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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석(詩碑石) 마을, 나그네가 머무르지 않는다.

수산리를 다녀오는 길

by 노고록

온 동네에 가는 곳마다 시비석(詩碑石)이 있는 마을이 있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나그네를 맞이하는 시비(詩碑)는 마을을 벗어나는 곳까지 배웅을 한다.


"마을사람들이 작품을 전시해 놓은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몇 발자국을 가서 시비석을 가만히 보니 유치환, 나태주, 서정주 등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보아하니 이 고장 출신들의 시만은 아닌 듯하다.

마을에는 이런 시비석이 108개가 있다. 이 시비석이 안 보이면 마을을 벗어났구나 하고 생각하면 된다. 마을의 경계까지 널리 세워져있다. 이렇듯 시비석은 이제 수산리 마을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돼버렸다.



마을관계자와 얘기를 하다가 문득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왜, 하필 시인가요? 대중성이 없을 듯한데.. 이 마을이 시(詩)하고 무슨 특별한 관계가 있나요?"

나그네가 불쑥 던진 원초적인 질문에 당황한 듯 그 관계자는 오랜 고민 끝에 되돌려준 답은 "글쎄요"였다.

마을주민들조차도 마을에 시비가 널려있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인 듯싶었다.

마을에는 왜 시비석이 여기저기 서있는지, 왜 시비를 설치했는지를 알려주는 어떠한 설명이나 안내문도 없다. 궁금한 마음에 대답을 얻고자 2021년 마을에서 발간한 마을지인 물메향토지를 찾아보았다. 명쾌하게 왜 시를 테마로 선택했는지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단지 여러 개의 문장을 조합해하고 추론해 보건대 부족한 자원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 힐링, 경관개선, 지역창의 아이디어, 주변경관과 어울리는 것을 찾던 끝에 시를 선택했다는 의미로 보이는 문구들이 보일뿐이다.

주변 돌담과 잘 어우러진 시비석들

"물이 좋아 산이 좋아 힐링 마을 물메"는 마을이 가고자 하는 비전이다. 수산봉이라는 오름과 멀리 태평양 바다를 한눈에 볼 수 높은 자연적인 환경을 가졌다. 오름 앞에는 수백 년의 사연을 안고 있는 곰솔나무와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는 도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수몰마을의 아픔을 갖고 있는 인공저수지다. 인위적이라지만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잊지 못할 사연을 갖고 있는 마을이자, 스토리의 테마를 갖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때문인지 마을은 학구열이 높은 선비의 마을이다. 마을출신의 공무원과 교사들이 유독 많은 마을이기도 하다. 마을입구를 들어서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현수막 게시대는 항상 축하 광고로 만원이다. 마을의 분위기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나 문학적 배경을 테마로 한 관광지는 많다. 작품이 탄생한 배경과 그 작가의 이면을 엿볼 수 있다는데서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성지순례와도 같은 일이다.

우리나라도 유명작가의 생가를 중심으로 한 기념관이나 문학관은 전국적으로 널려있다. 요새 한참 인기 상승 중인 "폭삭 속았쑤다"에서 애순이가 부르짖던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시작되는 청마 유치환의 생가와 기념관은 거제도에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의 생가와 기념관은 강진에 있다.

나도 여행을 나설 때면 으레 그곳에 있는 문학관을 찾아본다. 작품의 배경과 직가의 내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강원도에 있는 이효석 문학관은 오래전 강원도 여행 때, 김유정문학관은 바로 얼마 전 다녀오기도 했다. 그 지역 여행을 가면 으레 들려야 하는 코스로 자리매김을 한 것을 보아서는 문학적 자원들이 지역의 가치를 높여주는데 기여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제주에는 그럴 정도의 유명작가가 없어서인지 아직 도내에는 문학작품이나 작가를 테마로 한 문학관이나 기념관은 없다. 이런 제주의 현실적인 토양을 감안한다면 이 마을에서 시비를 테마로 한 일종의 마을개발사업은 대단한 도전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왜! 하필 시죠?"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음이다. 마을에 있는 108개의 시비석 중에는 이 마을 출신 시인의 시 8편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건대, 시비 마을의 발단을 전혀 추측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시비석(詩碑石)은 2013년 지역창의 아이디어인 물메경관개선사업의 결과물이다. 20억이나 투자된 농림축산부의 마을 만들기 사업이다.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마을은 2012년 경관 개선사업을 준비하면서 한국시인협회와 교류를 시작했다. 2014년에는 시인 팸투어, 2015년에는 마을축제로 시낭송 대회를 개최했다. 2016년 5월 (사)한국시인협회는 수산리와 "시가 흐르는 마을 돌담길 조성사업"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다. 협약으로 협회는 자체 선정한 한국 100대 시인의 작품 100편을 수산리에 제공했고, 수산리는 돌담길 조성사업에 시 작품을 활용했다.


