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입니다)
'죽어야겠다'
아침에 샤워를 하던 도중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더 살아봐야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뭔가 내 삶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럭저럭 일반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지금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느꼈다.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었다. 끼니를 제때 챙기지도 못하거나 빚에 허덕이거나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거나 연인과 헤어졌거나 하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정말 더할 나위 없는 평온한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사람마다 각자의 힘듦이 다르고 누구나 다 자기가 제일 힘든 것인 것처럼 나도 그들의 힘듦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역시나 내가 제일 힘들다고 느낄 뿐이었다. 별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내 삶은 이렇게 아무 변화 없이 무미건조하게 집과 회사를 오가는 삶을 살다가 은퇴 후 방구석에서 조용히 죽어가는 식으로 흘러갈 것처럼 보였다. 그렇기에 굳이 더 이상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 죽어도 딱히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다 마치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고 옷장으로 향했다. 문득 오늘 죽기로 결심을 했으니 결국 오늘은 내 삶의 마지막 날인 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그런 날에는 당연히 제일 좋은 옷을 꺼내 입는 게 맞지 않나도 싶었다. 그래서 다리미를 콘센트에 꽂고 셔츠를 꺼내 다림질을 했다. 조금 귀찮기도 했지만 영화 신세계에서 악당인 중구가 죽기 직전에 '갈 때 가더라도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잖아?'라고 한 것처럼 나도 '갈 땐 가더라도 곱게 차려입고 가는 게 괜찮잖아?'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다림질을 말끔하게 끝낸 셔츠를 입고 머리를 매만졌다. 만약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은 아마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잠깐은 날 떠올릴 텐데, 그때 사람들이 '걔는 결혼도 못하고 혼자 꾀죄죄하게 살더니 결국 그렇게 갔네'라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니, 걔는 누가 봐도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가고 싶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머리를 매만졌다.
요 며칠간은 변덕스러운 봄 날씨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잦은 소나기가 내렸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말이 무색할 만큼 구름 하나 없는 청량한 하늘이 보이는 날이었다. 삶을 마감하기에는 누가 봐도 딱 좋은 그런 날이었다. 집을 나서 아파트 정문을 지나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길에는 큰 가로수들이 줄줄이 심어져 있었다. 매일같이 지나가던 길이었지만 오늘따라 더 시원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아주 예전에 심어진 나무들이라 그런가 길 옆 아파트 단지들의 일조권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큰 잎을 가진 가로수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무로 된 터널을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오늘도 만원인 지하철을 타고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평소 같으면 바로 유튜브를 보며 출근을 했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죽을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흔히들 많이 선택하는 방법인 목을 매는 것과 번개탄을 통한 일산화탄소 중독 중, 어떤 게 더 괜찮을지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이왕이면 최대한 고통이 없이 가는 것이 나을 테니까.
찾아보니 둘 다 고통은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목을 매는 것은 혈류를 압박해서 뇌로 가는 산소 공급을 막는 것인지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20여분이 걸린다고 나왔고, 번개탄을 피우는 방법으로는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고통스럽다고 나왔다. 결국 가능하다면 약물 같은 게 제일 좋겠지만, 일반인인 나로서는 그 방법은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은 어떤 방법으로 죽을지 결정을 하지 못한 채 회사에 다다랐다.
사무실로 올라가니 사무실이 뭔가 소란스러웠다. 선배 몇 명과 후배 몇 명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일단은 자리로 가서 PC를 켜고 앉았다. 그러자 옆자리 후배가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선배, 명훈이 아무래도 사고 친 것 같아요."
"명훈이가 왜?"
명훈이는 내 뒷자리에 앉아있는 후배로, 근무한 지 이제 겨우 만 2년이 다 되어가는 막내였다. 그러다 보니 업무에 능숙하지 못해서 사고를 치는 게 일상다반사였기에, 어지간한 사고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먼저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보니 꽤나 큰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어젯밤에 술 먹고 새벽에 우리 거래처인 XX철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나 봐요."
