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몽유적지를 지나자니..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를 지날 때마다 떠오르는 추억이 하나 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이다. 등교를 하자마자 수업도 빼먹고 운동장에 있는 대형버스에 탑승했다. 어딘가로 간다는 얘기뿐, 행선지와 목적은 말을 해주지 않았다. 버스는 1시간여를 달려 소나무가 우거진 휑한 벌판에 멈췄다. 내리고 보니 또래 학생들이 이미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한복을 입은 여자분들도 군집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금의 항몽유적지 주차장과 그 옆 잔디밭이 있는 곳이다.
현장의 분위기는 엄숙이 지나쳐서 살벌했고, 여기저기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를 낀 멋있는 사람(?)들이 학생들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정도 학생들이 모이면 시끌벅적 시장통 분위기가 나야 정상인데 영 딴판이었다. 우리도 정해진 위치로 이동을 해서 부동자세로 서서 앞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시끌벅적하더니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오늘의 주인공인 듯한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당시의 실권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안내 방송을 해주어서 안 것인지, 우리가 직접 실물을 보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거나, 눈을 돌릴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항몽유적지 제막식에 참석하러 직접 내려온 것이라고 했다. 그게 1978년 6월 어느 날의 이야기다.
지금도 그 앞을 지날 때면 그때 그 모습이 떠오른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쇼킹한 상황이었기에 45년이 지난 아직도 잔상이 남아있다. 그 상황 하나만으로도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최고 권력자는 온다 간다는 얘기도 없고, 모두가 비밀스럽게 진행되던 때다. 현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야 하고, 고양이 한 마리 얼씬거리다가는 좌악 깔린 경호원들의 손에 사라져야 하는 시대였다. 그 속에 영문도 모른 체, 한참 예비고사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할 고3 생들이 끌려갔던 잊지 못할 추억거리다.
1970년대 후반 유신정부는 호국 이데올로기의 기치를 걸고 전국적으로 관련 유적을 찾아 정비를 하고 국민들이 방문하는 정신교육의 장으로 활용했다. 그 작업에 몽고라는 외세의 침입에 항거한 삼별초의 최후 항전지인 항파두고성이 선택된 것이다. 자주 호국정신의 상징으로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항파두리 정비사업에 무척 공을 들여서 준공까지 세 차례나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준공하는 날(1978년 6월 9일)에도 항몽순의비 제막식에 직접 참석했다. 그 후 정부 인사들이 제주도를 방문할 때나 학생들이 수학여행 시 꼭 거쳐 가는 이른바 ‘호국의 성지’로 성역화되었다. 지금은 포괄적으로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내성 충혼탑에 항몽순의비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 때문에 인지 항몽순의비라고 불렀다.
항몽순의비 제막식
박정희 대통령, 항몽순의비 제막식 참석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
-최후의 한 사람까지 외세에 항거한 고려시대 삼별초의 자주정신을 기리는 항몽유적지
-박정희 대통령, "참배객들이 몽고 침략을 물리친 그분들을 추모할 수 있도록 분향대 설치할 것"을 지시
-제주도민들 박정희 대통령 환영
출처 : 대한뉴스 제 1188호
정치적인 의도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정권이 바뀌면서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리 호들갑스럽게 제막식을 가지고 출발을 한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그 후 한참 동안을 방치하다시피 그대로 두었다가, 1997년에야 사적으로 지정이 되었고,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2010년 이후의 일이다. 2012년 제주 항파두리 항몽 유적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고 그에 따른 발굴조사와 복원, 정비사업을 진행했고, 2024년에 제2차 종합정비계획수립 용역 중이라고 한다.
이곳은 문화유산구역으로 지정이 돼있다. 577필지 110만559㎡중 지정구역은 867,615㎡, 보호구역은 232,944㎡다. 내성과 외곽토성 사이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 구역 내에는 안오름과 도로뿐만 아니라 많은 농지와 임야가 있다. 필지수나 면적에서 사유지가 조금은 많은 편이다(2014.9.30일 기준 52%). 사유지는 사적지로 지정 이후 매도 의사가 있는 사유지를 우선 매입하는 방식으로 매년 진행하고 있으나 속도는 더딘 편이다. 전체적인 항몽유적지 복원이나 개발이 어려운 이유다.
