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귀리 당제를 보는 날
제주의 무속과 신앙을 얘기할 때 일만 팔천신과 당 오백, 절 오백을 말한다.
숫자적인 의미보다는 신화와 당, 절들이 그만 큼 많다는 의미다. 바다로 둘러싸인 고립무원의 조그만 섬에서 사람들이 의지하면서 믿고 살았던 방법을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을마다 산재해 있는 당들은 여러 가지 좌정의 스토리를 품고서 제주인들의 삶에 직, 간접적으로 녹아있다. 당의 이름은 위치해 있는 마을과 당이 품고 있는 스토리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그 많던 당들은 1970년대 미신타파라는 역사적 고난과 현대화라는 개발과정에서 많이 훼철되어 지금은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제주의 신당 중 민속(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본향당은 성산읍 수산리 본향당을 비롯하여 송당본향당, 새미하로산당, 와흘본향당, 월평다라쿳당 등 5곳이다. 본향당은 마을의 생산(生産), 물고(物故), 호적(戶籍), 장적(帳籍)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당이다. 이들은 역사성, 의례, 본풀이, 신앙민, 형태 등과 관련해 제주를 대표할 만한 당들이다.
누군가의 얘기에 의하면 제주에서 가장 신당다운 당, 즉 신당의 본래의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애월읍 상귀리 본향당이라고 한다. 당이 있음직한 전설 속의 이미지와 가장 부합할 뿐만 아니라, 비교적 원형이 많이 남아있다는 의미다. 상귀리의 본향당인 황다리궤당은 소왕천변 깊숙하고 은밀한 곳에 있다.
도로에서 밭 두어 개를 지나서 계단을 따라서 숲 속으로 내려가면 거대한 바위와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깊지 않은 조그만 굴이 나온다. 보기 드문 굴+신목형당으로 굴(窟)에다 신목이 있는 형태다. 주위는 거대한 바위들로 쌓여있는데, 바위틈에는 연령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수목의 뿌리들이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소왕천변이다. 비가 내리면 바위틈을 타고 내리는 폭포수가 장관을 이룬다고 주민들이 얘기를 해준다. 숲 속에는 조그만 평상 2개가 놓여있다. 여름날의 분위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입구에는 강씨 하르방당, 굴 안에는 송씨 할망당이 있다. 둘은 본래 부부다. 송씨 부인이 마을 주민 전체를 보살피는 본향신이면서 주신이다. 강씨 영감은 수렵·목축을 돌보는 신이다. 바위그늘에 기대어 제단을 만들었다. 육지 무당들이 당이 영험하다면서 기를 받으러 기도하러 자주 방문한다. 그래서인지 당안에는 빗자루등 청소도구가 가득하고, 제발 쓰레기를 버리지 말고, 음식물은 되가져가 달라는 부탁의 주문들이 바위마다 달려있다. 당안은 낙엽으로 어지럽혀질듯 하나 정기적인 청소가 이루어 지는듯 꺠끗하고 정갈하다.
입구에 서면 음험하고 영험한 기운이 금방이라도 사방에서 우러나올 듯하다. 그곳은 선계이고 신의 보금자리로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저절로 호기심이 생겨나고 다른 당에서 여태 경험하지 못한 전율을 느껴야 했다. 한밤중에 혼자 가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려울 것 같다.
오늘은 상귀리 당제가 있는 날이다. 상귀리 당제의 제일은 정월 7일이다. 본향당의 제일을 그대로 따른다. 제법은 유교식을 많이 따르지만 제일은 무속의 것 그대로이다. 행제도 아침이 밝아올 때, 곧 6시나 7시쯤에 맞춘다. 이것도 당굿의 전통을 따른 셈이다. 유교식 마을제라면 자시에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2025년 2월 4일, 정월 7일이다. 새벽 04:30분까지 상귀리 마을회관으로 가야 한다.
시민아키비스트로서 제주학연구센터의 마을포제 조사에 참여하는 길이다. 마을회관에 모여서 당으로 이동을 할 예정이다. 어제부터 날씨는 심술궂다. 눈이 오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밤에는 눈이 내려서 길이 빙판이 될 거라는 예보를 들었기에 오늘 당제를 제대로 볼 수 있으려나 걱정을 했다.
