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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Mar 18. 2024

제5관 분쟁 조정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3호는 여전히 그 가운데 놓여있는 책상에서 컴퓨터로 서류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3호가 작업하는 화면을 같이 바라보며 서있는 1호가 있었다.

  "4호는 언제쯤 오려나."

  "금방 오지 않을까? 웬일로 4호를 기다려 누나?"

  3호는 4호를 기다리는 1호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니, 이번 보험금 지급은 좀 까다롭거든. 그래서 4호가 잘 해냈을지 해서."

  3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형도 누나도 요새 왜 이렇게 보험금 지급을 이상하게 하고 그래. 나야 뭐 서류처리만 하면 되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건 애들인데."

  "나라고 뭐 그러고 싶었겠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겠어. 계약자가 이상한 놈인걸."

  1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 모양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윽고 그 그림자는 1호와 3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큰 체구를 가지고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였다. 굵은 팔다리에 근육이 잔뜩 붙어있었다. 장발인 곱슬머리는 어깨 아래까지 축 내려와 있었고 체크무니 셔츠에 청색의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런 4호를 본 1호가 물었다.

  "언제까지 그런 아저씨 모습으로 있을 거야?"

  "당분간은?"

  4호가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4호의 목소리에 1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급은 잘 됐어?"

  "되기야 잘 됐지."

  "그럼 다행이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누나. 날 너무 험하게 부리는 거 아냐?"

  "미안해. 하지만 너 아니면 5호가 해야 하는데 5호는 2호 때문에 너무 바쁘니까."

  4호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무슨 지급 방법이 그래. 트럭으로 쳐서 다치게 해야 하는데 장애가 남을 정도로는 세게 쳐야 하지만 죽을 정도로 세게 치면 안 된다니.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한다고 해도 그 정도로 만능은 아니라고. 그리고 우리는 죽지 않기는 하지만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닌데."

  1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4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치만 그게 가장 알맞은 방법인걸 어떡하겠어. 고생 많았어 정말."

  1호와 4호의 대화를 들은 3호는 호기심이 동해서 관련 서류를 뒤져보았다. 서류를 본 3호가 물었다.

  "이 장명석이라는 사람 얘기인거지?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특약이 있네?"

  "맞아. 돈에 집착해서 특약을 걸어달라고 하더라고. 수전노 같으니."

  "그래서 이런 특약들을 걸어준 거야?"

  "응. 바보같이 지 무덤을 파더라고."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어?"

  1호는 화를 내며 말했다.

  "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나는 분명히 말렸다구."

  "우린 사람은 아니지."

  4호의 실없는 농담에 1호와 3호는 눈을 흘겼다. 둘의 시선에 4호는 황급히 입을 닫고 눈치를 보았다.

  "어쨌든 자꾸 자기가 원할 때 보험금을 지급해 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결국 그렇게 해줬지."

  "당연히 그 사람은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

  "그치. 알았다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진 않았을 거야."

  1호와 3호의 대화를 듣던 4호가 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길래 그런 거야? 그리고 왜 내가 트럭을 운전해서 갖다 박았어야 하는 건데?"

  1호가 4호를 돌아보았다.

  "자, 이 누나가 설명을 해줄게."

  "응."

  "저 장명석이라는 사람은 어리석게도 돈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계약을 할 때 기억을 잃지 않게 해 달라는 것과 보험금은 무조건 돈으로 지불해 달라는 것, 그리고 자기가 원할 때 보험금을 지급해 달라는 것을 특약으로 걸어달라고 했지."

  "에? 그래도 돼?"

  "안될 것 없지만 딱히 좋은 방법은 아니지. 하지만 그 사람은 내 경고에도 불구하고 꼭 그렇게 해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원할 때 보험금을 지급해 줬지."

  "그게 다야?"

  "하지만 그 사람이 간과한 게 있어. 내가 계속 보험금은 인생이 망해야 주는 거라고 했는데, 그걸 자꾸 흘려듣더라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다시 말하자면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일단 인생이 망해야 한다는 얘기야.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이 보험금 지급을 원할 때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해서 일단 그 사람의 인생을 완벽하게 망하게 해 줬지."

  "그 사람이 원한 건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아?"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지 뭐. 인간세상의 보험이라면 이런 애매모호한 약관은 분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우리는 인간세상에 속한 게 아니니까."

