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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균 Jan 23. 2017

“아빠, 일어나요.”

적바림 (2)

1     


“아빠, 일어나요.”


둘째 목소리였다. 나는 아직 잠결이었다. 고개만 살짝 들고 물었다.


“몇 시야?”
“아홉 시예요.”


지난 밤 자정 조금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거의 9시간을 잤는데도 몸이 묵지근했다. 간신히 눈을 떴다. 둘째는 벌써 옷을 갈아입은 채로 있었다.


둘째는 우리 집에서 제일 먼저 일어난다. 새벽에 홀로 일어나 제 방에서 책을 보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가 많다. 제 깜냥에 시간이 됐다 싶으면 식구들을 깨운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큰 목소리로 ‘일어나’를 외치고 다닌다.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는 우리 부부가 ‘영감’이라고 부른다. 잠이 없다. 네댓 살 먹은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낮잠 자는 시간을 갖는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 둘째는 그 시간을 자주 맨 정신으로 있었다. 집에서 쉬는 날에도 거의 낮잠을 자지 않았다.     


2     


어제 저녁이었다.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7살짜리 막둥이가 내게 무언가를 물으러 왔다. 책에 정신이 팔려 한참 대답을 하지 못했다/않았다. 나는 막둥이가 거듭 몇 번을 부르고 나서야 마지못한 듯 짤막하게 대답했다. 곁에서 제 남동생과 놀고 있던 큰딸이 한 마디를 날렸다.


“아빠, 아빠는 왜 그렇게 자식들에게 애정 없이 대해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3


며칠간 눈이 내려 제법 쌓였다. 눈이 내리면 아이들과 아파트 입구 안쪽에 있는 정원 숲 사잇길에서 눈썰매를 탄다. 둘째가 며칠 전부터 썰매를 타러 가자고 노래를 불렀다. 토요일에 겨우 한 번 탔다.


어제는 정읍에 계시는 어머니를 뵙고 오후 느지막이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 내내 눈이 계속 내렸다. 둘째가 집에 가면 썰매를 타자고 거듭 약속을 요구했다. 그러마고 대답했으나 오자마자 침대에 누워버렸다. 주말에 정읍 누나들과 나눠마신 막걸리 숙취 때문이었는지 몸이 무거웠다.


한 숨 자고 일어나니 저녁 7시가 넘어 있었다. 둘째를 보았다. ‘뭐 저런 아빠가’ 하는 냉랭한 기운이 표정에 짙게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아들, 우리 썰매 타러 갈까?”


1초가 될까 말까 한 사이를 두고 둘째가 대답했다.


“그래요. 가요.”


우리는 그렇게 ‘야간 썰매’를 탔다.     


4      


제 아빠가 오지게 늦잠 잔 덕분에 오늘 막둥이는 10시를 훌쩍 넘겨 어린이집에 갔다. 3살 무렵부터 다니는 어린이집이다. 제 몸보다 큰 가방을 등에 매고 아장거리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7살이다.


막둥이는 4살 무렵부터 제 스스로 양말을 신고 옷을 갈아입었다. 평일 아침이면 모두 정신없이 바쁘다. 옷 입혀 달라고 골을 내봐야 소용 없다는 것을 막둥이는 일찌감치서부터 깨달았을 것이다. 오늘 아침 서둘러 밥을 차리다 홀로 거실에서 옷을 입고 있는 막둥이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하얀색 긴 양말을 신는 손놀림이 능숙했다. 문득 가슴이 짠해졌다.


5


요며칠간 ‘주부 우울증’ 비슷한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온몸에 맥이 없어지고, 기분이 처졌다. 아이들이 저희들끼리 놀다가 서로 입씨름이 벌어져 소란해지면 나는 퉁명스럽게 소리를 꽥 지른다. 그러자마자 ‘내가 왜 이러지’ 하는 회심에 빠져 괴로워하다 여전히 입씨름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본다. 이쯤 되면 중증 조울증이다.


언젠가 아침에 몸이 무거워 눈꺼풀을 들어올리기 힘들어지거나, 이즈음 같은 겨울에 눈이 펑펑 내려 정원 숲 사잇길에 하얀 솜이불이 쌓이거나, 아침에 늦게 일어나 서둘러 양말을 신기라도 하게 되거나 하면 나는 불현듯 ‘아빠, 일어나요’, ‘아빠, 썰매 타러 가요’ 하는 둘째 목소리가, 홀로 하얀색 양말을 신는 막둥이가 그리워질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그저 커간다. 눈 그친 파란 겨울 하늘이 시리기만 한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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