새벽 4시, 장갑까지 낀 중무장자세로 주차장에 나왔다. 눈은 많이 오지 않았는데 기온이 낮아서 그런지 차의 앞 윈도 부분이 살얼음으로 굳어있다. 앞을 볼 수가 없다. 손으로 치워도 끄덕이 없다. 차에 시동을 걸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 액셀을 조심스럽게 밟았다.
이른 새벽 아무도 다니지 않은 길은 얇게 하얀색 코팅을 한채 누군가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씩 오가는 바람이 소리를 낼뿐 길은 적막 그 자체였다. 어디가 얼어서 눈먼 사람을 기다리는지 알 수가 없기에 차는 사람의 걸음만큼씩만 움직였다. 상귀리라는 마을은 중산간이어서 한라산 방향으로 올라가야 한다. 오랜만에 눈길을 운전하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약속시간이 있기에 마음은 조급했다.
애조로를 들어서니 눈은 더욱 거셌다. 때로는 거세게 오다가 한참을 쉬다가 다시 오기를 반복하는 눈 속을 헤치고 달려서 마을회관에 도착을 했다. 사람들이 움직이려고 나와서 상황을 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기도 전에 이동을 해야 했다. 카메라를 챙기고 오늘 동행자인 제주학연구센터의 조박사의 차에 올랐다.
상귀리의 자연마을인 소왕동에는 작은 고모가 산다. 그러기에 낯설지는 않은 길, 종종 와보는 길이다. 고모네집 가기 전에 이 지역 유명한 용천수인 소왕물이 있다. 소왕물 가기 전 도로가에 차를 세웠다. 늘 그렇듯 당은 주위에 민가가 없는 조용하고 으슥한 곳에 위치한다. 여기는 더욱 그렇다. 주위에 빛이 하나도 없다. 자동차의 라이트와 주민들이 머리에 쓰고 온 헤드라이트, 휴대폰의 프레쉬에 의지를 하고 짐을 내렸다. 모두 제사에 쓸 제수용품들이라 조심스럽다.
일행을 따라 밭을 가로질러서 걸었다. 아주 오래전 국민학교 다닐 때 겨울에 보리밭을 밟으러 다녔던 적이 있다. 겨울에 서리가 내리고 밭이 얼어서 공간이 생기면 보리가 제대로 자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겨울이면 다니던 봉사활동 보리밭 밟기였다. 오늘 걸어가는 밭길이 그 밭길과 같음을 느꼈다.
밭옆 커다란 나무 사이로 내려가야 한다. 소왕천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당으로 가는 길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일일이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당을 찾는 사람들이 나잇대가 많은 어른들이니 아주 따뜻한 배려다. 울참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처음 가보는 길이라 불빛이 없으면 사방을 짐작할 수가 없다. 양손에는 카메라 가방과 삼각대를 들어서 손의 여유가 없는 것을 알았는지, 친절한 조박사의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처음 들어서는 황다리궤당은 경건해짐과 신비로움을 느끼는 동시에 오싹함을 가져다줄 정도다. 누가 말했듯이 깊은 밤 혼자오기에는 두려움이 앞서는 분위기다.
당제는 시간을 특별히 맞추지는 않는 듯하다.
4시 30분경에 마을회관에서 출발해서 도착하자마자 준비를 하고 제를 지냈다. 나중에 카메라에 찍힌 시간을 보니 4시 56분 ~ 5시 13분이었다. 당제를 지낸 시작 시간이 5시경으로 보면 될 듯하다.
당제준비는 전사관이 총대를 멘다. 전사관은 당제의 모든 준비와 진행을 맡아하는 총괄담당자다. 예전에는 마을이장이 담당했으나, 최근 이장이 초헌관을 맡으면서 유교제례에 밝은 다른 마을 어른이 맡는 경향이다. 제수 준비뿐만이 아니라 제단에 진설하고, 제를 지내는 과정까지 모두 전사관 담당이다.
당제는 안쪽에 있는 송씨 할망당에서 먼저 했다.
