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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레몬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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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호 Sep 18. 2023

신도림 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1)

  그저 그런 일요일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이른 점심을 챙겼다. 옛날 광고를 떠올리며 일요일이니까 짜파게티라도 먹어볼까 하는 마음에 냄비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점심을 먹으면서 볼 유튜브를 골랐다. 요즘에는 과학 유튜브에 꽂혀있어서 과학 유튜브를 볼까 하다가 그래도 밥을 먹으면서 보기에는 가볍게 보기 좋은 게 나을 것 같아서 스케치 코미디 채널을 골랐다.

  어느덧 물이 끓어 면을 넣고 삶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밥 먹으면서 보려던 채널에 내가 아직 보지 않은 최근영상이 3개나 있었다. 기쁨을 느끼며 면이 끓는 동안 영상을 하나 틀었다. 혼자 집에서 보는 것이라, 얼굴에는 조금의 미소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적으로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영상을 보았다. 그렇게 라면이 다 끓은 뒤에는 냄비 채로 들고 식탁에 앉았다. 냄비 건너편에 휴대폰을 세워두고 유튜브를 계속 보면서 라면을 먹었다.

  영상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면은 고작 3분 사이에 전부 사라져 버렸다. 급격한 포만감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다 먹은 자리를 정리하는 게 귀찮게만 느껴졌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유튜브만 감상했다. 그렇게 영상들이 다 끝나고 나서야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냄비를 싱크대에 넣었다. 바로 설거지를 해야 했지만 유독 귀찮게만 느껴졌다. 그냥 수도꼭지를 틀어 나중에 설거지가 잘 되도록 냄비에 물을 담는 것까지만 하고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 마저 유튜브를 볼까 했지만 그럴만한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는 새에 깜빡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시간은 어느덧 오후 4시였다. 곧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고, 저녁 먹고 이것저것 집안일을 좀 하다 보면 주말이 끝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불이 켜지지 않은 방안에 아련하게 노을이 비치고 있었기에 괜히 울적하고 서글픈 기분이 들어 그대로 누워만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혼자 나와 산지 어느덧 5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무엇이 바뀌었을까.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안 한 지 꽤 오래되었다. 친한 친구들은 각자의 삶에 충실하게 지내느라 어느샌가 멀어져 버렸다. 회사에서 승진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단지 업무량이 전보다 조금 늘었을 뿐. 최근 몇 년간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교류할 일도 없었다. 그저 회사사람들과 술을 마시면서 하루하루 뱃살이 늘었을 뿐. 그렇다고 꽤 괜찮은 취미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한때는 영화 블루레이를 수집했지만, 이마저도 OTT의 등장과 함께 그만두게 되었다. 이것저것 사모으는 취미는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살 때의 즐거움뿐, 그 수집품들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 물건들이 나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잡동사니로 변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는 있지만, 나에게 운동은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요소일 뿐, 운동에서 재미를 느끼거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 본 일은 없었다.

   내 삶은 엊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기만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새어 나왔다. 어릴 때는 나름 큰 꿈을 갖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을 능가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다는. 그러나 그 꿈은 이내 단순한 물리학자로 내려갔고 나중에는 선생님으로 바뀌었다가 결국에는 그냥 회사원으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아직 막 입사했을 당시에는 열정과 희망이 있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하지만 그 열정과 희망이 꺾이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고 그렇게 어느덧 회사를 14년째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삶에서 어떤식으로든 변화가 생긴다면 병에 걸린다던지 회사에서 쫓겨나던지 하는 좋지 않은 변화만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운이 좋다면 정년까지는 다니겠지만, 정년 이후의 삶이 얼마나 비참할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상태 그대로 생각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라는 만화 시리즈 2부의 최종 보스처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었다. 제발 이 생각을 멈추고 싶다고 스스로를 되뇌다 나도 모르게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우렁차게 울리는 휴대폰 알람에 눈을 떠보니 어느덧 월요일 아침 6시 30분이었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알람을 끄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꺼내 입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역으로 향하는 도중에 평소처럼 음악을 들으러 어플을 켰다. 그런데 어플 메인화면에 새로 출시된 서비스를 소개하는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내가 듣던 음악들을 분석하여 나에게 맞는 음악들을 계속해서 재생해 준다는 서비스였다. 그런 서비스가 추천해 주는 노래가 과연 내 취향과 얼마나 일치할까 생각하며 평소처럼 내 플레이리스트를 켜려다, 무슨 변덕이 들어서인지 그 서비스를 써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서비스에서 재생해 주는 노래는 딱 역에 도착할 때까지만 들어보기로 했다. 그때까지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이 서비스를 쓰지 않는 걸로.

