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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Mar 26. 2024

제6관 사랑 보험 - 5

  "아…. 네."

  혜연의 말에 남자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혜연은 남자를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부끄러운 듯 혜연의 시선을 피했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시던데, 어떤 거 공부하시는 거예요?"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려 하는 혜연과 달리 남자는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행정고시… 준비하고 있습니다."

  "와, 대단하세요. 그거 엄청 어렵지 않아요?"

  혜연의 계속되는 질문에 남자의 입술은 급속도로 말라 들어갔다. 남자는 더 대답하기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야 예의라고 생각했기에 있는 힘들 다 짜내어 대답했다.

  "어렵긴… 해요."

  "시험은 언제 보시는 거예요?"

  "1월에 원서 접수 시작해서… 최종합격까지 하게 되면 11월에 끝나요."

  "1년이나 걸려요? 그냥 한두 번 시험 보고 마는 게 아닌가 보네요."

  "시험은 2차까지만 보고 면접까지 통과해야 최종 합격인데…, 시험들이랑 면접 간에 간격이… 좀 많이 긴 편이라서 그래요."

   혜연은 더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여전히 남자는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이는지라 더 말을 걸진 않았다. 남자는 잠시 혜연의 말을 기다렸다가 혜연이 더 말을 걸지 않자, 대화가 끝난 것으로 알고 혜연에게 간단하게 목례를 한 다음 캔을 버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남자가 돌아간 뒤에도 혜연은 커피를 마시며 휴게실에 앉아있었다. 혜연은 그저 호기심에 말을 걸었을 뿐인데 생각보다 남자가 너무 숫기가 없어서 오히려 혜연이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이랑, 혹은 여자랑 말을 섞어본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인 듯했다. 혜연은 앞으로도 계속 마주치게 될 사람인데 본인이 괜한 짓을 한건 아닐까 하는 약간의 후회가 생겼다. 하지만 그 남자와 불편해진다 한들 딱히 해가 될 일도 없거니와, 자리정도는 옮기면 그만이었기에 후회는 금세 사라졌다.

  혜연이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남자는 여전히 자리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다만 전과 다르게 혜연이 자리로 돌아와 앉을 때 잠시 혜연을 힐끔거렸으나 이내 다시 공부에 집중했고, 혜연도 본인의 할 일에 집중했다.


  며칠 뒤, 혜연과 그 남자는 다시 휴게실에서 마주쳤다. 며칠 전 휴게실에서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 와 같은 시간인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남자는 혜연과 다르게 정해진 시간에 휴게실에 나와서 단 음료를 뽑아 마시는 게 습관인 듯했다.

  혜연은 다시 한번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이전에도 남자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던 것이 떠올라서 말을 걸기를 그만두었다. 대신에 커피를 마시며 머리를 비우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남자가 먼저 혜연에게 말을 걸었다.

  "천장에… 뭐가 있나요?"

  혜연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며 활기차게 말했다.

  "아뇨! 그냥 멍 때리고 있었어요!"

  "아…."

  "매일 이 시간에 음료수를 드시나 봐요?"

  그러지 않으려 했건만, 혜연은 본인도 모르게 또 남자에게 질문을 했다. 혜연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기에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남자는 이번에도 혜연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 단걸 좀 마셔줘야 머리가 돌아가서요."

  "그럼 커피가 낫지 않아요? 여기 커피 싸기도 엄청 싼데 달기도 엄청 달아서 당분에 카페인까지 한 번에 다 보충할 수 있거든요."

  남자는 혜연의 손에 든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수줍게 말했다.

  "제가… 커피를 못 마셔서요."

  "어머, 그래요?"

  "네."

  그렇게 둘의 대화는 다시 끊겼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혜연은 다시 커피를 마시며 허공을 응시했고, 남자는 잠시 혜연을 바라보고는 들고 있던 캔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남자는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휴게실을 나서려 했으나,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혜연을 바라보았다.

  "저기…"

  갑자기 남자가 말을 걸었고, 놀란 혜연은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

  "보통… 점심은 어떡하세요?"

  "점심이요?"

  혜연은 '음'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생각에 잠겼다.

  "보통은 학생회관에서 먹어요. 귀찮으면 편의점에서 먹거나 굶을 때도 있어요. 왜요?"

  남자의 의도를 알아챈 혜연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싱긋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귀가 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시면… 내일 점심 어떠세요…?"

  "좋아요."