바위그늘아래 조그마한 제단에 준비해 온 제물을 진설했다. 소박한 상이다. 희생은 앉아있는 듯한 모양의 닭 한 마리다. 시루떡과 돌레떡은 마을 떡집에서 주문했다. 구운 생선(옥돔), 명태, 과일 3종(사고, 배, 당유자), 대추, 밤, 곶감, 땅콩을 채소로는 미나리, 고사리, 콩나물을 준비했다. 미나리는 날 것에 소금 간을 해서 쓴다. 고사리와 콩나물은 삶아서 쓴다. 백지(소지), 지전, 시렁목도 준비했다.
두 개의 촛불을 켜고 초석을 깔고 도포와 유건차림으로 제복을 차려있은 삼헌관이 간단하게 유교식으로 제를 지냈다. 초헌관이 직접 고축告祝했다. 홀기笏記는 따로 없고 대축大祝도 없다. 홀기가 없으니 집례執禮를 두지 않고, 초헌관이 직접 고축하니 대축도 필요 없는 것이다. 마을 청년회장이 집사를 하고, 전사관이 옆에서 진설하고 제를 지내는 것을 도왔다. 마을제와는 규모가 많이 다르다.
황다리궤당은 바위와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바람이 피해 갈 만도 한데 추위와 싸라기가 몰아치는 느낌이다. 주위는 어두컴컴한데 힘차게 내리는 싸라기눈 줄기가 마치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마치 힘 있는 무사의 칼부림처럼 예리하게 얼굴을 때린다. 아프고 차갑다. 머리에 플래시를 한 주민들이 이동을 해버리면 현장은 말 그대로 암흑천지다. 춥고, 어두워서 마치 바위틈 계곡산장이다.
할망당에서 차례가 끝나니 그 과일과 제수를 하르방당으로 옮겼다. 하르방이 돼지고기 금기를 깨고 먹다가 걸려서 내쫓긴 경우라 부부지만 상을 달리 쓴다고 한다. 상을 차리고 삼헌관이 이동을 하고 종전과 같이 간단하게 차례를 지냈다. 소지를 하고 급히 철상을 했다.
마을회관으로 돌아오는 길, 서설인지 싸라기 눈이 함박눈으로 변했다. 세찬 바람과 함께 눈발이 허공을 맴돌다 덜어짐을 반복한다. 길은 소복하게 하얀 눈이 쌓였다.
제청인 마을회관 노인정에 도착했다. 밖의 차가움 때문인지 노인정안의 공기는 따뜻하기보다는 덥다. 제청에는 제수를 도와주는 부녀회장과 주민 몇 분이 있었다. 방금 제를 지내고 가져온 음식을 마루 위 상에 펼쳐놓았다. 음복을 하면서 언 몸을 녹였다.
원래 당제는 본향당에서 하는 본향굿, 당굿이었다고 한다. 심방이 주도하는 방식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마을에서는 메인심방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었다. 당굿을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심방이 대가 끊겼고, 1970년대 박정희정권 때 미신타파의 일종으로 모든 마을제나 당이 없어지면서 상귀리 역시 당굿이 없어졌다고 한다. 한참이 흘러 1990년대 마을제들이 부활하면서 당굿을 하려 했으나, 심방을 구할 수도 없었고, 비용도 많이 들어서 할 수 없이 지금의 유교식을 절충하는 당제의 방식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지금 당제의 제관은 3헌관과 집사뿐이다. 3헌관은 이장, 개발위원장, 노인회 대표가 맡고, 집사는 청년회장이 맡는다. 이들 제관은 포제의 제관도 겸한다. 인적 자원이 모자란 탓이다. 이장은 당연직으로 초헌관을 맡는다. 아헌관은 개발위원장, 종헌관은 노인회 대표다. 그리고 전사관을 따로 둔다.
과거 이장은 전사관, 총괄 책임을 맡는 것이 보통이었다. 근래 들어 이장이 당연직 헌관, 그것도 초헌관을 맡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사관은 다른 이가 맡게 된다. 이 마을의 경우도 그러하다. 모레 치르는 마을제는 다르다고 한다. 대축, 집례등등이 모두 선정되면 참여 제관만 10여명에 이른다고 한다.
