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걷기는 물 빠진 흔적이 아름다운 표선해수욕장에서 시작한다. 썰물 때면 바닷물이 멀리까지 빠져나간다. 활 모양의 원형 백사장이 생기고, 해수면은 수평선과 함께 가느다랗게 보인다. 물이 밀려들어오면 해수욕장은 수심이 얕은 호수처럼 된다. 아이들이 물놀이, 모래놀이하기에 좋은 곳이다.
조개껍데기가 쌓여 만들어진 표선해수욕장. 백사장의 흰색 모래와 검은색 현무암은 묘한 대조를 이루어 해안경관이 수려하다. 해변에는 모래를 재료로 만든 조형물들이 설치되어 있다.
돌길에 피어난 들 꽃
해비치호텔 앞 공터에서 시작하여 민속해안로를 따라 가마리개까지는 휠체어 구간이다. 걷기 편한 길을 두고 당케포구 쪽으로 우회한다.
우회하는 돌길은 민속해안도로와 합쳐졌다 떨어졌다 하면서 나란히 간다. 화산 분출물이 쌓여 굳어진 화산 쇄설암이 해변을 뒤덮고 있다. 밀물 땐 물속에 잠겨있다가 썰물이 되면 검은 암석이 근육을 드러낸다.
신발 끈을 단단히 졸라맨다. 걷기가 불편한 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풍광은 사진과 글로 묘사하기 힘들 만큼 아름답다.
불턱. 현대식 탈의실이 생기기 이전에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불을 피워 언 몸을 녹이던 '불턱'이다. 이 불턱은 물질하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마을과 가정의 대소사를 의논하기도 하던 해녀들의 공동체 소통 공간이었다.
황무지의 거친 돌길에 해녀상이 서 있다. 힘들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테왁 하나에 의지하여 고달픈 삶을 꾸려 온 강인한 제주의 어머니, 누이가 내뿜는 정겨운 숨비소리가 들려오나. 호오이 호오 잇.
들꽃. 흙이라고는 찾아보기도 어려운 척박한 환경 속에서 들꽃은 돌 틈을 비집고 올라와 강한 생명력을 과시한다. 늦가을인데도 들꽃이 올레꾼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말 없는 사랑' 애기달맞이꽃은 이번 여정 내내 함께 할 것을 예고한다. 들국화가 더 익숙한 이름인 산국은 늦가을 해변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노란 꽃의 이고들빼기가 '활기 참'을 무기로 들국화, 애기달맞이꽃과 자리다툼을 하고 있다. 갯쑥부쟁이도 경쟁이나 하듯 사방에서 하늘거린다.
봄, 여름에 걸쳐 제주도 해변에 보초를 서던 '갯강활'이 이제는 제 소임을 '털머위'에게 물려주고 벼락 맞은 고사목처럼 말라가고 있다.
남극노인성 카노푸스. 다시 해안도로로 나오는 길목에 남극노인성 관측 시간표와 관측 방향을 표시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노인성 또는 수성(壽星)이라 부르는 무병장수를 상징하는 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귀포 해안에서만 보인다고 한다. 토정비결 저자인 이지함이 이 별을 보려고 한라산을 세 번이나 올랐단다. / 현지 안내문
또똣 노랑 가마리
갯늪. 해안 갯가에 태우도 맬 수 있었던 넓은 늪이 있다.
해녀길. 높다란 통신탑이 서 있는 돌출된 곶으로 내려가는 시멘트 길이 나 있고 올레는 검은 바윗길을 안내한다. 인근 매오름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만들어낸 검은 해변의 모습이 금수강산 같아서 붙여진 가마리 금수강산. 가마리의 해녀길은 ‘세계 최초의 전문직 여성’으로 불리는 제주 해녀들이 바닷가로 오르내리던 길이다.
love for planet. 해변에서 다시 도로로 올라가는 길목에 쉼터가 있다.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을 재활용하여 Love for planet 캠페인 일환으로 만든 벤치가 놓여 있다. '(플라스틱은) 지구를 아프게 해요'하며 플라스틱 빨대를 쓰지 않던 5살짜리 손녀 때문에 무안했던 생각이 난다.
황근. 표선리, 세화리 해변이 황근 군락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멸종 위기의 야생 생물 2급이다. 국립 생물자원관에서 대량 증식한 황근을 기증받아 군락을 복원하고 있다. 7, 8월이 개화기인데 운 좋게 몇 송이가 피어 있어 노란 꽃을 본다.
