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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Mar 25. 2024

제6관 사랑 보험 - 4

  그날도 점심을 먹기 위해 혜연은 공학관 앞에서 동명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렸다. 수업이 끝나고 공학관을 나오던 동명이 혜연을 보고는 혜연에게 다가왔다. 혜연은 동명을 반갑게 맞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동명은 그런 혜연을 제지하고는 이별을 고했다.

  "우리 그만 만나자."

  "뭐?"

  혜연 입장에서 동명의 이별 통보는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기에 혜연은 많이 당황했다. 하지만 동명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해 보였다.

  "헤어지자고."

  "왜 그래 오빠. 요새 학교 다니는 게 좀 힘들어서 그래?"

  혜연의 그 말에 동명은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때문에 그래 너 때문에."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너 너무 부담스럽다고."

  동명의 말은 많이 퉁명스러웠고 날이 잔뜩 서있었다. 혜연은 동명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부담스럽다니?"

  동명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넌 친구도 없어? 어떻게 맨날 나한테만 붙어있으려고 그래? 부담스러운 걸 넘어서 소름 끼쳐."

  혜연은 동명의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기가 찬 혜연은 이내 따지듯이 말했다.

  "뭐? 내가 오빠 전역날만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1년 반동안 오빠를 기다리느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래도 나 오빠랑 있고 싶어서 그 사이에 딴짓 안 하고 미리 취업준비까지 다 해놓고 오빠만 기다렸는데 고작 나랑 조금 붙어있었던 거 가지고 그러는 거야? 그렇게 나랑 있는 게 싫어?"

  말을 마친 혜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곧이어 고여있던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눈물로 인해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혜연은 계속해서 눈물을 닦아 내었으나, 그럼에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하지만 동명은 그런 혜연의 눈물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런 점이 부담스럽고 소름 끼친다고! 내가 언제 기다려 달랬어? 니가 멋대로 기다려놓고는 왜 그걸 생색내면서 내 삶을 옥죄는 건데! 나도 내 생활이 있는데 왜 자꾸 옆에서 아무것도 못하게 그러는 거야?"

  "내가 언제 아무것도 못하게 그랬어?"

  "너 학교에서 수업 듣는 시간 빼면 하루종일 내 옆에 사사건건 붙어 있으려고 하잖아! 내가 친구들하고 노는 것도, 동아리 활동을 하는 것도 하나하나 다 따라올라 그러고 하루라도 못 보면 안 될 것처럼 울며불며 난리 쳐서 다른 스케줄도 못 잡게 하고! 너 스토커야? 무슨 정신병이라도 있어? 왜 나를 가만 놔두질 못해! 왜!"

  동명의 외침에 지나가던 사람들은 모두 둘을 힐끔거렸다. 하지만 동명에게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고, 그러거나 말거나 혜연도 계속 훌쩍거리며 말했다.

  "오빠,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런 거야? 그럼 오빠 자유시간을 좀 주면 될까? 그럼 좀 괜찮겠어?"

  "됐다고! 너 소름 끼친다니까?"

  조금 전까지 주룩주룩 쏟아지던 혜연의 눈물이 점점 줄어들었다. 좀 전까지는 눈물이며 콧물이며 다 흘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눈물만 조금 글썽일 뿐이었다. 여전히 눈은 빨갛게 부어있었고 눈물에 화장이 조금 지워지긴 했지만 목소리는 울기전으로 돌아왔다. 혜연은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휴지를 꺼내 코를 풀었다. 언제 울었냐는 듯 진정된 혜연은 눈에 힘을 주어 동명을 쳐다보았다.

  "오빠 다른 사람 생겼어? 전에 사촌누나라던 그 사람 때문이야? 그 사람 사촌누나 아니잖아. 나 다 알아."

  혜연의 추궁에 격앙된 동명은 입에서 욕을 뱉을뻔했다. 하지만 공학관 앞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데다가 이미 혜연의 울음으로 인해 둘을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차마 욕을 뱉지는 못하고 화를 냈다.

  "이런 점이 정신병자 같다고! 대체 언제 적 얘기를 꺼내는 거야! 그거 군대 가기 전 얘기잖아!"

  "하지만, 오빠 그때 바람피운 거 맞잖아!"

  혜연은 눈에 독기를 품고 앙칼진 목소리로 동명을 쏘아붙였다. 그런 혜연을 본 동명은 시선을 돌리며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동명은 다시 시선을 돌려 도끼눈을 뜨고는 혜연을 쳐다보았다.

  "그래. 너 같은 정신병자랑 만나다 보면 정상적인 사람이 만나고 싶어 지거든."

  "역시 그럴 줄 알았어."

  혜연의 한쪽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울던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표독한 표정이었다. 그런 혜연을 본 동명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헤어지자고. 됐지?"

  하지만 동명의 말에도 혜연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혜연에게 동명은 동경하는 선배이자 사랑스러운 남자친구였기에. 하지만 그런 혜연을 보는 동명의 눈에는 경멸이 담겨있었으며, 혜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혜연은 다시 한번 동명을 붙잡았다.

  "오빠 바람 폈어도 괜찮아. 그때 잠깐 군대 가기 전이라 힘들어서 그런 거고 그 사람 이제 안 만나잖아. 그치? 나도 오빠 옆에만 붙어있지 않을게. 주중에는 하루만 같이 점심 먹고 주말에도 하루만 만날까? 오빠가 하자는 대로 할게."