시비석은 2016년에 조성한 마을 탐방로 곳곳에 산재해 있다. 힐링을 테마로 "시와 주변경관자원을 접목"한 탐방로다. 주변경관자원은 돌담이다. 마을에는 유독 돌담이 많다. 집과 집사이, 밭과 집 사이는 다 돌담이다. 돌담이 경계석이자 이 마을 주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문화다. 이 돌담길을 따라가면서 돌담 사이사이에 시비석을 세웠다. 길을 가다가 유심히 보지 않으면 돌담과 어우러진 시비석을 지나치는 경우도 많다. 10년이란 세월을 머금은 시비석들은 이제 온몸이 희끗희끗하다.


마을은 사업의 중심에 시비석을 넣었지만 10년이란 세월 동안 그들은 말 그대로 항상 시비(是非) 거리였고, 곁가지였다. 마을에 유명한 작가의 시비석이 하나둘 있는 곳은 많지만, 100여 개의 시비석이 마을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곳은 없다. 도내에서는 문학을 테마로 한 유일한 마을이다. 이처럼 시비석 마을이라는 유니크한 테마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마을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때 시라는 테마를 마을의 중심에 놓으려고 한 적이 있었다. 2018년 창조적 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마을에 새로 들어서는 물메문화복지센터에 시인학교를 추진한 적이 있다. 수산봉과 저수지가 보이는 탁 트인 공간에서 자연과 풍류를 노래할 수 있는 시인이 되어보고, 시비석이 있는 마을길을 걸어보면서 문명의 떼를 씻겨보는 힐링을 꿈꾸면서 말이다. 그러나 물메문화복제센터가 준공이 되고, 개관이 되었으나 실제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있겠지만 공식적으로 공개된 것은 없다. 단지 결과적으로 당초의 계획인 시인학교가 운영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뿐이다.


시가 있는 탐방길을 활용한 체험휴양마을을 만들어보고자 지정도 받았다. 마을의 대표적 생산물은 초당옥수수다. 전국적으로 이미 많은 지명도를 갖고 있다. 마을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자원을 활용한 체험을 하고 숙박을 하면서 힐링을 할 수 있게 기획을 했다. 그러나 아직 뚜렷한 움직임은 없다.



수산리 하면 연관검색어인 시비석은 10년이 지난 지금 마을 곳곳에 그냥 우두거니 서있는 돌비석이 되었다. 비석을 하얗게 세월을 머금었고, 글자들은 풍화작용으로 가까이나 가야 시구들을 인식할 정도가 되었다. 시비석은 일정한 외형을 갖고 있어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옆의 돌담과 아주 잘 어울려서 인식이 안될 수준인 것도 여럿이다.

마을입구 게시판과 마을을 횡단하는 올레꾼들


오늘도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의 현수막 게시대는 바쁘다. 무슨 좋은 일이 많은지 온갖 축하 현수막 투성이다.

낯선 이방인들도 보인다. 올레 16코스를 걸어가는 올레꾼들이다. 요새는 휴일여부를 가리지 않는다. 평일에도 길을 가는 나그네들이 꽤 있다. 시비석은 오늘도 열일을 하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한다.


마을에서 오래전 꿈꾸었던 "시가 흐르는 마을 돌담길"에는 아직은 정적만 흐른다.

시는 흐르지 못하고 우두거니 서있다.

올레길을 오가는 나그네들은 시비석을 그냥 지날 뿐 발길을 멈추질 않는다.


시비석은 오가는 나그네의 발목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훔쳐서 나그네와 시는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럼 시는 비로소 나그네가 가는 길을 따라 흐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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