바다 숲. 바다에도 숲이 필요하다. 바닷속에 해조류를 심는다. 해조류의 숲이 생기면 전복, 소라, 물고기들이 찾아온다.
표선읍 세화리 앞바다는 '바다숲 가꾸기'를 하고 있는 해역이다. 갯녹음 현상으로 황폐화된 바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가마포구. 가마포구로 들어선다. 세화리의 옛 이름이 가마리다. '또똣'은 '따뜻한'이라는 제주어다. '또똣 노랑 가마리'는 노란 황근의 자생 군락이 있고, 노란 귤이 많이 나는 따뜻한 곳 가마리를 이른다. 가마리는 귤과 황근을 형상화한 '규리와 그니'를 캐릭터로 사용한다. 매년 축제도 연다. 코로나로 멈췄지만.
광명등. 포구에 들어오는 배를 위해 불을 밝혀 뱃길을 인도하던 옛 등대인 광명등이다. 광명등을 켜는 '불칙이'가 있었다. 마을에서는 고기잡이를 할 수 없는 동네의 원로 중에 '불칙이'를 정하여 관리하도록 했다.
가마리개. 가시리 오름군에서 발원하여 세화포구로 흘러들어 가는 가시천의 하구를 가마리개라 한다. 만조가 보까지 바닷물이 올라온다. '만조 시 위쪽 가마교로 우회하라'라는 안내문이 있다.
가마리개
곧은길은 길이 아니다. 사람이 밟고 지나가서 생긴 에두르는 길이 진짜 길이다. 가마리개 천변을 따라 좁은 길이 나 있다. 분꽃으로 축대와 돌담을 덮은 카페 옆을 지나간다. 담쟁이덩굴이 타고 오른 담장 너머로 쳐다보는 강아지의 눈길이 선해 보인다. 그 선한 눈으로 집을 지키겠나 싶다.
해녀의 집. 세화항 남쪽 방파제 들어가는 입구에서 찻길은 막힌다. 올레는 해녀의 집 뒤를 돌아 숲 속 오솔길로 이어진다.
해녀의 집과 테왁
해병대길과 산열이통
가마수산을 지나면 해변길과 농협은행 연수원 산책길이 나누어진다. 올레 리본은 연수원 산책길을 가리킨다.
농협 연수원 산책길. 향이 만 리까지 간다는 돈나무, 섬쥐똥나무라 불리기도 하는 우묵사스레피와 까마귀쪽나무 등 상록활엽관목이 우거진 숲길과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파도 소리가 귓전을 두드리는 바닷길, 대나무 숲길을 번갈아 걷는다.
올레길은 농협은행 연수원으로 들어간다. 연수원은 산책로를 올레길로 내어놓고 화장실도 제공한다. 잠시 쉬어간다.
해병대길. 농협은행 연수원 후문을 나와 올레길은 다시 해안으로 이어진다. 이 해안 숲길은 제주올레에 의해 35년 만에 복원되었다. 이 길을 만들 때 해병대 장병들이 도와주어서 '해병대길'이라고도 불리지만 적극적인 홍보는 하지 않는다.
'소노캄제주'의 산책로를 지나간다. 다양한 상록 활엽 관목 밑으로 털머위가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공기 정화 능력이 뛰어난 팔손이 가 하얀 꽃 뭉치를 달고 있다.
'소노캄 제주'의 울타리에 줄기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간 열매가 빽빽하게 달려 있는 관목이 눈길을 끈다. '피라칸다'다.
피라칸다(좌). 장미과의 상록활엽관목, 빨간 열매를 비유한 듯 '알알이 영근 사랑, 집념, 자비, 아름다움은 당신의 매력' 등의 꽃말을 가지고 있다.
'소노캄 제주'의 산책로를 벗어나면 해안도로가 다시 이어진다.
토산포구. 작은 포구다. 화산도인 제주도의 해변은 단조롭고 암초가 많아 포구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제주도의 포구는 작은 포구가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다.
멀리 갯바위에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우뚝 솟은 바위 위에 왜가리로 보이는 새가 앉아 있다. 여유 있는 모습으로 낚시꾼을 바라보고 있다.
산열이통. 여름철에 땀띠를 없애고 열을 식히는데 좋다는 산열이통은 바다와 인접한 조간대의 암반에서 솟아나는 용천수다. 물놀이하고 몸을 헹구는 물로 사용했다. 조성된 물놀이 시설은 활력을 잃은 것 같다.
