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글들

어쩐지 쏟아내듯 쓰는 글

by 정젤리



1.

어디선가 모국어를 다시 정한다면 한국어를 선택할지 영어를 선택할지 하는 질문을 보았다. 영어로 논문도 쓰는 남자친구는 망설임없이 영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일상이 배는 편해질 것 같아. 하지만 나는 그래도 한국어를 선택할 것 같아. 내 사춘기의 시작에는 시인 백석의 여승이 있었고 그 사춘기의 끝에는 시인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가 있었다. 내 모국어가 영어였다면 내 세상에는 다른 영어로 된 아름다운 시들이 있겠지. 어느 쪽이 더 좋다 라고 말할수는 없지만, 나는 기와 끝에 내리는 눈발 같은 이 언어로 지어진 내 사춘기를 좋아한다.



2.

친구는 요새가 사춘기 같다고 했다. 사랑받고 싶어하면서 어쩐지 별 영양가 없는 생각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피부 트러블도 특히 더 많이 나는 것 같지 않니. 사춘기는 생각할 사 자에 봄 춘 자를 쓴다고 했다. 그러게 싱숭생숭한 걸 보니 우리 사춘기인가 봐. 봄은 참 이상하다. 그저께는 이만큼 추웠으면 어제는 요만큼 춥고 오늘은 그보다 덜 춥고, 내일은 고만큼 더 따뜻해야 할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지 않다. 오늘은 셔츠만 입어도 좋았는데 내일은 비도 오고 바람도 불어서 외투도 입어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다시 볕이 환하고. 그래도 봄이 봄이구나 하는 걸 나는 집 앞의 장미를 보고 알았다. 장미는 그제는 볕을 밭아서 봉우리가 트고 어제는 물을 한참 먹고 분홍 잎이 나왔다. 봄은 가만가만 따뜻해져가는 날씨만이 아니라 싹도 틔우고 꽃도 피우고 하는 다정한 손길인가보다.



3.

작업이 또 하나 끝났다. 완전히 다 끝난 거라고는 하기 어렵지만, 서두른 덕에 어제 밤에 메일을 보냈다. 고맙고 지긋지긋한 노트북 화면을 닫아버리고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핸드폰 화면을 켜고 펜을 들었다.

하고싶은 일을 일로 삼으면서 좀 슬픈 일은 일은 별로 하고싶지 않은 일이 된다는 거다. 나는 내내 그림그리는 일을 하면서 눈도 아프고 허리도 좀 아픈 것 같고 별로 안 하고 싶고 그랬는데 노트북 뚜껑을 덮자마자 그림이 그리고 싶어서 펜을 꺼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들을 마구 그렸다. 물론 정말 물리적으로 손가락이 아파서 엄청 많이는 못 그렸지만. 이런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글로 남기려고 썼는데, 쓰고보니 영 이상하다.



4.

향수를 좋아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 세상에는 정말 천만 가지가 넘는 향수들이 있고,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코가 있다.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건 없으니까, 향수들 수에 향기를 맡을 코의 수를 곱하는 식으로 셈하면 정말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향기들이 있다. 이건 마치 하늘에 뜬 무지개에서 눈을 감고 한 가지 색을 고르는 것과도 같다. 초록이 반 방울 섞인 노랑과 반의 반 방울 섞인 노랑은 아주 조금은 다를거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있잖아,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