"새벽에? 전화해서 뭐라 했대?"
"너무 취해서 별 말은 안 하고 횡설수설하다 끊은 모양인데, 새벽 2시에 전화를 걸었던 거더라고요."
"어유 그걸 그 사람이 받은 것도 용하네. 그래서 그쪽에서 연락 왔어?"
"아뇨, 그건 아닌데, 명훈이가 아침에 눈 뜨니까 그게 기억이 났나 봐요. 그래서 출근하자마자 어떻게 해야 하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다들 지금 수군거리고 있는 거예요."
전후사정을 들어보니 나름 사고를 거하게 친 셈이었다. 늘 그렇듯 명훈이 사고의 뒷수습은 암묵적으로 내 몫이었기에 이번에도 오지랖을 부리러 명훈이가 있는 탕비실로 향했다.
명훈이는 얼굴이 사색이 된 상태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다 곧 나를 보고는 내 쪽으로 황급히 다가와 물었다.
"선배님, 혹시 얘기 들으셨나요? 저 어떡하죠?"
명훈이의 얘기에 나는 씩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전화해서 사과해야지."
"사과로 될까요? 거기서 거래 끊겠다고 하면 저 회사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럼 애초에 사고를 치지 마 인마."
늘 명훈이의 사고를 뒷수습하느라 거의 질려버렸지만, 이왕 오늘은 마지막 날이고 하니 한 번만 더 뒤를 봐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오늘까지는 내가 도와주지만 이제 내일부터는 자기 혼자 알아서 해야 할 텐데 내일부터는 어떻게 하려나 하는 걱정이 조금 들긴 했다.
"내가 전화하고 나서 너 바꿔줄 테니까 똑바로 사과해라."
"네, 넵!"
휴대폰을 꺼내 들어 XX철강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은 금세 전화를 받았다.
"어이구, 박대리님~ 어인일로 전화를 다 주셨어??"
"아이고, 정사장님 오랜만에 전화드렸습니다. 별일 없으시죠??"
"어, 그렇지. 나는 별일 없지. 그래 오늘은 어쩐 일로?"
명훈이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저희 막내가 어제저녁에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들었습니다."
"아냐 아냐, 뭐 큰 실수라고 할만한 게 있나. 허허"
"아뇨, 큰 실수죠. 밤늦게 죄송합니다. 지도 지가 잘못한 건 아는지 오늘 자진신고 하더라고요. 아주 큰 잘못을 했다고. 왜 그랬냐 물어보니까 정사장님한테 서운한 게 좀 있었나 봐요."
"서운한 거? 서운할게 뭐가 있대."
"사장님 뵌 지도 오래되었는데, 자꾸 언제 한잔하자 말만 하시고 얼굴을 통 비추질 않으시니까 얘가 좀 서운했나 봐요. 아시다시피 우리 명훈이가 사장님 되게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어제 술 먹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울컥했나 봅니다."
"그래? 그럼 내가 잘못했네 그래."
"옆에 명훈이 있으니까, 잠깐 전화 바꾸겠습니다."
명훈이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내 휴대폰을 받아서 귀에 갖다 댔다. 그리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사,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김명훈 사원입니다. 제가 어젯밤에 큰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명훈이의 인사를 들은 정사장이 무언가 길게 얘기하는 듯 명훈이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네, 사장님. 저는 가능합니다. 예, 예. 그럼 수요일에 뵙겠습니다. 예, 들어가십시오!"
그렇게 통화는 마무리되었고, 명훈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술 안 사줘서 서운하다니까 술 한번 사주러 수요일에 오겠답니다. 휴."
명훈이에게 휴대폰을 받아 들면서 말했다.
"잘 좀 해라 인마. 수요일에는 실수하지 말고."
"걱정 마세요!"
