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茶房).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거나 쉴 수 있도록 갖추어 놓고, 차나 음료를 판매하는 곳'이다. 요즘은 사전적 의미를 늘어놓아 설명할 정도로 잘 쓰지 않는 명칭이다.
그 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이미 '다연원'이라는 차 마시는 곳이 있었다. 다방이라는 명칭은 고려 때 처음 사용되었으며, 근대적 기능과 형태를 갖춘 다방은 일제강점기에 등장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방은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사교의 장소이자, 각종 작품 전시, 연극 공연, 일일 찻집,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활동의 장소로 이용된다.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6,70년대 DJ가 있는 음악 전문 다방은 통기타와 생맥주, 청바지로 상징되는 젊은이들이 모여들던 문화적 해방구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경남여고 교정에 다방이 세 곳 있었다. 등나무 그늘 밑의 '등 다방', 은행나무 밑의 '행다방', 연못가의 '수다방'이다. 차를 팔고 마시는 장소는 아니지만, 쉼터이자 친구들과 이야기 꽃을 피우며 우정을 다져가던 교유의 장소다. 얼마나 멋있고 시대상을 잘 반영한 깜찍한 이름인가. 여고생의 재치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선동 상현마을 토속 맛집들의 앞마당에 옅은 자주색의 아름다운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걷는이의 눈길을 끈다.등나무 꽃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있다. 등나무 그늘 밑에 놓인 평상에 몇 사람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여고시절의 '등 다방'이 생각나는 정경이다.
아내는 경남여고에 근무하는 선생님께 요즘도 '등 다방'이 있는지 물어본다. 학교 현대화 사업으로 건물을 재건축하는 과정에 사라져 버릴 뻔했던 추억의 등나무가 정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겨 심어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단다. '등 다방'이란 명칭은 사라졌지만.
내친김에 천연기념물 176호 등나무 군락지가 있는 범어사로 올라간다.
일주문 못 미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계곡을 건넌다. 여름의 쉼터로우리에게 친숙한 등나무약 6,500여 그루가 무리 지어 자라고 있다. 이처럼 많은 수의 등나무들이 자생하는군락은그 유례가 드물다. 이곳에는 보통 5월 초에 등나무 꽃의 아름다움이 절정을 이루는데 경치가 신비스럽고 그윽하여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속씨식물인 등나무는 콩과에 속하며 뿌리혹박테리아와 공생한다. 세균에게 탄소와 그 밖의 성장 영양분을 제공하고, 세균으로부터 질소 화합물을 공급받아 거름기 없이도 어디서나 잘 자랄 뿐만 아니라 지력을 높인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이고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크기는 10m 정도의 높이로 다른 나무를 감거나 타고 올라간다. 곳곳에 뿌리를 뻗어 군락을 넓혀가고 있다.
꽃은 5월에 연한 자주색으로 피며, 어긋나게 자라는 짙은 녹색 잎은 풍성하게 펼쳐져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그늘을 만들어 준다. 꽃말은 ‘사랑에 취함’이다. 콩꼬투리 모양의 열매는 보드라운 털로 덮여 초가을에 익는다.
가지는 밤색이며, 전형적인 오른쪽 감기를 한다. 칡은 왼쪽으로 감아 올라간다. 칡과 등나무가 좌우로 엉키듯, 이해관계가 뒤엉켜 해결책을 찾기가 어렵다는 의미로 칡 갈 (葛) 자, 등나무 등(藤) 자를 합쳐 갈등(葛藤)이라 한다. 칡 나무와 등나무를 함께 심으면 서로 얽히고설켜 끝에는 두 나무 모두 죽고 만다. 인생사에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공멸하듯이.
등나무는 쓰임새가 많은 나무다. 줄기는 '등'이라 하여 의자, 지팡이를 만드는 데 사용되고, 가는 가지는 바구니를 비롯한 여러 가지 수공예품의 재료로, 껍질은 매우 질겨 종이의 원료가 되었다.지금은 주로 관상용 조경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는 등나무 군락 관찰로가 조성되어 있다. 관찰로는 826m 거리로 도보 약 30분이 소요되며 원점 회귀형이다. 관찰로에는 등나무 외에도 280여 종의 희귀 식물 등이 식생하여 원시림을 방불케한다. 또 등나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중간중간 휴(休)•미(美)•심(心)•선(禪)으로 이름 지어진 쉼터도 마련되어 있다. 휴 쉼터는 '몸과 마음을 쉬는 터', 미 쉼터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터', 심 심터는 '자아성찰의 터', 선 심터는 '진정한 깨달음의 터'로 명명하고 있다.
다시 '등 다방'으로 돌아가 보자. 경남여고가 등나무를 옮겨 심은 경위는 잘 모르겠지만, S중학교는 멀쩡하게 있던 교문 앞 등나무를 잘라버리고 주차장을 만들었다. 교사 뒤의 넓은 주차장이 있는데도. 어떤 경우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지도자가 더 훌륭한 경우도 있다. (2021.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