제수 준비는 전사관과 부녀회가 맡는다. 이들은 역할 분담이 뚜렷한 편이다. 메는 제소에서 찐다. 메가 제대로 쪄졌는지가 한해의 운수를 좌우한다고도 얘기한다. 희생은 닭 한 마리로 할망 제단에만 올린다. 닭이 앉아있는 모습으로 전사관이 직접 준비를 한다. 돼지고기 금기는 그저 제물에 쓰지 않을 뿐 주민이나 제관, 집사 모두 먹는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메, 차조메를 산메로 올린다.
떡은 시리떡, 다데떡을 마련한다. 시리떡은 시루떡이다. 다데떡은 흔히 돌레떡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밖에 구운 생선(옥돔), 명태, 과일 3종(사고, 배, 당유자), 대추, 밤, 곶감, 땅콩 등을 준비한다. 채소로는 미나리, 고사리, 콩나물을 준비한다. 미나리는 날 것에 소금 간을 해서 쓴다. 고사리와 콩나물은 삶아서 쓴다. 백지(소지), 지전, 시렁목도 준비한다.
마을에 제의 관련 조직은 따로 없다. 마을회가 당제도 함께 관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장이 당연직 초헌관이 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당제의 비용은 자치단체 지원금 100만 원과 마을 자부담으로 충당한다. 단지 상귀리가 공항소음피해지역이라서 마을의 자부담금은 없다고 한다. 제소를 방문하는 주민들 음식 대접하는 데 대부분의 비용이 발생한다. 항상 적자가 발생한다고 이장은 걱정한다.
본향당 원형이 비교적 많이 보존되고 있고, 좀 드문 형태라 지방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이장님께 권유했다. 그래야만 뭔가를 행정에서 지원받을 수 있고, 지금의 원형이라도 좀 오래 보존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다. 문화재지정이라는 말에 전 이장님이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거 지정 돼버리면 개발이나 이용에 여러 가지 제한이 있어서 안됩니다." 딱 한마디였다. 그만큼 제도와 행정에 대한 불신이 크고, 불명확한 정보에 대한 오해가 많다. 이 마을에는 항몽유적지가 있고, 그 안에는 많은 사유지들이 있다. 그 사유지들은 문화재구역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가지 소유권행사에 제한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이유의 연장선상에서 하는 말이다.
상귀리 당제는 무속 전통을 유교식 제의로 전환한 대표적인 사례다.
제일, 제시, 제물 등 무속 전통의 주요 요소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제일이 정월 7일인 것, 행제를 아침 시간에 하는 것, 희생이 닭인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가 하면 유교 제의의 기본적인 요건도 어느 정도 따랐다. 심방이 하던 굿을 주민 대표들이 제관으로 참여를 한다. 원래 당굿은 여성중심인데 마을제와 같은 남성 중심으로 전환하였다. 여성의 참례를 아예 금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의 방식이 구술 중심에서 문자 중심으로, 무가에서 축문으로 바뀌었다. 굿은 오로지 구술로 기원하는 법이다.
상귀리 당제는 포제보다 앞서서 진행되는 아주 특이한 사례다.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포제를 지낸 뒤에야 당굿을 지낸다. 상귀리는 그만큼 당굿의 전통이 강하게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상귀리 당제의 변화는 지속되고 있다. 변화를 대표하는 양상은 편의를 좇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을 방문했을 때 어른들과 마을의 얘기를 직접 듣는 시간은 흥미롭기도 하지만 흔치 않은 경험이다. 그런 얘기를 해줄 수 있게 마을을 많이 알고 있는 어른들이 많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런 얘기를 해주는 어른들도 없다. 소위 말하는 "나때 .."시리즈가 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할머니댁 아랫목같이 따뜻한 방에서 조밥인 차조매를 먹으면서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새벽잠을 설치고, 살얼음판 같은 눈길을 헤쳐서 오느라 힘들었던 시간이 언제 있었냐는 듯하다.
밖을 보니 잠시 멈추었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새벽 6시 큰길은 한적하다 못해 허전하다. 이제 이 길을 달려 집으로 향해야 한다.
당굿을 하던 수백 년 전의 아득함을 떠나서 현실로 다가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