그렇게 뒷수습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아서 오늘 할 일들을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그제야 문득 오늘 죽기로 했던 것이 떠올랐다. 이제 곧 죽을 놈이 오늘 일을 열심히 더 한들 뭐가 바뀔까 싶었다. 혹시나 오늘 하지 않으면 동료 선후배들에게 폐가 될법한 일이 있을까 싶어 확인해 보니 대부분의 일들은 일정에 여유가 있었고, 중요한 부분은 이미 다 끝난 상태였다. 그러니 오늘은 일을 하기보다는 어떻게 죽을지 생각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아까 출근길에 찾은 방법들보다는 그래도 좀 덜 고통스럽고 괜찮은 방법이 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방법이 인터넷에 퍼지면 따라서할 사람들이 많으니까 나라에서 뭔가 검열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작성하려던 문서들을 닫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켜는 찰나, 회사 메신저가 깜빡거렸다. 부서 동기인 상호였다. 좀 이따 점심시간에 뭘 먹을지 정하자는 내용이었다. 상호의 메시지를 보고 시계를 보니 시간은 어느덧 11시 즈음이었다. 점심시간은 11시 20분부터였지만 그 시간에 엘리베이터를 타면 사람들이 붐벼서 꽤나 늦게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고, 점심을 먹으러 가서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기에 우리는 보통 11시 10분에 출발했기 때문에 지금 점심 메뉴를 생각해두어야만 했다.
순간 죽는 마당에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가 마음이 조금 바뀌었다. 전에 미국에서는 사형수들을 사형시키기 전에 최후의 만찬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최대한 구해다가 먹게 해 준다는 것을 본 게 떠올랐다. 나도 오늘 죽는다면 이왕이면 밥 정도는 내가 먹고 싶은 맛있는 걸로 먹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점심에 어마어마한 만찬을 먹는 건 쉽지는 않을 테니, 적당한 선에서 합의를 본 메뉴가 바로 스시 오마카세였다.
상호는 이렇게 비싼 걸 먹자 하는 걸 보니 무슨 좋은 일이 있냐며 물었지만, 그냥 갑자기 먹고 싶어 졌다는 핑계를 대며 억지로 끌고 갔다. 딱히 죽음에 대해 언급해서 즐거운 점심시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기에 별 시답잖은 얘기로 잡담을 하며 식사를 했다. 주식이나 부동산, 요즘 대세인 걸그룹들 중 누가 최고인지. 그렇게 1시간 30여분의 식사를 끝내고 나오면서 계산은 내가 다 했다. 상호는 뭘 부담스럽게 이리 비싼 걸 사주냐며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내겠다고 했지만, 그런 상호를 말리고 구태여 내가 다 지불을 했다. 어차피 곧 죽는 마당인지라 나에게 돈 같은 건 큰 의미가 없으니, 가는 길에 이 정도 베푸는 게 뭐 어떻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하나 사서 자리에 들어오니, 팀장님에게 호출이 왔다. 팀장님 자리로 가니 팀장님이 완전 울상을 짓고 계셨다.
"무슨 일이세요?"
"어 박대리. 여기 이거 사진 좀 봐봐."
팀장님이 모니터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생산 예정인 부품 샘플의 사진이 보였다.
"신제품 샘플이네요?"
"어, 근데 지금 사진으로 보니까 뭔가 크기가 이상해. 분명히 이거 3.5cm로 만들도록 했는데, 지금 사진에 보이는 사람 손이랑 비교해 보면 못해도 6에서 7cm 정도는 되어 보여."
내가 봐도 팀장님의 말이 일리 있어 보였다. 그리고 공장에서는 우리가 넣은 주문과는 다르게 부품을 생산하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거 아무래도 박대리가 직접 가서 한번 확인 좀 하고 와야 할 것 같아."