  "근데 그거랑 트럭으로 박는 건 무슨 상관이야?"

  그러자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3호가 의자를 돌려 4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건 내가 설명해 줄게. 일단은 우리가 인생이 망했는지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에 따라서 판단을 하잖아? 여기 서류를 보면 장명석이라는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순서대로 돈, 자존심, 자기 자신, 아들 순이거든. 그래서 일단은 가진 돈을 최대한 빼앗았고, 자존심을 짓밟기 위해 동업자에게 지분을 다 처분하게 하고 아내에게 이혼당하게 만들면서 겸사겸사 양육권도 빼앗기게 하는 걸 통해 아들도 빼앗은 거지. 그리고 음주 운전으로 사람을 치게 만들어서 남은 돈도 다 합의금과 보상금으로 사라지게 한 다음 마무리로 네가 트럭을 몰고 그 사람을 치게 해서 다리 하나를 뺏는 걸로 자기 자신도 엉망으로 만든 거야. 그리고 보험금은 장애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되게 한 거고.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보험을 이용해서 보험금을 지불했달까?"

  3호가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4호에게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근데 그러면 장명석의 차에 치인 사람들은 무슨 죄야?"

  "그 사람은 원래 치이는 거였을걸? 맞나 누나?"

  3호의 물음에 1호가 대답했다.

  "아냐. 원래 치이는 건 아니긴 해. 하지만 원래도 여고생은 죽고 대학생은 혼수상태가 될 운명이었어. 여고생은 심장마비로 대학생은 뇌출혈로. 그걸 이번 보험금 지급에 끼워넣기 위해 바꾼 거야."

  "이러나저러나 죽고, 혼수상태가 될 운명이었던 건가. 안타까운걸."

  1호의 얘기에 4호는 매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슬퍼할 새도 없이 4호에게는 다음 일들이 남아있었기에 다시 돌아가봐야 했다.

  "이제 나는 슬슬 다시 가봐야겠어. 요새 점점 보험금 지불이 늘어나는 것 같단 말이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맞아. 요새 계약자가 많이 늘었지. 지급 대상도 많이 늘었고. 조금만 더 수고해 줘."

  1호는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며 4호를 배웅했다. 잠시 후 4호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4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3호가 말했다.

  "근데 누나, 생각해 보니까 장명석 그 사람한테 보험금 지급하는 게 너무 늦지 않았어? 장애에 대한 보험금이 나온 건 사고 몇 달 뒤던데."

  "어쨌든 2주 내에 인생을 망하게 했고 장애를 만들어줬으니까 된 거 아냐? 그 장애 덕분에 보험금 받았잖아?"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2주 만에 인생을 망하게 하는 것만도 얼마나 고생이었는 줄 알아? 그 정도면 빨리 준거라고."

  "아니 그냥 복권 당첨금으로 주는 방법도 있었잖아. 이게 제일 쉽고 빠른데 왜…"

  "그럼 역시나 자신은 행운아라며 자신감에 차서 다시 자존심을 세웠을 거야. 그럼 인생이 망한 게 아니게 되잖아. 그리고 그렇게 행운에 따른 돈을 주면 교훈을 줄 수 없잖아?"

  "우리가 뭐라고 교훈을 주니 마니 해."

  1호는 3호의 볼을 꼬집었다.

  "내 맘이다 왜."

  "흐즈므."

  "하여튼 동생들이라고는 귀여운 애들은 없고 죄다 말대답하는 애들 뿐이라니까. 왜 죄다 동생들은 남자뿐이야. 여동생 갖고 싶은데."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좀 상냥한 누나를 갖고 싶네."

  "짜식이."

  1호는 3호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그리곤 몸을 돌려 처음 왔던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1호의 등 뒤로 3호가 외쳤다.

  "근데, 누나. 장명석 그 사람 숨겨진 조건에 안 맞지 않아? 어떻게 가입이 된 거야?"

  1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으며 말했다.

  "그 사람 아들, 자기애가 아냐."

  "어?"

  "아내가 바람 펴서 낳은 자식이야.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그 말을 마지막으로 1호가 사라졌다. 다시 혼자 남겨진 3호가 중얼거렸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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