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2리 이야기(1)
구불구불한 밭길, 산길을 버스로 돌고 돌아서, 다시 내 키만 하던 억새 사이를 걸어 헤쳐나가야만 오름 정상에 빼꼼하게 보이던 할머니 산소 벌초 길이다. 이곳을 우리는 볽은 오름이라고 부른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이곳이 볽은 오름은 아니고 한라산 인근에 있는 붉은오름의 한 자락 정도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그렇게 불렀기에 우리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관습, 습관이 무섭다. 모두가 그렇게 부르다 보면 그렇게 된다.
머나먼 벌초 길.. 어린 내가 걷기에는 고행 길이었다.
여기까지 오려면 당시 노형오거리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하루에 몇 차례만 다니는 시외버스를 시간 맞추어서 타야 한다. 지금 노형 5거리 로터리 어느 근방에 당시에는 허름하고 조그만 학고방 닮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담배도 팔고 버스표도 팔면서 몇 가지 과자도 파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기소 같은 곳이었다. 서귀포에서 당시 중문 고속화 도로(후에 제2횡단도로-> 지금의 1100 도로 )를 가는 삼화여객 버스를 타고 노형에서 내린다. 당시는 오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구멍가게 앞에서 기다리다가 시외버스를 탄다. 버스는 밭과 과수원뿐이던 지금의 노형 정존마을을 한 바퀴 돌고 광령 1, 2리를 지나서 종점인 여기서 멈춘다. 지금도 눈 감으면 당시 정존마을을 달리던 시골버스의 모습이 떠오른다. 밭담과 숙대낭으로 둘러싸인 시골길 시골버스다. 버스의 마지막 손님은 아버지와 나 단둘이다. 한참을 달려 버스는 주차장이랄 것도 없는 시골마을 공터에 멈춘다. 허름한 집 몇 채에 전형적인 시골풍경이었던 마을로, 주위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멀쑥한 숙대낭 몇 그루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버스를 내리면 연이어지는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나중에야 원광요양원이 생기고 주변이 정리되면서 산소까지 가는 길이 조금 편해졌지만 그전에는 지금 원광요양원 첫 주차장 맡은 편 큰 소나무를 의지하면서 억새밭을 걸어야 했다. 아버지는 앞에 서서 낫으로 길을 개척하면서 작은 내가 따라오기에 편하게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가다 보면 억새와 가시에 찔리고 뜯긴다. 잔뜩 상처만 남는다. 억새밭을 벗어나 동산이 보이게 되면 당시 금방 심은 듯한 키 작은 소나무들이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풀린다. 묘소 돌담에 서면 멀리 시가지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딱 한마디 전망이 좋다는 느낌이다. 그 전망에 좋아서 힘든 길을 걸고 걸어서 여기에 산자리를 쓴 듯하다. 저절로 감탄과 한숨이 나온다. 감탄은 멀리 수평선까지 보이는 절경에, 한숨은 이 멀리까지 올라온 지친 후손의 한숨소리다. 선친과의 추억이 멈춘 지 30년이 지난 지금, 그 조그맣던 소나무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산소의 앞뒤를 가리고 덮었다.
이곳을 예전에는 개척단지, 양잠단지라 불렀는데
지금은 행정리인 애월읍 고성2리다.
1967년 12월부터 1968년 봄사이 억새밭이었던 임야 120ha에 40 가구가 새로 이주를 해오면서 조성된 희망의 개척단지다. 당시 부가가치가 있던 양잠으로 소득을 올려보자고 정부가 계획적으로 주도했기에 인근 유수암 상동과 같이 양잠단지라고 불렸다. 척박한 땅에 농사보다는 뽕나무를 심고 양잠을 하면 농가수입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초기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잠깐 동안 반짝 특수를 누렸다. 당시에는 학생들도 많아서 1974년부터 지금의 부녀회관에 교습소가 있었고, 주민들의 계속된 요구로 1980년에는 지금의 제주외고 자리에 주민들이 기부한 토지 위에 상전(桑田) 분교를 개교했다. 상전은 말 그대로 뽕나무밭이란 의미다. 이후 값싼 중국견사의 수입과, 익숙지 않는 양잠농사의 어려움으로 주민들이 이탈하고, 포기함으로써 마을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한때 마을의 번성을 희미하던 학교도 1992년 12년 만에 폐교하기에 이르렀다.
