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오늘 아침은 저희 북클럽 1회 차부터 참여해 준 고마운 회원님께서 직접 호스팅을 하는 날입니다. 피크닉 장소도 직접 선정하고 커피와 아이스박스, 소시지 계란빵, 돗자리를 야무지게 챙겨 30분 일찍 자리를 맡아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투박하면서도 통통하고 매끄러운 외관이 귀여운 필름카메라와 잔잔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스피커까지 더해져 더할 나위 없는 피크닉 분위기였습니다.
다행히 어제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적당한 구름과 바람이 완벽한 날씨입니다. 저와 남자친구는 위스키와 간식, 빵을 준비했습니다. 얼마 전 교보문고 앞에서 파는 장난감 좌판을 지나치지 못하고 사버린 비눗방울 스틱도 챙겼습니다. 다른 일행은 와인 두 병과 쿠키, 넓은 돗자리를 챙겨 왔습니다. 데크 위에서 호시탐탐 음식을 노리는 비둘기들의 경계마저도 귀여울 정도로 완벽한 피크닉이었습니다.
각자 가져온 책들을 소개합니다. 책과 만나게 된 사연은 모두 다양합니다. 여행에서 찾았던 카페의 모티브가 된 동명의 책, 언어에 대해 더욱 고찰하고 싶어서 선택한 책,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읽고 싶어 찾은 책, 젊은 시절 읽었다가 다시 찾은 책,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어 시작한 책인데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책...
저는 지난주에 이어 욘 포세 작가의 책을 가져왔습니다. 학교 도서관에 신작코너에서 찾은 <아침 그리고 저녁>이라는 책입니다.
1. 기억에 남는 이야기.
어떤 분께서 자신이 책을 찾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조금은 다르지만 저도 생각해 보았던 부분이라 정리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타인을 마주할 때 감정이 즉각적이지 않고 생각이 먼저 앞서는 부분에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 책을 읽는 동기였습니다. 요즘 MBTI 식 말하기로 표현하자면 T가 99%에 가까운 분이라고 합니다. 타인의 감정과 상황에 빠져볼 수 있는 독서가 그런 공감의 폭과 깊이를 풍부하게 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저에게 독서도 조금 비슷한 역할입니다. 평소에는 지나치기만 했던 상황들에 빠져보고 또 생각해보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도 저는 처음 만난 요한네스의 삶과 그의 죽음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2. 신에 대한 이야기.
신형철 작가의 <인생의 역사>라는 책을 통해 신에 대한 화두가 등장했습니다. 고통과 부재 속에서 오히려 신의 존재가 선명히 다가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감히 책 속에 구절을 조금 꺼내와 보았습니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 낼 책임이 있다.” 현실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종교적인 일 중 하나는 역시 사랑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3. 아침 그리고 저녁.
저는 욘 포세 작가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었습니다. 첫 시작은 탄생입니다. 할아버지 '요한네스'의 이름으로 살아가게 될 요한네스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몸이 가벼워진 할아버지 요한네스의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죽음과 탄생 거꾸로 말해도 다를 것이 없는 순환의 이야기는 생각이 아니라 가슴으로 다가왔습니다.
책 속에서 종종 신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인물을 통해 작가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인데요. 아들이 태어나기 전 올라이는 신과 세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신은 존재한다, 너무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을 뿐, 신은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 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그리고 그 신은 홀로 이 세상과 인간들을 지배하지 않는다,... 그의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신이 아니다, 누군가 세상에 등돌릴 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 거리의 악사가 훌륭한 연주를 할 때, 그는 그의 신이 말하려는 바를, 조금은 들을 수 있다, 그래 그럴 때 신은 거기 있다,... 저 밖의 험한 세상에서 제 삶을 시작해야 한다, 자애로운 신뿐만 아니라 미약한 신이나 사탄과도 연결되어 있으니, "
신의 역사만큼이나 고통의 역사가 깊은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무신론자이지만, 신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무신론자'는 저 같은 사람을 일컫는 좋은 단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매일의 생활 속에서 저도 종교적인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일, 바람을 느끼는 일 같은 아무것도 아닌 일상 속에서도 말입니다. 어떤 날은 바람 속에서 지나쳐간 사람들의 목소리를 느껴보기도 하고,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겪어보지 못한 아픔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저는 요한네스와 함께 죽음의 피크닉을 집에서 마무리했습니다. 죽음이 다가오는 장면을 이렇게 아름다우면서도 마치 겪어본 것처럼 과감히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요한네스는 30년 지기 친구 피테르와 하나가 되고, 이 세상과 하나가 되며 죽음을 맞이합니다.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 가장 종교적인 체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저의 일상은 참으로 그것과 멀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 그 사람의 스쳐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몽글해지는 마음을 느껴보는 것. 피크닉을 하면서 터져 나온 웃음 속에서 나를 잊어버리는 것. 대화 속에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화가 나기도 슬프기도 했던 것. 모든 것이 참 소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