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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과 현대가 어우러진 마을, 유수암리

유수암 마을에서

by 노고록


느림의 미학이라던가, 걷다 보면 새삼 보이는 게 많다. 오늘도 그런 기쁨을 느껴본다.

여러 가지 이유로 자주 방문하는 유수암 마을, 오늘은 현장포럼을 하는 날이라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마을을 찾았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걸어야만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마을의 분위기를 알고 싶었다.



마을입구 풋살구장 개장이라는 현수막이 있었다. 어딘지 궁금하기에 안내판을 보고 찾았다. 그냥 쫓아서 간 곳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인 듯 주변이 훤하게 보이는 동산이다. 고려시대 태암감당(태산사, 천고사라고 하는 자료도 있음)이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마을 사람들이 절동산(절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예전에는 마을 운동장이 있었다고 한다. 동산의 북쪽은 팽나무군락지에 둘러싸인 곳으로 그 아래 고려시대 절이 있었다고 한다. 삼별초군을 따라온 고승이 세운 절로 지금은 없어지고 절터만 남아있다. 하지만 이 동산 위에 절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우거진 큰 나무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면 마을 전체가 보이고 멀리 바닷가까지 보일 정도다.

그런 경관이 있어서인지 한 구석에는 오래된 액자모양과 원색의 높다란 의자가 있다. 아마 마을에서 포토존으로 설정을 해 놓은 듯하다. 의자는 세월의 풍상을 먹어서 인지 이리저리 페인트가 벗겨져 많이 훼손되었다. 아마 2010년경 노꼬메 권역사업을 하던 시절 만들어 놓은 듯하다. 액자사이에 서면 탁 트인 전망에 꽤나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숨은 비경이다.

그대로 두어도 사람이 찾음직한 장소, 철망으로 가려진 현대식 풋살구장이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다.

20250514_173936.jpg 포토존, 액자사이로 멀리 오름과 바다가 보인다.


절동산에 들어서는 입구에 섰다. 대각선으로 가장 먼 곳, 풋살구장 건너에 눈에 확 들어오는 안내판이 있다. 궁금해서 가서 읽어 보고 싶은데 풋살구장에 가려서 입구가 안 보인다. 아니 없는 듯하다. 풋살구장 사이를 몸을 비틀면서 겨우 빠져나갔다. 지방문화재인 "금덕 무환자나무 및 팽나무 군락지"라는 안내판이다. 읽고 그 뒤를 보니 비스무리한 넓은 언덕에 팽나무가 수두룩하다. 잘 정돈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팽나무가 꽤나 된다. 여기가 팽나무 군락지인 모양이다. 사실 마을을 돌아다니는 길 유난히도 팽나무가 많기는 했다.


안내판과 포토존 사이에는 팽나무 군락지를 따라 밑으로 난 가파른 계단이 있다. 숲사이 나무 계단은 일직선이다. 108 계단이라고 한다. 계단 좌측으로는 조그만 정자가 있고, 정자에 앉으면 동산 아래까지 한눈에 보인다. 계단을 내려오면 이 마을이 있게 한 용천수인 유수암천(태암천)이 나온다. 인근에 항파두리성에 주둔하던 삼별초군들에게 식수를 공급해 주었고, 사시사철 물이 흘러서 주변마을까지 식수를 공급해 주던 생명수다. 1987년 출향민의 도움으로 지금같이 깔끔하고 깨끗하게 잘 정리되었다는 비석이 있다.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오기 전 이곳은 동네사람들의 식수원이자 빨래방, 목욕탕이었다. 마을의 모든 정보가 흐르는 게시판, 옳고 그름이 가려지는 재판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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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문화재 안내판과 108계단, 유수암천


제주의 마을은 용천수가 있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형성됐다.

그러기에 바다를 끼지 않는 마을은 드물다. 유수암은 드문 마을에 속한다. 전형적인 제주의 중산간 마을이다. 큰 노꼬메 오름을 비롯한 여러 개의 오름을 배경으로 해발 200~250m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이름 유수암은 한자로 流水岩, 직역을 하면 물이 흐르는 암석 또는 암석사이에서 물이 흐르는 곳이라는 의미다. 이 마을의 중심인 ‘유수암천(泉)’의 비석에는 “한라산 서북 아래 드리운 곳에 우뚝 솟은 절마루! 그 아래 십리에 봉소형(蜂巢形)을 이루었고 감천이 용출하니, 유수천(流水泉)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을의 이름을 둘러싼 확실한 기록은 없다.


원래 마을은 유수암(하동)과 검은데기(상동, 금물덕리)로 이루어져 있다. 1894년 고종 때 지방제도 개혁령에 따라 둘을 합쳐서 금덕리라 부르다가, 1914년 구장제에 따라 상, 하동이 각각 금덕 1,2구로 변경되었다. 1948년 구장제 폐지에 따라 다시 금덕리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유수암과 거문덕이라고 불렀다. 1959년 지명제정위원회는 조사자료에 의하면 금덕리는 유수암과 거문덕이 마을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69년에는 정부의 정책으로 웃병디인 금덕리 1038번지 일대 금덕개척단지를 만들었다. 이처럼 오락가락하던 마을 이름은 1996년 마을주민의 제안으로 옛 지명인 유수암리로 개칭했다고 한다. 지금 유수암리는 본동과 거문덕이, 상동으로 부른다.