산열이통
알토산과 신흥마을
민속해안도로를 따라 걷던 올레4길은 '산열이통 입구' 버스 정류소에서 일주동로를 건너 중산간 마을로 들어간다.
알토산. 마을 입구에 재미있는 모습의 카페가 있다. 술통 위에 제주올레 완주 증서를 전시하고 있다. 토산리는 4.3의 고통을 안고 살아온 마을이다.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이 몰살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희생을 치른 아픔이 있는 마을이다. 4.3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올레4길의 중간 기착지인 알토산 고팡이 있다. 올레꾼 두 명이 올레 인증 스탬프를 찍고 있다.
마을 입구의 카페(좌), 토산 2리 마을회관(우)
신흥리 마을. 골짜기가 깊다. 물론 건천이다. 토산리와 신흥리의 경계가 되는 송천을 건넌다. 표선읍 토산리에서 남원읍 신흥리로 산길을 넘어간다. 다양한 수종의 낙엽 활엽 교목, 상록 활엽 관목이 우거져 있다. 이 지역은 송천을 중심으로 아름다운 생태경관을 가지고 있다. 어위폭포가 있고 송천을 따라 영천사, 원앙새 도래지 팽팽물이 있다.
중산간 지역인 토산리와 신흥리의 주요 작물은 노지감귤,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시설 감귤, 키위, 망고 등이다. 농장의 규모도 큰 편이다. 따 놓은 노란 밀감과 초록의 나뭇잎, 검은 돌담이 어우러져 정겨운 풍경이다.
마을로 들어서니 훤칠하게 큰 키의 팽나무와 담장 밑의 맨드라미가 올레꾼을 반긴다. 조용한 마을에 잔잔한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예쁜 모습의 게스트하우스와 소품 가게, 옛날 사진관, 특이한 간판을 단 음식점이 올레꾼의 눈길을 끈다.
새마을 농특사업 저장고를 활용한 '알맞은 시간'이란 상호도 재미있다. '일반 음식점, 12세 이상 4인 이하 입장 가능'이란 알쏭달쏭한 안내문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영업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문이 잠겼다.
바다목장과 옥돔마을
바다목장. 신흥1리 사무소를 지나 일주동로를 건넌다. 다시 해안로를 만난다. 신흥포구부터 해안도로는 남원포구까지 이어진다. 해안도로변에 바다를 바라보고 대형 유통 업체 ○○ 광어 바다목장이란 안내판과 함께 큼직한 빗돌에 ○○수산, □□수산 등의 상호가 새겨진 대규모 양식장이 연이어 나타난다. 양식장 주변에는 어김없이 물새들이 모여든다.
갈매기 소리
옥돔 마을. 태흥2리포구는 옥돔 마을이다. 선창가 위판장에서 첫 번째, 둘째, 넷째 주 일요일만 빼고 매일 오후 1시에 옥돔 경매가 열린다. 보통 수산물 경매는 새벽녘에 열리는데 이곳에서는 대낮에 볼 수 있다. 옥돔을 낙찰받은 상인들로부터 살 수도 있다.
태흥2리포구 앞, 위판장에서 옥돔 경매가 열리고 있다. 매일 오후 1시(첫 번째, 둘째, 넷째 주 일요일만 빼고)에 열린다.
1시가 가까워지니 생선 화물차들이 속속 들어선다. 붉은 모자를 쓴 경매사가 호각을 불면 가격을 써서 낸다. 오늘 경매 품목은 옥돔과 조기다.
위판장 경매 모습
남원포구에 해가 진다.
이 길은 또 다른 재미도 있는 길이다. 지귀도, 섶섬, 범섬을 바라보는 재미다. 또 하나는 기후에 따라 시간에 다라 변하는 한라산의 조화를 카메라에 담는 일이다.
작년 이맘땐 한라산 정상부에 눈이 쌓인 것을 보았는데 오늘은 해 질 무렵이라 바다 쪽에 더 눈이 간다.
2021. 11. 11 오후 2시, 옥돔마을에서 본 한라산
2022. 11. 7 오후 5시, 의귀천 하구
2022. 11. 7 오후 5시 10분. 의귀천 하구
점점 어두워진다. 해 떨어지는 시간이 빨라지니 일몰을 보는 호사를 누린다. 벌포연대를 지나는데 문섬과 섶섬이 겹쳐 보이는 산허리에 떨어지는 해가 걸린다.
2022. 11. 7 오후 5시 30분, 벌포연대에서 바라본 지귀도(왼쪽), 문섬과 섶섬(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