어차피 오늘은 죽을 예정 말고는 더 이상 일정이 없으니 오후는 공장에 가서 부품 크기만 제대로 확인하고 퇴근하면 딱 좋을 것 같았다. 회사의 손해를 막는 일을 끝으로 회사와 이별하는 게 썩 나쁘지 않은 그림이 될 것 같았다.
"네 그럼 제가 가서 좀 볼게요."
"그래, 어차피 거기까지 갔다 오면 5시니까 사무실 들를 것 없이 거기서 바로 퇴근해. 사이즈 안 맞으면 다시 만들라고 하고."
"네."
그렇게 자리로 돌아와서 PC를 끄고 자리를 정리하면서 외근 나갈 준비를 했다. 바로 나가려다가 문득 이제 내일부터는 오지 않을 곳이니까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나가서 사람 수대로 커피를 사 왔다. 커피를 사람들 자리에 하나씩 놔두며 날도 더운데 커피 한 잔 마시고 기운 내라고 얘기를 했다. 이만하면 작별인사치고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회사를 나서서 파주에 있는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에 도착하니 나를 본 공장장의 표정이 바로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공장에 직접 방문할 때는 대부분 좋지 않은 일이 발생했을 때니, 그의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환영받지 못할 건 뻔히 알았지만, 오늘은 그래도 인생의 마지막 날이니만큼 좋은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음 박대리가 여긴 어쩐 일로?"
"아, 별거 아니고요 이번에 새로 나오는 부품 샘플 좀 직접 확인하려고요."
그러자 공장장이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본사의 또 어떤 분이 마음에 안 드신대?"
"에이, 그런 건 아니고, 내일부터 생산 들어가니까 저보고 직접 보고 오라고 보내신 거죠."
"윤팀장이네. 윤팀장이 보냈어. 아이고. 시어머니가 또 납셨네."
"에이 시어머니라뇨. 샘플만 슬쩍 보고 후딱 돌아가겠습니다."
그러자 공장장은 손가락으로 공장에 딸린 사무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내 책상 위에 샘플은 있을 테니까 가서 봐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고."
공장장에게 웃어 보이며 공장에 딸린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내 가장 안쪽에 있는 책상 위에 사진으로 봤던 부품 샘플이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 손으로 집어 들자 자로 잴 것도 없이 크기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한숨을 푹 쉬면서 사무실밖으로 샘플을 들고나가 공장장을 찾았다. 공장 끝에서 직원들과 모여있는 공장장을 발견하고 발길을 옮겼다. 멀리서 샘플을 손에 들고 오는 나를 보더니 공장장이 저리 가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아, 왜, 또 뭔데! 또 뭐가 문젠데! 어휴, 그냥 가 쫌!"
공장장이 호통을 치거나 말거나 가까이 가서 말했다.
"이거, 사이즈가 잘못 나왔네요. 3.5cm로 나와야 하는데 딱 그 두 배만큼 나온 것 같은데."
"사이즈가? 아니 그럴 리가. 이거 내일부터 생산 들어가는데 사이즈가 잘못 나왔다 그러면 큰일이야. 이거 누구 담당이지? 형식아, 이거 네가 담당 아니냐?"
그러자 공장장에게서 뒤를 돌리고 잡담을 하고 있던 키 큰 사원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와서 나에게 물었다.
"뭐, 잘못됐나요?"
"이거 사이즈가 잘못 됐어요. 주문서 한번 확인해줘 볼래요?"
"전 맞게 했는데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큰소리로 말을 하며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공장에 올 때 이런 일은 너무나 부지기수였기에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말을 했다.
"주문서 한번 보자니까요?"
"내가 맞게 했다는데 왜요?"
"그러니까 보자니까요? 본인이 맞게 했는데 물건이 이러면 주문서가 잘못되어 있을 거 아녜요? 그럼 어디서 주문이 잘못 들어갔는지 나도 찾아야지?"
그러자 심각해진 분위기를 읽은 공장장이 끼어들어서 둘 사이를 중재했다.