유수암상동인 금덕 개척단지는 1969년 정부의 "농가소득증대특별사업지원정책"에 따라 조성되었다. 양잠과 축산으로 주민들의 소득증대를 하고자 했다. 지금의 원형광장 주위에 30세대를 입주시키고, 가구당 90ha의 토지와 대지 300평을 10년 거치 20년 상환으로 분양했다. 농업선진국인 이스라엘의 모방하여 마을 중앙에 원형 로터리를 만들고, 사통팔달 연결되는 마치 현대판 도시를 연상시키게 구성을 했다. 원형광장 900평의 땅은 30세대 주민들이 공동소유토록 했다. 학생들이 공부하기 위한 장전초 금덕분교장도 만들었다.

그러나 초기 정부와 주민들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산 견사가 덤핑으로 국제사회에 나오면서 마을의 견사가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후 융자금 상환에 허덕이게 되면서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고, 단지는 당초 취지가 무색해지고 텅텅 빈 마을이 되었다. 인구가 급감하기 시작하면서 학생의 감소로 1992년 학교도 장전초로 통합되었다.

한때 썰렁한 마을로 사람 사는 체취가 사라져 버린 폐가만 남아있던 마을이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2002년 평화로가 마을입구를 관통하면서 교통 접근성이 대폭 개선되었다. 평화로를 오고 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마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주민이 없는 마을이다. 소문에 소문을 타고 2010년 이후 이주민과 귀농인 급증했다. 2023년 기준 200여 세대의 마을로 발전하였다. 2011년 955명이던 유수암리 마을의 전체 인구는 2023년 2,143명으로 1,188명이 증가했다. 증가 인구의 대부분이 유수암 상동으로의 유입이다. 한때 유수암 2리로 분리하자는 움직임도 있었다.

현재는 원형광장과 옛 금덕분교장이 있던 누리터를 중심으로 마을공동체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폐가와 농가만 있던 마을도 타운하우스, 빌라, 전원주택들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민박, 카페, 음식점, 게스트하우스들이 들어서면서 관광객을 중심으로 유동인구도 늘어나고 있다.

마을이 제대로의 모습을 갖추면서 사람이 사는 마을로, 특색 있는 마을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유수암 상동.jpg 상공에서 본 유수암 상동의 모습, (출처: 다음 지도)



상동과 달리 유수암 본동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제주스러운 옛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다. 마을길을 걷노라면 아주 오래전 시골 할머니집에 놀러 갔을 때의 감성이 밀려온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은 가는 곳마다 팽나무가 있고, 집마다 올레가 있다. 엉성하게 쌓은 삐죽삐죽 낮은 올레 돌담길이 오가는 나그네의 궁금증을 유혹한다.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마당은 어떤 모습일까? 누구네 집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들이다. 올레는 우영팟을 통해서 들어간다. 우영팟에서 재배하는 작물은 판매용이 아니고 집에서 식구들이 먹을 자가소비용이다. 또한 이웃들의 곳간이 되기도 한다. 집들은 생긴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초가는 없으나 그 초가의 기틀 위에서 벽을 갈고, 지붕을 갈고 창을 낸 흔적이 보인다. 몇 번의 세월과 변화를 겪었음직한 모습들이다.


제주에서 집들은 길가에 바로 접한 경우는 드물다. 길을 걷다가 바로 집안을 들여다볼 수는 없는 구조다. 구불구불한 긴 올레를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마당이 나오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올레입구에는 집을 가리고도 남을 커다란 그늘을 가진 수목들이 있다. 팽나무나 멀구슬나무가 대부분이다. 때로는 그늘이 되어서 이웃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강한 비바람으로부터 살림집을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때 그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나지막한 제주스러운 마을의 모습이다.

쉬었다감을 청할 집주인이 긴 올레에서 뛰쳐나올 듯하다. 마침 어둑어둑 해지는 저녁이다. 지친 식구들의 허기를 달랠 저녁밥을 하는 아궁이의 연기가 피어오름 직한 마을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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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모습, 길 올래뒤에 보이는 집, 장독대와 수목에 둘러쌓인 집, 길 한복판에 오래된 팽나무가 있다

마을로 가는 길은 전체적으로 오르막이다. 특히 중앙에 있는 솔동산을 오르는 길은 차라리 등산코스다. 자주 왔던 길, 오르던 길이지만 기계의 힘을 빌어서 오르던 길, 걷고 있자니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더욱 실감하는 것은 마을 중앙에 서면 해안선이 보인다는 것이다. 앞에 높은 오름이나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 휑하니 뚫린 공간에 시선이 멀리 바닷가에 오름과 해안선까지 닿는다.

여기에 서기까지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풍광이다. 막혔던 가슴이 갑자기 뻥 뚫리는 기분, 해안선이 밀려오는 듯한 기분이다. 나무 숲사이로 몸을 비틀면 보이는 아득한 수평선의 끝은 수백 년 전 이 마을에 보금자리를 튼 선조들의 흥분된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20250514_174135.jpg 나뭇사이로 탁 트인 전망이다. 멀리 해안가가 보인다.

유수암은 조용하고 한적한 제주의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이다.

본동은 옛 마을의 모습이 살아있는 제주스러운 생태마을이다.

상동은 인위적으로 조성이 된 현대스러운 마을로, 모두가 이주민이다.

한 마을에 과거와 현대가 물리적으로 서로 분리되어 존재하며 상생하고 있다.


현대와 과거, 원주민과 이주민, 개발과 보존의 다른 모습들이 어울리면서 나름대로의 방법과 생각으로 마을공동체를 꾸미고 살아가고 있다.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닮은 듯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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