  처음에는 최근에 내가 들은 노래의 가수들의 다른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마크툽이나 멜로망스, 백아연의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새로운 가수는 추천해주지 않나 싶을 무렵 카더가든의 노래가 나왔다. 그렇게 재생해 주는 노래를 듣기도 하고 몇몇 곡들은 넘기다 보니 어느샌가 1990년대 노래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최근에 리메이크 곡들이 많이 발표가 되어서, 원곡인 90년대 곡들을 많이 찾아들었기 때문인지, 어플은 계속해서 나에게 90년대 노래를 추천해 주었다. 그게 또 썩 나쁘진 않아서 하나 둘 들으며 길을 걷는데, 문득 자우림의 '일탈'이라는 곡이 나왔다.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하루~ 지루해 난 하품이나 해~'

  '뭐 화끈한 일 뭐 신나는 일 없을까! '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을~ 아파트 옥상에서 번지점프를~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 쇼를~'


  노래니까 이렇게 쉽게 얘기를 하나 싶었다. 할 일이 쌓였을 때 훌쩍 여행이라니. 직장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말을 못 할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나만 해도 오늘 출근해서 해야 할 일들이 너무 산더미였다. 그런 상황에서 훌쩍 여행을 간다니 그건 정말로 미친 짓이 아닌가. 



  시간이 좀 지나 다음 노래로 넘어갔고, 나는 어느새 지하철 역 안에 들어서서 열차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계속해서 귀에는 추천 노래들이 들려왔지만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자우림의 노래처럼 오늘 만큼은 일탈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아직까지는 뼛속까지 노예근성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말도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날 용기는 없었다. 머릿속으로 오늘 할 일들이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내 연차가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오늘 할 일들이 많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모두 오늘 내로 끝내야 하는 일들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 연차는 많이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도 못썼으니까. 10월을 넘어서 11월을 넘어가는 이 시점까지. 그래서 이 정도면 일탈 아닌 일탈을 한번 해봐도 되겠다는 계산이 섰다. 그래서 바로 팀장님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개인적인 용무가 생겨서 오늘은 쉬겠습니다.'

  그러자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 메시지를 본 팀장은 아마도 나에게 바로 전화를 걸 것이 분명했다. 어디가 아프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긴 것이 아닌지 물어보려고. 거기다 대고 그냥 오늘은 가기 싫어서 안 간다고 하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은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이 좋지 않다고 거짓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분명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 나중에 출근해서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 구체적인 거짓말을 추가로 해야 할 것이기에.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휴대폰을 수면모드로 바꿔버렸다. 전화가 오건 말건 신경 쓰지 않기 위해서.

  그러자 갑자기 사람들로 가득 차 갑갑했던 출근길 지하철이 탁 트인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출근을 하는 것이지만 이제 나는 여행을 가는 것으로 바뀌었기에. 이제 여행지를 정해야 했다. 즉석에서. 오늘은 쉬겠다고 했으니 어디든 당일치기로 다녀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큰 성인에 돈도 있겠다 못 갈 데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바다에 가고 싶어 졌다. 어릴 때 만화를 많이 본 영향인지 아니면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자유라고 하면 늘 바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지금 날씨에 바다를 가면 사람도 없고 춥고 황량한 풍경뿐이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느낌이 날 것 같았다. 마치 이별 여행을 온 사람처럼 쓸쓸함도 느끼고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로 여행지를 동해바다로 정했다. 그리고 동해하면 가장만만한, 속초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휴대폰을 들어 속초로 갈 방법을 검색했다. 역시나 대중교통으로 속초를 간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버스를 추천해 주었다. 그래서 버스를 예약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하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탈인데, 왜 자꾸 계획을 세우려고 하지? 그냥 가자!'라고. 그래서 여행 경로를 찾기보다는 버스 안에서 들을 노래들이나 찾아보았다. 

