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으로부터 한 달 뒤, 혜연은 동명과 사귀게 되었다. 전에 동명이 점심을 사준 그날부터 혜연과 동명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덕분에 혜연은 동아리를 더욱 자주 나갔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동명과 마주치거나 술자리를 가질 일이 많아졌고, 결국 둘만의 술자리를 가지게 된 날, 자연스레 손을 잡으며 사귀기 시작했다. 동아리에서 뿐만 아니라 학과 내에서도 인기가 많은 동명이었기에, 감히 사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혜연은 이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원래 낯가림이 많은 혜연은 친구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시간이 많았으나, 동명은 너무나도 인기가 많았고 그래서 계속 바빴다. 동명은 늘 저녁마다 여러 사람들과 약속이 있어서 평일 저녁 데이트는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점심을 먹는 정도만 가능했고, 주말도 잘해야 하루정도만 데이트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동명의 모습에 서운할 법도 했지만, 혜연은 그만큼 자기 남자친구가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그저 흐뭇하기만 할 뿐이었다.
가끔은 동명이 다른 여자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거나 단 둘이 밥을 먹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워낙 사람들과 만나는 걸 좋아하는 동명이기에 그런 소문은 그저 오해일 뿐일 거라 생각했다. 가끔은 그런 얘기를 전해주는 친구들에게 괜히 둘 사이를 이간질하지 말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혜연은 둘 사이를 질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만 생각할 뿐이었다.
콩깍지가 끼어도 제대로 낀 혜연은 때로 주책맞게 동명과 자신의 결혼, 그리고 둘을 쏙 빼닮은 아이를 낳는 것까지 상상하며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만큼 혜연은 동명에게 푹 빠진 상태였다.
그렇게 둘이 사귄 지 반년쯤 지났을 무렵, 동명이 군대에 가게 되었다. 혜연은 동명의 입대날에 훈련소까지 따라가겠다고 했으나, 동명은 가족들하고 갈 거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입대 전날 동명의 집 앞으로 찾아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고는 사두었던, 군대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전달하려 했다. 동명의 집 앞으로 가는 도중에 동명에게 전화를 하자 동명은 혜연에게 아파트 단지 근처의 놀이터에 가 있으라고 했다.
혜연은 버스에서 내려 동명의 집 근처 놀이터로 향하다가 다시 발길을 돌려 동명의 집으로 향했다. 동명의 집에서 놀이터로 가는 길은 외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명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렸다가 동명과 같이 놀이터로 향하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동명의 집 근처로 간 혜연은 놀이터로 향하는 길목의 풀숲에 숨어서 동명이 나오길 기다렸다. 10여 분 뒤 동명이 1층을 나서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동명의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도 같이 있었다. 그 여자는 동명에게 뭐라고 얘기를 하고는 동명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동명도 손을 뻗어 그 여자를 끌어안고 무언가 귓속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혜연은 너무 놀라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가슴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솟아올랐다. 동명을 누구에게도 절대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혜연이기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자제하기 위해서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고선 몸을 부들거리며 참아야 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싶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동명을 믿고 싶은 마음에 최대한 참으며 여자가 사라지길 기다렸다.
잠시 후, 둘은 서로 떨어졌고, 여자는 동명에게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동명도 손을 흔들며 여자를 배웅하고는 혜연이 기다리기로 했던 놀이터로 향하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이내 혜연의 휴대폰이 울렸고, 혜연은 전화를 받지 않은 상태로 곧장 뛰어나가 동명의 앞을 가로막았다.
혜연을 본 동명은 놀라 말했다.
"혜연아, 놀이터 가있으라니까 여기까지 왔어?"
혜연에게 동명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빠, 방금 그 여자 누구야?"
혜연은 본인 스스로 놀랄 정도로 앙칼지고 높은 톤의 목소리로 동명을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런 혜연의 모습에도 동명은 동요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혜연을 맞이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동명의 태연한 모습에 혜연은 더 화가 났다.
"여자? 아아 우리 사촌누나."
"사촌누나라고?"
"어, 나 내일 군대 가니까 큰엄마가 선물 주고 오라고 보냈대."
동명의 해명에도 혜연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혜연이 보기에 사촌 간의 포옹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원래 사촌누나랑 그렇게 포옹을 해?"
"원래 그러지 않아? 너희는 가족끼리 포옹 안 해?"
혜연은 여전히 둘 사이가 수상하게만 느껴졌으나,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는 등, 별다른 스킨십 없이 포옹만 한 것이기에 더 이상 둘 사이를 추궁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감이 있었다. 그래서 계속 의심이 풀리진 않았음에도 뭐라 더 말을 하지는 못했다.
"에이, 왜 그래 혜연아. 너 뭐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
혜연은 마음이 계쏙 찝찝하기는 했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고, 다음날 군대 가는 사람을 붙잡고 확실하지도 않은 걸로 다투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분이 풀린 척을 하고는 준비해 온 선물을 내밀었다.
"찾아보니까 이런 거 다 갖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준비해 왔어."
"고마워 혜연아. 안 그래도 나름 물건들 챙기고 있었는데 네가 다 챙겨줘서 이것만 들고 가도 되겠다."
동명의 활짝 웃는 모습에 혜연의 마음도 금세 누그러졌다.
"오빠 내일 몸 조심히 들어가고. 가서 꼭 편지 써. 나도 매일매일 게시판에 편지 올려놓을게."