  동명은 그런 혜연에게 한마디를 내뱉고 그대로 혜연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미친년."


  그렇게 동명과 헤어지게 된 혜연은 며칠간 상심에 빠져 식음을 전폐하고 계속해서 울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동명의 마음을 돌려 다시 되돌리고 싶었으나, 동명은 이미 혜연의 연락처를 모두 차단한 상태였다.

  동명을 만나기 위해 동아리에도 가보았으나, 동아리 내에는 이미 혜연과 동명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만연했다. 애초에 혜연은 동명과 달리 동아리 활동에도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동명이 없이 동아리 활동을 지속하는 건 무리였고 결국 탈퇴 의사를 밝히고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혜연과 동명은 전공이 다르긴 하지만 둘 다 공대생인지라 수업은 같은 건물에서 듣고 있었기에, 혜연은 일부러 자기 수업이 없을 때에도 공학관 앞을 서성였다. 혹여 지나가는 동명을 마주치고 얘기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실제로 가끔 동명을 볼 수 있었고 혜연은 멀리서 동명을 지켜보다가 다가가곤 했다. 하지만 혜연이 다가오는걸 눈치챈 동명은 쓰레기라도 보는 표정으로 혜연을 쳐다보고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렸기 때문에 혜연과 동명이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결국 혜연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동명에 대한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학교에서 오며 가며 공학관에서 동명을 마주치기는 했기에, 마음을 접는 것이 생각보다는 쉽지 않았고, 혜연은 어떻게든 이 괴로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그래서 혜연은 시간표를 조정해 수업 일수를 줄였고, 수업이 없는 시간이나 수업이 없는 날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을 택했다. 수업이 없는 날은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집에서는 딱히 할 것도 없었거니와,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계속해서 동명이 생각났기 때문에 수업이 없는 날에도 굳이 도서관을 가기로 했다. 다만 동명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미리 다 준비했던 바람에, 당장의 과제를 제외하면 도서관에서는 딱히 시간을 보낼 방법이 애매했다. 도서관의 취지에 맞게 여러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평소에도 독서에는 취미가 없었기에 생각보다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결국 혜연은 예전처럼 공부를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왕이면 아예 전공과 상관이 없는 걸 골라서 공부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름 어떤 분야를 공부해 보면 좋을지 찾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여러 자격시험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어학을 골라보았음에도 생각보다 혜연의 적성에 맞는 게 없었다. 학과 공부야 적성과 상관없이 해야만 하니 어떻게든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종류의 공부가 아니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열의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설령 자리에 앉아서 만화책을 본다 하더라도 구태여 꼬박꼬박 도서관에 출근도장을 찍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도서관이 열리는 시간에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서 도서관이 끝날 때까지, 밥 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 약간의 휴식시간을 빼고는 늘 자리를 지켰다. 뭘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일지라도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되는대로 자격증 관련 책들을 뒤적거리거나 문제집을 풀어보기도 하고, 다양한 나라들의 언어를 노트에 써가며 공부해 보았다. 심지어 정 할 게 없으면 아예 자리에 엎드려서 잠을 청해 보기도 했다. 그렇게 거의 도서관 지박령 수준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자, 나중에는 혜연이 늦게 오는 날임에도 사람들이 그 자리를 비워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혜연의 대각선 자리에는 늘 초췌한 모습으로 무언가 열심히 공부를 하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덥수룩한 머리에 면도는 어쩌다 가끔 하는지, 수염도 긴 편이었다. 칙칙한 색의 티셔츠와 츄리닝을 입고 있었고, 신발은 늘 실리퍼를 신어서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혜연과 마찬가지로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서 늘 공부를 하고 문제를 풀었다. 혜연은 그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자리에 가서 어떤 공부를 하는지 탐색했다. 혜연이 보니 행정법이나 행정학, 경제학 관련 책들이 놓여있었고, 이를 통해 남자는 행정고시를 준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책들은 본 혜연은, 남자를 따라서 행정고시를 준비해볼까 싶었지만, 애초에 뜻도 없었던 데다가 맨날 와서 이것저것 깨작거리던 사람이 본인처럼 행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는 걸 그 남자가 안다면, 왠지 혜연이 자길 놀린다고 생각해서 기분 나빠할 것 같았기에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부터 혜연의 눈에 그 남자가 계속 들어왔다. 며칠정도 그 남자를 관찰해 보니 그 남자는 항상 혜연이 도서관에 오는 시간과 비슷하게 도서관에 와서 앉아있었다. 혜연이 수업으로 인해 조금 늦게 도서관에 오는 날에도 늘 도서관이 열리는 시간에 와서 앉아있는 듯했다. 혜연은 집이 거리가 좀 있어서 늘 저녁 7시쯤에는 도서관을 나섰는데, 남자는 그 시간에도 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을 별로 자지 않거나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한 달 여가 지났을 무렵, 혜연은 도서관 휴게실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테이블에 앉아서 잠시 쉬고 있었다. 자판기에서 나오는 커피는 200원짜리 믹스커피임에도 꽤나 양이 많이 나와서 사방에 진하면서도 달달한 냄새를 풍겼기에 차마 열람실로 가져갈 수는 없어서 늘 휴게실에서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그날도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는데, 그 남자도 휴게실에 들어와 음료 자판기에서 캔음료를 하나 뽑았다. 남자는 뽑은 캔을 따서 한 모금을 들이켜고는 그대로 자판기에 기댄 상태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본 혜연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걸었다.

  "공부가 잘 안 되시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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