반대로 사유지를 가진 주민들은 문화재구역이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제약을 받는 상황을 불편해하고 있다. 마음대로 농사를 짓거나 건축행위를 할 수 없음에 사유재산권 침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항파두리는 애월읍 성귀리와 고성리에 속해있다. 항몽유적지의 중심인 내성과 장수물, 구시물은 상귀리다. 4대 문도 서, 남문은 상귀리, 동, 북문은 고성리다. 토성도 두 마을로 나뉘어 있다. 항파두리와 역사적 궤를 같이하는 군항포에서 파군봉을 거쳐오는 길은 하귀 1, 2리와도 연관이 있다. 항파두리는 애월읍 동부지역의 주요한 역사적 자원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제주도의 대표적인 고려시대 유산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요시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또 다른 시각도 있다.
삼별초의 제주 유입은 국가사로서만이 아니라
제주도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제주역사에서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외부세력의 지배를 받은 것은 몽고 100년이다. 일제강점기 36년의 거의 3배에 이르는 기간이다.
1273년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패하면서 시작된 몽고의 제주지배는 원나라가 망하는 1374년까지 계속되었다. 원은 좁은 섬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직접 통치를 했다. 몽고와 비슷한 환경인 초원에 말을 방목하면서 그들은 아무런 제약 없이 주인인양 탐라를 즐겼다. 고려의 중앙정부의 힘도 미치지 못하는 외딴섬 탐라에서 그들은 정복자였다.
지금 일제의 잔재는 외형상 볼 수 있다면, 몽고의 잔재는 우리 제주 사람들의 삶 곳곳에 문화라는 이름으로 녹아있다. 의, 식, 주 및 언어생활, 혈통, 성씨까지 가히 전방위적이다. 제주학 연구가 활발해지고, 몽고와의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제주의 원형을 찾다 보면 그 기원은 몽골로 귀착되는 경우가 많다. 몽고지배 100년 동안 몽고에서 전해진 문화임을 모르고 마치 제주 것인 양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당시 원과 비슷한 초원을 가진 제주의 환경이 원의 장기간 지배를 유발한 점도, 그들의 말을 들여와 일본 정복의 전초기지로 삼았던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지금 제주의 말의 문화가 원의 지배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찌 되었던지 당시 몽고의 지배는 탐라가 처음으로 외부 문물을 접하면서 급속도로 이식되었고, 척박한 제주 환경에서 먹고사는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점은 사실인 것 같다.
우리가 어릴 적에 어른들에게서 종종 "저 몽고 놈의 새끼"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러나 안 좋은 상황이나 말썽을 피운 상황에서 어른들이 내뱉는 말이라 직감적으로 제주 사투리 욕일 줄만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사람들을 괴롭히는 몽고인들을 욕하는 제주 사람들만의 말이었다.
"몽고인들의 핍박이 오죽 한에 맺혔으면 이들을 욕하는 말이 몇 백 년 동안 부모님들의 입에 붙은 듯이 전해져 내려왔을까? " 새삼 몽고의 지배 100년의 무게감이 현실로 다가오는 이유다.
최근 제주학이라는 이름으로 제주에 대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제주의 시작점인 탐라와 그 기원인 시작점을 찾는 일이다. 탐라라 불리던 시절 제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한다. 가끔 있어야 조선시대 이후 제주를 오가는 유배객이나 관리들이 방문일지 형식으로 기록해 놓은 자료 정도다. 그 자료에도 순수하게 제주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고 한다. 따라서 제주의 문화가 제주 자생적인 건지,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건지, 어디서 영향을 받은 것인지 구분할 수 있는 길은 없이 단지 추정 해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외부적 요인인 제주의 몽고지배 100년은 제주사회의 가장 큰 전환기였을 것이다.
"과연 몽고의 지배 100년이 없었다면 제주는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만 그래도 던져볼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그러기에 항몽유적지는 새삼 다른 의미로 다가옴은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