"자, 자, 주문서는 내가 찾아다 줄 테니까 박대리는 나랑 같이 사무실로 잠깐 가고, 형식이는 일 하고 있어. 얼른."
그렇게 공장장은 나와 같이 사무실로 향했다. 공장장 입장에서야 갑자기 끼어들어서 열심히 일하는 자기네 애들에게 뭐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을 법도 했지만, 전에도 종종 이런 실수들이 일어난 적이 있어서인지, 본인이 확인하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대처하려는 듯했다.
공장장은 사무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PC내의 주문서를 찾기 시작했다. IT기기에 익숙지 않은지 더듬더듬 거리며 헤매는 것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대신 자리에 앉아서 시스템에서 주문서를 찾아내었다. 그리고 역시나 주문서에는 3.5cm로 맞게 기입이 되어있었다.
"형식이가 그런 애가 아닌데, 딴 거랑 헷갈렸나 봐."
공장장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람이다 보니까 실수는 할 수도 있죠. 실수한 건 만회하면 되고. 근데 내일부터 생산인데 이걸 어떡하죠? 일정을 지연해야 한다고 할까요?"
그러자 공장장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냐, 아냐, 이 정도면 우리가 다 달려들어서 고치면 아마 되긴 할 거야. 야근은 좀 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그러자 갑자기 부하직원의 실수를 만회해야 하는 공장장의 입장이 조금은 안쓰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공장장이 이쪽의 총책임자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에 험한 소리를 듣고 가는 건 좀 아니다 싶어서 다른 안을 제시했다.
"야근해서 되는 정도면 내일 점심때까지는 수정 가능한 거 아니에요?"
"그야, 그런데 일일 생산량은 맞춰야 하잖아."
"그럼 그냥 내일 점심때까지 하시고 모자란 생산량은 모레부터의 생산량을 조금씩 늘려서 맞추면 되지 않을까요?"
"그럼 가능은 할 것 같은데, 본사에는 뭐라고 하려고?"
"실수한 건 실수한 건데 어쨌든 월말 생산까지는 지장 없다고 하면 되죠. 굳이 일일 생산량을 맞추고 못 맞추고 보고할 필요까진 없잖아요."
"그래, 그럼 우리야 좋지."
공장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는 공장장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얘기했다.
"좋은 게 좋은 거죠. 제가 우리 공장장님 믿으니까요."
그렇게 일은 잘 마무리가 됐다. 아무도 다치는 사람 없이 원만하게 끝났다는 사실에 조금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에 앉아 시동을 걸면서 이제는 어떻게 죽을지만 확정하고 바로 실행에 옮기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집까지는 차로 약 1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였기에 생각할 시간은 충분해 보였다. 정신이 산만해질 테니 라디오는 끄고 운전하며 생각하기 시작했다.
목을 매서 고통 없이 가려면 사형수들처럼 한방에 목이 부러질 정도의 충격이 가해져야 한다는데, 일반 가정집에서 그 정도의 높이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옥상에 올라가서 투신자살을 하는 것은 겁이 많은 내 성격상 아예 불가능해 보였다. 심지어 제대로 떨어지지 않으면 몇 초간 지옥 같은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것을 보고는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결국 번개탄으로 마음을 굳혔다. 아까 찾아보니 완전 밀폐된 좁은 공간에서와 달리 넓은 공간에서 조금씩 일산화탄소의 농도가 오르면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의식을 잃어서 평온하게 갈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집 근처 마트에 들러서 번개탄과 술을, 약국에 들러서 수면제를 사면 딱 될 것 같았다. 욕조 안에 그릇을 넣고 불 피운 번개탄을 그릇 위에 올린 다음 물을 조금씩 틀어놓으면, 결국에는 욕조 물이 넘칠 때 번개탄도 화장실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고 넘친 물로 인해 번개탄 불은 곧 꺼질 테니 딱 나만 죽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불을 피우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휴대폰이 울렸다. 친구 승환이었다.