  그렇게 20여분이 지나 양재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을 했다. 3호선을 타고 고속터미널역에 내렸다. 미로 같은 역을 빠져나가 매표소를 찾았다. 요즘 세상에 매표소가 아직도 있기는 할까 싶기는 했지만, 얼마 전에 노인분들이 KTX표를 구하러 현장에 줄 서서 발권한다고 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고속버스도 아직은 현장에서 구매할 수 있도록 매표소가 남아 있기는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표소를 찾아 헤매다 보니 바로 표를 구매할 수 있는 무인 발권기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무인발권기 앞에 서서 발권을 시작하려던 찰나 다시 한번 변덕이 생겼다. '나는 오늘 자유를 느끼려는 사람인데 굳이 이렇게 시간표를 보고 시간을 계산하며 안절부절못하며 표를 사는 게 좀 아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이곳저곳을 헤맨 끝에 매표소를 찾아내었다. 기쁜 마음으로 매표소로 가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속초로 가는 가장 빠른 버스표 한 장이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직원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도착시작이 가장 빠른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탐승을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직원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이내 나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가장 빨리 탈 수 있는 거요."

  "우등과 일반 어느 쪽이든 상관없으신가요? 일반으로 하시면 8분 뒤 8시 40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고, 우등으로 하시면 28분 뒤인 9시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습니다."

  그래도 기왕이면 혼자 여행인데 편하게 가고 싶었다.

  "우등으로 해주세요."

  "혼자이시면 1인석으로 해드릴까요?"

  "네."

  직원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타이핑을 하니 곧 옆에 프린터에서 티딕 소리를 내며 표가 출력되었다. 직원은 나에게 표를 건네며 말했다.

  "속초행, 9시 버스시구요. 타시는 곳은 19번 속초/양양행 탑승장이십니다. 우등버스구요, 좌석은 12번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가뿐한 마음으로 표를 받아 들었다.

  이 시간에 혼자 속초행 버스 티켓을 끊는 내가 이상하게 보일까 걱정했는데, 생각해 보니 여기서 일한다면 이런 사람들은 보는 건 꽤나 흔한 일이 아닐까 싶었다. 나야 늘 집과 회사만을 왕복하는 삶을 살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받아 든 표를 들고 9시까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했다. 그러자 문득 저 멀리 스타벅스가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커피라도 한 잔 하면 시간은 금방 가겠지 라는 생각에 스타벅스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게 스타벅스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나처럼 버스를 기다리며 커피를 한잔 하려는 사람들 또는 일과 시작 전에 마실 커피를 사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들 뒤에 줄 서서 기다리며 메뉴를 골랐다. 평소라면 정신이 번쩍 나도록 콜드브루를 시켰겠지만, 오늘은 버스를 타고 여행을 가는 날이니 버스에서 잠을 좀 자려면 카페인은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추운 몸을 녹이고 싶으니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마시기로 했다. 커피를 정하고는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진열대에 전시된 케이크들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문득 베이글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나는 빵을 먹지 않는다. 누가 권해서 한입 맛보는 것 외에는 빵 종류는 절대 스스로 입에 대지 않는다. 아침도 먹지 않는다. 억지로 살을 빼기 위해 아침을 든든하게 먹으려고 노력해 보았으나 아침도 저녁도 모두 든든하게 먹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던 그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아침밥을 먹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계속 일탈이라는 핑계로 안 하던 행동들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먹어본 적도 없으니 어떤 베이글을 주문해야 하는지 몰라서 고민하다가, 약 14년 전 대학시절 만났던 여자친구가 블루베리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나에게 권해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헤어진 이후로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는 추억인데 나도 모르게 이런 상황에서 그 기억을 떠올리고는 블루베리 베이글을 주문했다. 

  그렇게 베이글과 커피를 받아 들고 창가에 있는 바로 된 좌석에 앉았다.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듬뿍 발라서 한입 베어 무니 블루베리의 시큼함이 확 밀려들어왔다. 다들 상큼하다고 표현할법한 신 맛이었지만 신 맛에 워낙 예민한 나에게는 시큼함으로 느껴졌다. 분명 나름의 맛은 있는 편이었으나, 아마 이런 이유로 여자친구의 권유로 한번 먹어본 이후로 입에도 대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베이글은 반쯤 남기고 아메리카노를 홀짝 거리자 어느새 시간은 9시 5분 전이었다. 부랴부랴 자리에서 일어나 먹던 베이글과 커피를 정리하고는 스타벅스를 나서서 탑승장으로 향했다. 탑승장 밖에는 어느샌가 버스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버스 앞에는 LED로 속초행 버스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탑승할 때 표 검사를 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딱히 검사를 하지는 않았다. 버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승객은 나 혼자인 것 같았고, 그러다 보니 기사분은 굳이 검사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듯했다. 