  기대했던 대로인 남자의 말에 혜연은 즉각 대답했다.


  다음날 혜연과 남자는 학교 근처 밥집에서 만나 같이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면서 혜연과 남자는 꽤 많은 얘기를 나눴고 곧이어 카페로 옮겨 커피와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남자의 이름은 종석이라고 했다. 혜연과 동갑으로 현재는 휴학을 하고 행정고시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집안 사정이 그리 좋지는 않기에 자취를 하는 것을 부모님이 많이 부담스러워하시며 집으로 돌아와 준비를 하라고 했지만, 그랬다가는 왠지 금방 해이해질 것 같았기에, 한사코 자취를 고집하며 학교 근처에 남아서 생활 중이었다. 주말 이틀간의 단기 알바로 월세와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하고는 있지만, 당연히 넉넉하지는 않기 때문에 보통은 점심 한 끼만 편의점에서 적당히 때우고 중간에 음료수를 마시는 것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종석은 혜연에게 이미 시험에 한번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꼭 붙고 싶다고 했다. 만약 이번에도 안된다면 부모님을 뵐 낯도 없거니와, 집안 형편상 공부는 그만두고 돈을 벌어야 할 것 같다고. 그래서 아예 자는 시간 말고는 하루종일 공부를 하며 보내기 위해서라도 매일매일 도서관에 출석을 하는 중이라 했다.

  굳이 항상 혜연의 대각선 자리에 매일 앉는 이유를 물어보니, 구석진 자리라 볕도 덜 들고 조용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자리에 앉으면 근처 자리의 사람들이 자주 들락날락 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시끄러운 사람들이 와서 앉기도 하는데, 혜연처럼 늘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 주변 자리가 공부에 집중하기 더 좋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종석의 말에 혜연은 가벼운 호기심으로 말을 건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종석은 명확히 목표로 하는 바가 있고 이를 위해서 다른데 한눈도 팔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인데, 자신은 단지 전남자친구를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죽이는 사람인 것이 비교되어서였다. 그래서 왜 거의 매일 도서관에 와서 같은 자리에 앉냐는 종석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하지는 못하고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깝기도 하고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서 매일 도서관에 간다는 거짓말로 답해버렸다.

  혜연의 거짓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석은 웃으며,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혜연이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런 종석의 호의에 혜연은 오랜만에 마음이 누그러들었고 훈훈한 감정이 들었다. 그동안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들에 대해 전 남자친구에게는 소름 끼친다는 혹평만 들었던 터라 종석의 칭찬이 생각 이상으로 기쁘게 다가왔다.

  

  그날 이후로 혜연과 종석은 종종 같이 점심을 먹거나 휴게소에서 커피와 음료를 마시곤 했다. 종석의 형편을 잘 아는 혜연이었기에 종석에게 맞춰서 점심은 편의점에서 때우거나 가끔은 도시락을 사서 휴게소에서 먹곤 했다. 때로는 혜연이 점심을 제대로 사겠다고 말을 꺼내보기도 했지만, 종석은 그럴 경우 자신은 혜연에게 제대로 보답을 할 수가 없어서 만나기 불편해질 것이라며 한사코 거부했다. 혜연은 딱히 보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종석은 서로에게 좋을 게 없다고 좋은 말로 거절하며 가끔 음료 정도나 하나 뽑아달라고 말했다.

  혜연은 종석과 얘기하는 것이 점점 좋아졌고, 그래서 도서관에 가는 시간이 늘 기다려졌지만, 종석의 공부를 방해할 수는 없었기에 늘 짧게만 시간을 내어 대화를 했다. 조금은 애가 타긴 했지만 자신은 이제 성숙한 어른이니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며 스스로를 자제하곤 했다. 대신에 종석에게 했던 거짓말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직업이나 취미들에 관한 책들을 본격적으로 대로 읽기 시작했다. 덕분에 종석과 대화를 나눌 때, 그날그날 본인이 읽은 책과 찾은 정보들을 가지고 즐겁게 얘기할 수 있었고, 스스로가 매우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충족감도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연은 겨울방학을 맞게 되었다. 겨울방학을 맞게 된 혜연은 더 이상 학교 도서관에 올 필요까지는 없었다. 이미 동명을 잘 잊기도 했거니와 수업도 없기 때문에 공간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혜연은 도서관을 나올지 말지에 대해 고민을 했고, 그렇게 고민만 하다 방학이 고작 3일 남았을 무렵, 그날도 휴게실에서 종석과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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