"그래. 나도 편지 자주 쓸게."
혜연은 동명을 끌어안았다. 동명은 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혹시 못 기다리겠으면 기다리지 않아도 돼. 나는 괜찮으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혜연은 울음을 꾹 참았다. 혜연은 동명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잠시 후 혜연은 동명을 밀어내며 말했다.
"오빠 가뜩이나 피곤하고 심란할 테니까 얼른 들어가. 맘 같아서는 더 같이 있고 싶지만…."
"난 더 있어도 되는데?"
"아냐 얼른 들어가서 쉬어. 나도 바로 갈 거야."
혜연은 발길을 돌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동명은 그 자리에 서서 혜연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나 들어갈 때 너 수업 중일 테니까 메시지 남겨놓을게!"
"알았어!"
혜연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크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렇게 동명은 군대에 갔고, 혜연은 동명을 기다리게 되었다.
동명이 군대에 가 있는 일 년 반동안 혜연은 다른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듯이 공부에만 전념했다. 동명이 없는 동아리에는 가봐야 의미도 없었기에, 이름만 걸어두고 동아리활동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개강 총회와 종강 총회정도에만 얼굴을 비추었다. 종종 동아리 친구들이 미팅 같은 걸 제안하기도 했지만, 혜연은 자신에게는 동명이 있다며 한사코 거절을 하고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동명이 복학을 할 무렵에 혜연은 3학년 2학기일 것이기 때문에, 동명과 시간을 더 보내기 위해선 미리 성적을 높여놓고 취업 준비를 마쳐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라도 더더욱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그 와중에도 동명에게 편지를 쓰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동명이 훈련소에서 생활하는 처음 5주간은 홈페이지를 통해 매일매일 편지를 적어 보냈다. 길게 쓸 수만은 없는 데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눠준다고 들었기 때문에 짤막하게 그날의 일상과 동명에 대한 그리움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 동명도 훈련소에 있는 동안은 두 번이나 혜연에게 답장을 적어 보냈다. 마지막 한 통은 훈련 기간이 끝날 무렵에 보냈는지, 동명이 자대 배치를 받은 다음에야 받아볼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동명과 전화로 얘기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만큼 애틋하지는 않았다.
자대 배치를 받은 동명은 일과가 끝난 후에는 자유롭게 전화를 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유료기도 하거니와 가끔은 그 시간에 해야 할 일들이 나 훈련이 있기도 했기에 매일 통화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2~3일에 한번 정도, 길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통화를 했다. 혜연은 통화와는 별개로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동명이 자대배치를 받고 3주 뒤에는 직접 도시락을 싸들고 동명이 군복무를 하고 있는 창원으로 면회를 다녀왔다. 서울에서 창원까지는 다섯 시간이나 걸렸기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출발해야 했고, 동명과는 몇 시간 보내지도 못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야 했지만, 그럼에도 혜연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는 내내 오랜만에 동명을 볼 생각에 계속 신이 났었고, 반대로 돌아오는 길은 정말이지 발길이 너무 떨어지지 않았기에 버스 안에서 내내 눈물을 보이며 돌아와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매달 면회를 가고 싶었지만 너무 멀기도 하거니와 차비도 만만치 않았기에 동명은 혜연에게 면회를 올 필요는 없다고 일러두었다. 얼굴은 휴가 나가서 보면 충분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혜연은 더 이상 면회를 가지는 않는 대신 계속해서 과자나 생필품을 소포로 보내주었다.
석 달 뒤, 동명은 짧게 신병 휴가를 나왔다가 들어갔고, 다시 반년뒤에는 조금 길게 정기 휴가를 나왔다 들어갔다. 혜연은 휴가 때마다 계속해서 동명과 붙어있고 싶었지만, 동명도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고, 여전히 인기가 많아서 약속이 넘쳐났기에, 아쉬운 대로 적게는 하루, 길게는 이틀간 붙어있을 수 있는 게 다였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을 즈음, 혜연과 동명의 통화는 보통 일주일에 한 번, 길면 이, 삼주에 한번 정도로 빈도가 줄어있었다. 혜연은 여전히 일주일에 한통씩 편지를 적어 보냈지만, 동명은 딱히 답장을 하지 않았다. 혜연은 동명이 전화를 통해 '잘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동명이 자신의 편지를 잘 받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 남은 반년동안 전화통화는 보통 이, 삼주에 한 번으로 빈도가 줄었다. 여전히 혜연은 편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동명은 그에 대해 딱히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군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아서 곧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혜연은 그저 마음이 점점 들떠올 뿐이었다.
그렇게 동명이 전역했을 때, 혜연은 동명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준비를 잘 마친 상태였다. 학점은 4.5점 만점에 4.4를 유지하고 있었고, 토익은 990점 만점, 오픽은 IH등급을 받았으며 이미 하계인턴까지 마친, 완벽하게 취업 준비가 된 상태였다. 집과 학교를 왔다 갔다 하는 것 외에 다른 대외활동도 없었고, 친구들과도 많은 교류가 없었기에 학점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나머지 시간은 모두 동명에게 할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역 후 동명을 처음 만난 혜연은 기쁜 마음으로 동명에게 이제 같이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복학하는 동명을 잘 도와줄 수 있음을 어필했다. 하지만 동명에게서 돌아온 말은 뜻밖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