추억이 있어서 인지 가끔 찾는 고성2리는 유독 정겹다.
지금 마을회관이 있는 장소는 예전 내가 탄 시외버스의 종점이었다. 마을 조성 당시인 1967년에 지은 건물로 당시 누에고지를 팔던 구판장이자 마을회관이었다. 지금은 부녀회관이라는 입간판을 달고 있다. 외벽을 말끔하게 도장을 해서 그런지 세월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당시 마을의 중심지였던 이곳 주위에는 마을의 흥망성쇠를 같이한 1967년생 주택들이 더러는 아직도 남아있다. 수풀과 잡초에 둘러싸인 체 입구를 잃어버린 폐가가 되었고, 그 모습 그대로 말끔하게 정리된 모습으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소유주는 대부분 다른 곳에 주소를 둔 사람으로 최근에 바뀐 것을 보니 원래 이 마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마을이 고급 전원주택 단지로 변했다.
조성 당시 들어온 40 가구 중 현재까지 마을을 지키고 있는 가구는 단 2세대라고 한다. 희망차게 시작됐던 당초 계획과는 달리 양잠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고 인적이 드문 사람 사는 온기가 없는 마을이 되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지금은 고급 전원주택단지가 되었다. 마을에 들어서는 입구부터 풍기는 냄새가 예전과는 다르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는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있고, 길가 양옆으로 들어선 높고 낮은 다양한 건물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어느 하나 평범한 모습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없다. 마을의 자연을 마치 정원 삼아 들어섰다. 이들은 모두 "나 잘났소"를 외치는 모습이다.
마을은 전체적으로 한라산 방향으로 올라가는 오르막이다. 마을 입구에 서면 비스듬한 모습이 보인다. 언덕 중간중간 임야 사이에는 불쑥불쑥 마치 성 같은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이 주택들의 사방은 탁 트여서 멀리 바닷가뿐만 아니라 주위 들녘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전망을 보자고 억새밭 사이에 지은 집들이다.
마을의 스카이라인과 정체성을 바꿔놓은 전원주택과 타운하우스, 공동주택들은 가장 제주스럽던 마을의 문화까지 바꿨다. 마을은 비싼 집으로 가득하지만 사람은 없다. 한 달에 몇 번, 일 년에 몇 번 잠시 왔다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집들은 높은 외제 돌담(제주방식의 돌담이 아님)과 철제 울타리로 경계를 만들어 놓았다. 비싼 집에 비싼 물건들이 있을 것이고, 사람이 늘 사는 곳이 아니기에 걱정을 담은 듯하다. 걸어서 헉헉거리면서 오가던 길에는 차장을 꼭꼭 닫는 외제차들이 오갈 뿐이다.
"내가 이곳까지 와서 그런 것(마을)까지 신경을 써야 합니까?"
이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과 어울리지도 않지만, 마을에 관심도 전혀 없다.
"내가 이곳까지 와서 그런 것(마을)까지 신경을 써야 합니까?" 퉁명스럽게 던지는 말이 가슴에 박힌 듯 마을에서 만난 전이장님이 건네주는 말이다. 이 말을 하고서는 이젠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다.
이들은 수백 년, 수십 년 동안 마을이 만들어 놓은 자연과 문화 가치를 밟고, 마시고 살면서도 그런 공유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다. 단지 몇 평의 땅덩어리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서도 제멋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젖어있다. 그러기에 그들을 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차갑고 냉담하다. 그저 왔다가는 관광객 정도로 인식을 하게 된다.
이제 마을이 공동체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이 공동화가 되어가고 있다.
마을주민들을 동네 삼춘이 아닌 경외의 눈으로 쳐다봐야 하는 서울사람, 외방손님이 되고 있다.
마을은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야 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