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친지의 자녀들의 결혼식이 4군데나 겹쳤다. 연말결산을 하려는 모양이다. 많은 이들이 인생의 길일로 택할 정도니 얼마나 "좋은 날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다. 여기에 서설이 겹치니 더욱 축복스러운 날이다.
겨울에 소복이 내리는 눈만 보면 항상 아내는 33년 전의 신혼여행 얘기를 꺼낸다.
"설악산(설악파크호텔)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어서 밖에 나갈 수 없었는데..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쌓여있어서.." 아내는 겨울날 눈만 보면 그때 그 감성이 가시지를 않는 모양이다.
우리는 결혼식을 하고 다음날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설악파크호텔에 여정을 풀고 하루를 여행하고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우리가 일어났을 때 온 세상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밤새 세상이 변해버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제주에는 시내에 눈이 그리 많이 내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 정도로 많은 눈이 내린 날을 본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눈이 내린 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버린 동네 곳곳을 강아지가 돌아다니면서 발자국을 내듯 우리는 호텔 정원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설국에서의 하루를 보낸 기억이 새삼스럽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래서 추억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원동력과 에너지가 되는 것"임을 실감할 때도 있다.
오늘은 손자뻘 되는 녀석의 결혼식이 있어서 축하하러 갈 참이다. 연배가 비슷한 조카의 아들 결혼식이다.
문중회나 친족끼리의 모임에서 족보와 대수(세수)라는 것은 참 여러모로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할아버지도 있고, 나이가 훨씬 많은 손자도 있으니 말이다. 가까운 친적들끼리야 어떻게 어떻게 호칭을 정리해서 사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끔씩 큰일이 있거나 행사가 있을 때야 볼 수 있는 친척들인 경우는 당황스럽거나 서먹서먹할 때가 많다. 뭐라고 호칭을 부르기도 애매하고, 존댓말을 쓰기도 말을 내리기도 거북하다. 오늘 혼주는 나이가 나보다 두 살 정도 위의 조카다. 서로 존댓말을 쓰면서 지낸다. 그러나 호칭을 뭐라고 불러본 적은 없다.
어제는 전형적인 겨울날씨였다. 여기에 제주 특유한 바닷바람이 더해지니 몸이 자동적으로 움츠려질 정도로 추웠다. 오늘 아침 거실에서 본 바깥 풍경은 조용하다.
" 오늘은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야 하는데, 날씨가 괜찮겠지? "
" 네, 밖을 보니 나뭇가지가 전혀 흔들리지를 않네요.."
오늘 결혼식장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해안이 없는 해안동이라는 곳이다. 지도를 보면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인데 마을이름은 해안동이다. 그래서 처음 듣는 사람을 종종 헛갈리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길을 가로질러서 가면 15분 정도 소요된다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준다. 나도 제주에서 웬만한 곳은 모두 가보고 익숙한 제주산 토박이이지만 요새는 익숙지 않은 서양식 이름의 건물들이 많아서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야! 이런데가 있어? 처음 가보는 길이네.."
이길 역시 주위로 많이 다니기는 하지만 처음보고, 처음 가보는 길이다. 많이 낯설다.
이름도 어렵다. "캠퍼트리 호텔 & 리조트 "..
예전 4.3 이전에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나, 4.3 때 모두 해안으로 마을이 소개되어 지금은 없어진 마을 부근이다. 널따란 임야지대, 딱 올라서면 바닷가가 보이는 산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여기도 빨간 지붕집들이 있다. 독채 리조트를 여려 채 지어서 마을을 만들었다. 남들이 안 보이는 조용한 곳에 숨어있는 조그만 마을을 만들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연회장까지 가는 길, 눈이 제법 내린다.
넓은 광야지대 바람을 찾는 갈대와 하얀 눈발이 제법 겨울의 황량함을 더해준다. 몸을 한껏 움츠리고 들어선 결혼식장은 만원이다. 결혼은 축하하는 축가가 한창이다. 식장안은 바깥세상과는 다른 따스함만이 가득하다.
연회장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밖을 보니 본격적인 눈이 내린다.
널따란 유리창에 펼쳐진 억새 가득한 도화지에 내리는 하얀 눈은 탐스럽다.
그 너머로 멀리 보이는 하나둘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지우개로 지우다 만 못 그린 그림의 흔적 같다.
잠시 눈을 맞아 보고 싶은 마음에 조카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제법 눈이 내린 듯 곳곳에는 눈의 잔해가 남아있다. 잔디와 벤치 위 소복이 쌓였다.
눈은 양이 넘쳐서 온 세상을 덮어버리면 아름다운데, 오다만 눈, 녹다만 눈은 말 그대로 잔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