있지는 않았지만 대체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를 가정하고 쓴 것인지가 궁금해서 계속 읽었다. 그렇게 새벽 늦게까지 읽고 그다음 날에도 하교 후에 바로 집으로 가 계속 원고를 읽었다. 원고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안에 빠져들어서 마치 현실에 있는 보험 계약서를 읽는 것만 같았다. 점점 감정 이입이 된 나머지 만약 본인이 이 보험에 들면 어떨지에 대해 상상하며 읽게 되었다. 그렇게 자정이 가까워올 무렵 가까스로 원고를 다 읽었다.
원고 마지막장에는 계약에 동의하겠냐고 묻는 체크박스와 서명란이 마련되어 있었다.
'진짜 계약서처럼 서명란까지 만들어놨네? … 서명한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겠지?"
꽤나 감정을 이입해서 읽었던 혜연은 그 페이지를 보며 진짜로 서명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했다. 어차피 가상의 원고이기에 기념 혹은 장난으로라도 서명을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남자에게 돌려줘야 하기도 했거니와 계약서 내용들이 너무 본격적이어서 서명을 했다간 진짜 계약이 이뤄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기 위해 서둘러 자야만 했기에 혜연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원고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차피 다음날이면 원고를 준 남자를 만날 예정이었기에 궁금한 것들은 그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학과나 이름도 모르네.'
약속날, 혜연은 전처럼 교양관 앞 벤치에 앉아서 남자를 기다렸다. 약속했던 오후 1시가 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혜연의 옆에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앗, 깜짝이야!"
혜연은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알아보기 쉽게도 남자는 엊그제와 똑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혹시 다 읽어 보셨을까요?"
"네, 분량이 많고 세세하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이 꽤 걸리긴 했는데, 그래도 다 읽었어요."
남자는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주머니를 열어 식권 꾸러미를 꺼냈다.
"일단은 말씀드렸던 식권입니다."
"앗, 감사합니다."
혜연은 손을 내밀어 식권 꾸러미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그사이 남자는 혜연의 옆에 앉아 혜연을 바라보았다.
"읽어보신 소감이 어떠신가요?'
"음…"
"괜찮아요 편히 말씀해 주세요."
"인생 보험이라는 설정을 계약서 형태로 쓰신 건 신선했어요. 그래서인지 왠지 진짜 있는 보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몰입감은 좋더라고요."
혜연의 얘기를 들은 남자는 가방에서 수첩과 볼펜을 꺼내 혜연의 얘기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요?"
"경우의 수를 꽤 많이 생각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세세한 부분까지도 설명이 되어있는 게 놀라웠어요. 인생이 망한걸 어떻게 판단할지나 어떻게 보상할지, 주의사항이 어떤 건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바뀌는지 등 꽤 많은 내용이 들어가 있던데, 다 직접 생각하신 건가요?"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아뇨 동생하고 같이 써봤어요. 동생이 이런 걸 잘하는 편이라서요."
"두 분 다 대단하시네요."
"그럼 혹시 좀 수정할 부분이나 그런 건 없을까요?"
남자의 말에 혜연은 잠시 머뭇거렸다.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 주세요. 그래야 저도 고쳐서 출품할 수 있으니까요."
"음… 일단은 그… 영혼의 1%를 가져가는 부분이 좀 이상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신이 그걸 가져간다 한들 어떤 이득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계약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안 나와있더라고요. 그냥 자각하지도 못하고 전과 똑같이 살게 된다고 되어있지만 결국에는 눈치채지 못할 뿐 어떤 영향을 끼치기는 한다는 거잖아요?"
"맞아요 그런 맹점이 있죠."
"그럼 그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긴 한데, 그 부분은 일단은 빼놓기로 했어요. 그 부분을 넣었다가는 계약 자체가 뒤틀릴 위험이 있어서요. 그리고 또 있나요?"
"실제 계약서처럼 쓰신 덕분에 문체가 많이 딱딱해서 처음에 읽기가 많이 힘들더라고요. 소설에 쓰실 거면 조금은 더 풀어서 쓰셔도 되지 않을까요?"
"뭐, 그럴지도요."
"그래도 마지막에 동의하겠냐고 물어보는 항목이랑 서명란을 넣어두신 건 좋았어요. 그래서 더 리얼하던걸요?"
혜연의 말에 남자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남자가 물었다.
"만약 진짜로 그런 보험이 있고 가입할 기회가 생긴다면 가입하실 건가요?"
남자의 질문에 혜연은 잠시 먼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음… 고민이 좀 될 것 같아요."
"어째서요?"
"일단은 제가 망할 수도 있다는 거니까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을 것 같고요. 그리고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뭔지 스스로도 잘 모르는데 그걸 기반으로 계약을 해야 한다는 게 왠지 좀 불안하네요. 보상도 어떤 걸로 올지도 모르는 것도 그렇고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망할 가능성을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두는 건 나쁘지 않아 보여요. 영혼의 1%를 미리 납부하는 게 아니기도 하거니와 망할 '가능성'이라는 거는 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고 그러면 영혼을 넘길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혜연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렇게 나쁜 계약은 아니죠."
남자는 가방에서 펜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 펜을 혜연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럼 계약해 보실래요?"
남자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혜연은 많이 당황했다.
"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시면 맨 뒤에 서명을 하시면 돼요."
남자의 제안에 혜연은 꽤나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일면식도 없는 자기에게 소설 설정을 평가해 달라고 한 것도 이상했는데, 지금은 마치 이 계약이 진짜로 있는 계약인 것처럼 서명해 보라고 하는 걸로 보아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사람이 아닌가 싶은 의심이 생겼다. 혹은 너무 문학에 심취해서 이 계약이 진짜인 것처럼 일부러 설정 놀이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혜연의 입장에서는 많이 당혹스러웠고 이 남자를 피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럼, 서명하고 넘겨드리면… 끝인가요?"
혜연은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서명만 하면 이 묘한 상황이 끝나는 것인지 남자에게 물었다.
"서명하시고 저에게 넘겨주시면 끝이에요. 저는 원고를 받으면 바로 돌아갈 거고요."
남자의 말에 혜원은 마뜩잖은 표정으로 계약서 맨 뒷장에 있는 동의 여부를 묻는 부분에 체크 표시를 하고 밑에 서명란에 서명을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펜과 계약서를 남자에게 넘겨주었다. 남자는 혜연에게 건네받은 펜과 계약서를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부디 앞으로의 인생에서 이 보험을 떠올리실 일이 없길 바라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순간적으로 혜연의 사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분명 눈을 떼지 않고 있었음에도 다른 장면으로 전환되듯 남자가 사라진 것을 본 혜연은 너무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그 어디에도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듯한 기분을 느낀 혜연은 소름 끼쳐하며 다급하게 가방을 챙겨 벤치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어느덧 1시 20분을 넘어가고 있었고, 혜연은 아직 점심을 먹지 않았기에 점심을 먹기 위해 학생회관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해 식권을 사기 위해 가방을 열어 지갑을 꺼냈다. 그러자 혜연의 가방에서 바닥으로 식권 꾸러미가 툭 떨어졌다. 그 꾸러미를 주워 든 혜연은 대체 왜 식권 꾸러미가 자기 가방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