  12번 자리에 앉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이어폰을 꺼냈다.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는 찰나 기사아저씨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 젊은 양반이 혼자 그래 쫘~~~악 빼입고 속초는 무슨 일로 가시나 그려?"

  매표소 직원과 다르게 평일 아침에 양복을 빼입고 속초를 가는 사람을 흔히 보신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낯선 사람의 쓸데없는 오지랖은 항상 불편했는데, 오늘은 매표소 직원과 얘기를 해본 게 다여서 그런가 그런 오지랖이 생각과는 다르게 약간은 반가웠다.

  "아, 바람 좀 쐬러 갑니다. 오늘 갑자기 회사를 쉬게 되어서요."

  "갑자기이? 회사가 망하거나 잘린 건 아니고?"

  기사아저씨의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하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네요. 근데 그건 아니고 진짜 오늘 갑자기 쉬게 됐어요. 그래서 바다 좀 보러 갑니다."

  "그럼 다행이고. 아 난 또 속초 갔다가 초상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

  기사아저씨의 농담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대답할지를 몰라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자 이제 안전벨트 매시고, 이제 출발합니다아~"


 

 버스가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가면서 바뀌는 경치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친구들과 여행 가던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버스는 터미널을 빠져나와 도로 위에 올라섰다. 아직까지는 시내인지라 고속도로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강원도로 향한다는 느낌이 덜할 것이라 굳이 창 밖을 볼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이왕 혼자 불쑥 여행을 떠나기로 한 거 유튜브 같은 걸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밖 경치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아까 엄선한 노래들을 틀었다. 평소 같으면 늙지 않기 위한 발버둥으로 억지로라도 최신 유행곡들을 들었었는데, 오늘만큼은 내가 가장 애정하는 2000년대 초반노래들을 듣기로 했다. 버즈, SG워너비, 플라이투터스카이, 바이브, 더크로스 등등 낯익은 가수들의 노래로 가득 채워진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 노래들을 듣고 있자니 다른 무엇보다 그 시절 추억들이 많이 떠올랐다. 단편적으로는 가끔 떠올리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쭉 추억들을 떠올려보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그 시절이 벌써 20년 전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한편으로는 고작 20년인데 이토록 아득하게 느껴질 일인가 싶기도 했다. 그렇게 노래를 들으며 창밖을 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겼다.


 문득 눈을 뜨자 버스가 버스가 정차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벌써 도착했나 싶어 황급히 창박을 내다보니 홍천 휴게소였다. 비몽사몽간에 앞을 보니 가사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려서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가신 듯했다. 나도 내려서 화장실을 다녀올까 싶었지만 기사아저씨에게는 말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에 아저씨가 버스에 올라탔다.

  "어? 곤히 잘 자더니 일어나셨네? 화장실 가실라면 지금 빨리 다녀오시고."

  아저씨의 말에 황급히 몸을 일으켜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 긴 시간을 버스에서 보낸 것이 아님에도 몸이 많이 구겨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기지개를 켜며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에 들러서 볼일을 보고 버스로 가려다 문득 옆에서 간식거리들을 파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쯤 사서 먹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침도 먹었는데 지금 간식을 먹으면 점심이 애매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음료수만 샀다. 이왕 사는 거 기사아저씨드릴 음료수도 같이 샀다.

  기사아저씨는 "아이 뭘 또 이런 걸 다"라며 환하게 웃음을 지으시고는 음료수를 바로 따서 드셨다. 나도 자리에 앉아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셨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갈증이 났었는지 알았다. 아마도 커피를 마신 데다가 입도 벌리고 자서 몸이 더 건조했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기사아저씨는 거울로 내가 음료수를 잠가 내려놓는 걸 확인하시고는 이내 버스를 움직였다.

  아침 일찍부터 버스에서 푹 자서 그런지 이제는 조금의 피로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회사일이 살짝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런 걱정은 굳이 오늘 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할 예정이었지만 눈앞의 경치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을 내 동체시력으로 따라잡아보려는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팔렸다. 그러다 보니 생각들을 정리하기는 커녕 잡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그렇게 눈알을 열심히 굴려가며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버스는 속초 시내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돈이 없던 대학생 시절에는 바다를 간다 하면 서해의 을왕리 아니면 동해의 속초였기 때문에 속초는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낯익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10년도 더 넘게 오지 않았던 곳인데 이곳의 시간은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계속 멈춰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시내에 들어서자 금방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를 내리는 내 뒤로 기사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 잘 쐬고 가요!!"

  그대로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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