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을 둘러싼 현실
토요일 늦은 밤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내가 자주 방문 하는 마을 이장이 바뀌었다는 전화다.
임기동안 무탈하게 마을 일을 잘했고,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도 가져왔기에, 그리고 본인의 연임의 의지가 강했기에 다시 연임이 되는 줄 알았던 마을이다. 그러나 그 마을은 전통적으로 이장의 연임을 허용하지 않는 마을이었다. 총회가 다가오자 갑자기 후임자가 나타나고, 무언가는 주민들 간의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말이면 제주의 마을은 바쁘다. 1년을 결산하는 마을총회를 해야 한다. 들쑥날쑥한 마을의 1년을 정리하고 감사하는 것만도 바쁜데, 이장 임기가 끝나는 마을은 더욱 바빠진다. 새로운 이장을 선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장은 마을에서 인기 없는 자리가 된 듯하다. 후임 이장이 나서지 않아서 할 수 없이 연임하는 경우, 마을 어른들의 사전 조정에 의해서 후임 이장이 추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도의원이나 국회의원 선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시끌벅적하게 진행되는 마을도 있다. 마을 곳곳에 현수막이 나붙고, 공약이 남발되기도 하고, 드문 경우는 모략선전과 인신공격 난무하기도 한다. 이런 마을은 경선 후유증으로 심한 갈등을 겪기도 하고, 마을 공동체는 갈등의 치유라는 과제를 떠안게 되기도 한다. 시쳇말로 마을의 재정이 든든한 부자 마을들의 얘기다.
이장은 주민들이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절차적 동일성 때문에 혹자는 이장을 대통령, 국회의원, 도지사, 도의원과 같은 레벨이라고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마을에서 이장의 업무영역에는 제한이 없다. 마을의 모든 일은 이장의 손을 거쳐야 한다. 마을의 공적인 일은 당연하지만, 사적인 일도 행정과 연관이 되거나 민원성 일은 이장하고 먼저 의논하는 경우가 많다.
이장을 마을의 어른으로, 관의 일을 많이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관습적인 모습이다. 사회가 많이 변하였지만, 아직도 순수하게 제주의 마을공동체적 성격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중산간 마을과 연로하신 어르신들에게 아직도 이장에 대한 믿음과 의존도는 여전하다.
마을에서 이장의 권위는 여전하다.
주민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했으니 무게감을 실어주려는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마을 일의 최종결정권자는 이장이다. 주민들 간의 사소한 갈등, 단체 간의 갈등, 행정과 주민들 간의 갈등 모두 이장을 찾는다. 이장의 권위로 혜안을 찾아야 한다. 이장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이다. 행정에서도 마을로 들어오면 일단 이장을 찾는다.
이젠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선거철이 되면 어르신들이 이장의 의견을 물어오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누구 찍어?" 그래서인지 선출직인 사람들은 마을 주민에 대한 이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기에 이장을 가깝게 자기네 사람으로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인다. 지금도 각종 선거에서 이장의 한마디는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한다. 흔한 얘기로 주민들은 국회의원, 도의원의 이름은 몰라도 이장의 이름은 안다고 한다.
행정에서도 마을 일에 대해서는 일단 이장의 의견을 존중하려는 경향이다.
마을 안에서 발생하는 민원성 일은 일단 이장과 협의를 거치도록 프로세서를 만들어 놓았다. 먼저 "마을 주민들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는 식이다. 좋게 생각하면 주민들의 의사를 따르는 것같이 보이지만, 조금 비뚤어서 생각해 보면 민원성 일이니 마을에서 알아서 조정하고 결과만 통보해 주면 행정이 처리하겠다는 의미로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다. 책임 회피성이 될 수도 있음 직한 문구다. 같은 동네 같지만, 마을 내의 의사결정을 하는 방식이나 구조는 다 다를 수 있기에 외부에서 아무리 강력한 힘이라도 마을 내부 갈등을 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무리 행정이라지만 외부에서 마을 주민들 간의 의견을 조정하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다. 그러니 마을에 이장의 권위에 맡기는 것이다.
이장은 무보수 명예직이다.
월급은 없고, 대외 활동을 하기 위한 비급여성 업무추진비가 있다. 이장의 사용할 수 있는 돈은 마을재정에 따라 규모의 차이가 크다.
이장은 마을 주민들의 경조사를 일일이 돌아봐야 하고, 마을을 대표해서 크고 작은 외부 일에 모두 참석해야 한다. 비슷한 행사, 때를 맞춘 행사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옆 마을, 이웃 마을을 찾아다니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장 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사생활이 없을 정도다. 남편이 마을 일에 나서는 순간 부인은 혼자서 집안의 모든 농사일을 챙겨야 하는 홀어멍 신세가 된다.