"어, 뭐 하냐?"
"일 끝나고 집에 가고 있지."
그러자 승환이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잘됐다. 나도 지금 끝나서 퇴근 중인데, 너네 동네에서 한 잔 하자."
"갑자기? 너 왜 이렇게 일찍 끝났어?"
"아니 오늘 오후에 일 있어서 반차를 냈었거든. 근데 일이 일찍 끝났어. 그러니까 한잔 하자. 나 너네 동네까지 한 20분 정도 걸릴 것 같아. 넌 얼마나 걸려?"
"난 한… 15분 정도?"
"야, 그럼 딱 됐다.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차 대고 전화할 테니까 내려와."
그 말이 끝나자마자 전화가 끊겼다.
원래는 거절했어야 맞겠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연락이라 당황해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승환이에게도 작별인사를 하는 셈 치고 저녁만 조금 먹고 들어와서 죽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환이랑 저녁을 먹으면 유서를 쓸 시간이 조금 애매해지긴 하겠지만, 어차피 내일부터는 출근할 일도 없을 테니 유서 정도는 밤을 새워서 써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잠시 후 집에 도착해서 잠깐 옷을 갈아입었더니 곧바로 승환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바로 나가서 승환이와 집 근처 가게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승환이는 많이 들뜬 모습이었다. 저녁만 간단하게 먹이고 집에 돌려보낼 예정이었는데, 구태여 술을 한잔 하자고 졸라대는 바람에 결국 소주를 한 병 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뒤에 죽을 일정이 있기 때문에 소주를 최대한 꺾어 마셨고, 승환이는 컨디션이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인지 소주 서너 잔을 연달이 들이켜고는 취한 모습을 보였다.
"야, 아까 내가 반차내고 일 보고 오는 길에 뭘 봤는 줄 아냐?"
"뭔데?"
"아니 그 근처에 나름 경치 괜찮은 곳에 엄청 큰 카페가 있는 거야. 그래서 지나가는 길에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갈까 싶어서 잠깐 들어가 봤거든? 야~ 근데 자리가 하나도 없는 거야. 다들 뭐 하는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평일 오후에 유유자적하게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있더라. 심지어 주차장에는 외제차로 가득 차있더라고. 다들 어디서 그렇게 돈을 버는지."
분하다는 듯이 말하는 승환이의 모습에 내 마음도 같이 착잡해졌다. 나도 이렇게 살아봐야 역시나 월급쟁이일 뿐이고 앞으로도 그저 적당히 살아갈 뿐, 그들 같은 호사를 누리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죽기로 한 내 결심은 딱히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표정을 본 승환이가 말했다.
"야, 내가 괜한 얘기를 했다. 인상 좀 피고 술이나 먹자. 우리도 이렇게 일 일찍 끝내고 맛있는 거 먹으면서 술잔 기울일 수 있는 거 보면 나쁜 인생은 아냐. 그만 좀 찔끔찔끔 먹고 시원하게 좀 마셔 인마."
승환이의 얘기에 나도 모르게 술잔으로 손이 갔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난 뒤 술에 많이 취한 승환이를 보내고 집으로 향했다. 시간도 꽤 늦었고 술도 생각보다 많이 마시는 바람에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당연히 마트도, 약국도 들르지 못한 상태였고 유서 따위를 쓸 정신도 아니었다. 속도 울렁거리고 눈꺼풀도 자꾸 감겨와서 빨리 눕고만 싶었다.
그렇게 우당탕 집에 들어가서 대충 몸을 씻고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오늘 아침부터 죽기로 결심했는데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조금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술기운에 아무렴 어떠냐 하는 생각기 들었다. 밀려드는 피로에 더 이상 저항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힘을 내어 잠시 눈을 떠보았지만 그저 천장이 빙빙 돌 뿐이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서 눈을 감고 몸의 힘을 풀었다. 그러자 점점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아, 죽고 싶다. 내일은 꼭 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