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와 쇗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어렴풋이 날 때 즈음부터, 아마도 몇 마디 말을 할 줄 알면서부터 나에게 있어 할머니는 친할머니 한 분이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태어나서부터 함께 살았던 할머니. 그러니까, 엄마는 삼십몇 년 시어머니를 모셨던 장한 며느리였던 것이다. (엄마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한번 따로 해야겠다.)
우리 할머니는 말 수가 굉장히 적은 분이셨다. 좋다, 싫다, 괴롭다, 짜증 난다, 그 어떤 감정 표현도 밖으로 내보이지 않으시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지금 이 상황에 만족을 하시는지, 뭐가 드시고 싶으신지, 추측에 기댈 뿐 정확히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우시면 빙그레 웃으시는 걸로 적절히 알아들어야 했고, 기분이 좋지 않으시다면 그 말 수 없는 분이 더욱 말이 줄어들고 마음의 동굴 속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버리신다.
그런 할머니와 손녀인 내가 어떤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어렸을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줄곧 엄마와 대화를 나누었고, 철이 든 시점부터 스무 살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에도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 방에 들려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문안 인사를 드릴뿐, 할머니께 먼저 말을 건 적도, 때로 할머니가 식탁에 앉아 계신다고 해서 곰살맞게 그 앞에 앉아 할머니와 시간을 보낸 기억은, 아무리 떠올려봐도, 없다.
그토록 쌀쌀맞았던 손녀는 할머니가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신 그 해, 엄마, 아빠를 도와 할머니를 보살피면서 조금씩 생각을 달리 하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아흔두 살 되시던 해, 할머니의 기력은 눈에 띄게 약해지셨고, 그 전에도 자주 낮잠을 주무시긴 했지만 그 해 들어서는 한낮에 유달리 많이 누워계셨다. 평생 담배를 태우셨던 분이고, 식사 후에는 꼭 담배를 태우러 집 앞을 나가셨는데(엄마는 할머니의 흡연을 끝내 말리지 못하셨고, 이에 대해 내내 속상해하셨다.), 그즈음부터는 담배를 태우러 나가는 횟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스스로 화장실을 드나드는 것조차 힘들어하셨고, 결국, 할머니를 집 근처 요양원에 모시게 되었다. 병원 진단 결과, 오래 앓고 계시던 당뇨 증상에 더해 할머니 폐에 모양이 몹시 좋아 보이지 않는 혹이 보인다고 하였고, 아흔 살 노인에게 수술은 오히려 좋지 않은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일단 '지켜보자.'라고 하셨다. 그렇게 또 몇 개월이 흘러 해가 바뀌자마자 너무나도 추웠던 1월의 어느 일요일 아침,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조반을 드시고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계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만히 눈을 감으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1년여의 시간 동안 할머니와 가까이 시간을 보내면서 할머니의 환한 웃음을 보았고, 할머니의 정을 느꼈고, 할머니만의 화법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할머니 나이가 예순 일 때 태어난 우리 집의 첫 손주이자 첫 손녀인 나를 제일 예뻐하셨던 것도, 많은 말씀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러고 보니 내가 밖에 나갈 때마다, "차조심하고, 길조심 해,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오면 된다고 여러 번 말씀드려도) 쇗대(=집 열쇠) 챙겼냐."라는 말씀만은 꼭 빼놓지 않으셨던 것도, 온 가족 식사 중에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트림 소리에 "너 이제 시집은 다 갔다~"라는 할머니만의 유머러스함까지도. 할머니의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버려서 할머니와 뭘 더 할 수 있는 게 없던 그때서야 하나, 둘 떠올랐던 것이다.
항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계신 분이었기에,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계시겠거니 했던 안이하고 무심했던 지난날의 내가 한탄스러웠다.
할머니를 떠나보낸 지 한참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제야 철이든 손녀는 '나의 할머니'에 대한 작지만 소중한 추억이 기억 속에서 흩어져 없어지기 전에 이렇게 기록으로나마 남겨 두는 것으로 할머니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