모든 활동에 매번 마을의 업무추진비를 쓸 수는 없기에 사적인 경제적 출혈이 많다. 이장은 봉사라는 이름으로, 명예라는 이름만으로 버티기에는 이제 너무 무거운 자리가 되었다. 마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만 버텨내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이장은 무보수 명예직이기에 돈벌이는 따로 해야 한다.
먹고 살 호구지책이 있어야 한다. 이장들은 대부분 마을에 거주하는 토박이들이다. 농사하면서 어느 정도 시간 활용이 가능하기에 이장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흔하고 편한 경우다. 드물게는 개인 사업을 하는 이장들도 있다. 본인 사업과의 연계점을 찾으려는 분들도 있지만, 마을 어른들의 강권에 못 이겨서 하는 수 없이 이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마을 일, 자기의 사업영역과 접점이 생기면 자칫 오해를 사거나, 불명예스럽게 임기를 마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기에 모두가 조심스러운 경우다.
요즘은 베이비붐 세대들이 은퇴하고 귀향하면서 이장을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들은 일단 시간과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 게다가 사무처리능력과 행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모두 마을 일에 크게 도움이 되는 업무 능력들이다. 마을에서는 최상의 인력을 얻는 기회가 되고 있다.
이장의 근무형태는 각자 다르다.
출퇴근과 근무시간이라는 개념이 없다. 마을 사정과 이장의 직업, 마을 일에 대한 이장의 개인적인 관심도에 따라 결정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떤 마을은 이장님이 거의 마을에 상주한다. 리 사무소에 있거나 마을 주변을 돌아다닌다. 가면 만날 수 있다. 아예 사무실에 들르지를 않는 이장도 있다. 일이 발생할 때마다 사무장이 이장에게 전화해서 처리한다고 한다. 요새는 휴대전화와 카톡이 있기에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는 이장도 많다. 그러기에 마을 이장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리 선약하고, 일정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마을 리사무소는 행정기관이 아니다.
리사무소는 마을의 가운데에 있는 마을의 복지회관이나 마을회관이라고 불리는 건물에 있다. 규모나 형태는 다양하나, 모두 현대식 건물로 최소 2층이다. 마을 가운데에 마을 공동시설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어서 단지를 형성하는 마을도 있다. 마을회관, 부녀회관(청년회관), 경로당, 문화센터, 각종 부대시설과 편의시설들이 한데 모여 있다. 마치 행정타운을 방불케 한다.
리사무소에는 마을에서 급여를 주는 사무장이 상주 근무를 한다. 마을과 행정을 이어주는 일과 마을 주민들의 크고 작은 일들은 처리해 준다. 행정기관은 아니다. 마을 한가운데에 제법 규모가 있는 건물에 리 사무소라는 현판이 있어서 그런지 종종 행정기관으로 착각을 하고 찾는 사람들이 많다. 종종 해프닝이 발생하는 경우다. 리사무소에 전입신고를 하거나 각종 행정민원 업무를 하러 방문하는 경우다. 어떤 마을은 아예 리사무소 입구에 “여기는 관공서가 아닙니다”라고 써 붙인 곳도 있을 정도다.
로컬시대, 지방자치, 주민자치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의 중심이 지방으로, 마을로 내려가고 있다. 마을 스스로 마을의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고,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마을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마을이 중시되고, 정책의 방향이 마을로 향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마을도 싫지는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중앙정부의 정책을 따라갈 마을의 인력이 없음이 현실적인 한계다.
마을의 리더그룹은 이장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장은 일반적으로 2~3년 주기로 교체기를 맞는다. 물론 연임도 되고, 장기 집권을 하는 마을도 있기는 하나 이건 특별한 경우다. 이장의 바뀌면 개발위원회가 바뀐다. 마을의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일종의 대의기구다. 이장과 개발위원회의 역할이나 운영은 마을마다 많은 차이가 있다. 서로 보완적인 게 일반적이지만, 견제의 역할을 하는 마을도 있다.
마을 현장에서 만나는 이장들은 항상 바쁘다. 가끔은 지나치게 정치적이거나 사업적 측면으로 현실에 너무 밀착되어서 주민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마을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장은 마을 일에 진심이고,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이장은 아직도 마을 전체를 위한 봉사자로서 명예와 존중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먹고살고 있다.
이제 마을의 이장은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잘 살 수 있는 기반환경을 만들 수 있는 사업가적 자질도 있어야 하고, 마을의 비전을 그릴 수 있는 기획력도 있어야 한다. 또한, 주민들 간 또는 행정과 주민들 간의 갈등을 지혜롭게 조정할 수 있는 갈등조정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 새롭게 요구되는 마을 이장에 대한 역할이다.
이장은 지방자치 시대 가장 바쁘고 유능한 리더가 되길 요구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