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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Sep 26. 2022

우리 집 팬트리

신축 아파트 구경하기

집사의 특권. 남편은 시간 부자이다.


나만 하루 휴가 내면 근교 어디든 여유롭게 나들이를 다녀올 수도 있고, 금요일에 휴가를 쓰면 1박 2일 여행도 가능하다.


두어 달에 한번, 내 휴가에 맞춰 내어 우리는 하나뿐인 조카를 보러 간다. 시누이는 서울 근교 신축 아파트에 사는데 가는 길이 늘 막혀서 주말에 방문하는 것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친정도 벌써 지어진지 20년이 넘은 구축 아파트이고,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집 역시 20년이 족히 넘은 곳이다 보니 시누이네 갈 때마다 요즘 신축 아파트의 외관이나 내부구조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시누이네가 이 아파트로 이사 온 첫 해, 신축 아파트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자못 진지했다. 일단,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면서부터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우리 차가 들어가는 순간부터 주차할 자리를 찾는 내내 차가 지나가는 길을 따라 사위가 밝아졌고, 출입구를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전에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베이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의 흥분 수치는 극에 달했다. 대접받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도 잠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집에 들어간 순간, 놀란 입은 더 벌어졌다. 인테리어 책자나 앱에서 수도 없이 눈에 담아 두었던 화이트 앤 우드 조합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데, 언젠가 우리 집을 리모델링한다면 반드시 이 조합으로 하겠다고 마음먹은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칭찬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신문물이 가득한 이곳, 조카를 보러 온 건지 집을 보러 온 건지 순간 아찔했다. 집안 곳곳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는데, 두둥! 문제의 그 공간에 다다렀다. 양문 손잡이를 당겨 활짝 열어젖히자, 마치 미국 어느 가정집 창고를 가져다 놓은 듯 온갖 향신료와 양념, 파스타 재료, 소스 등 시누이네가 취미로 수집하고 있는 코카콜라 병을 포함한 오색찬란한 식료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이 공간의 이름은 '팬트리'라고 했다.

팬트리라는 신세계

촌스럽게도 팬트리를 그제야 처음 알게 되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웬만한 신축 아파트는 여분 공간을 빼서 팬트리로 조성해준다고 한다. 구축 아파트에서만 살아서 몰랐다고 하면 너무 무심한가?


나의 ‘팬트리 앓이’가 시작된 건 어쨌든, 그때부터였다.


시누이네만 다녀오면 심하게 비교되는 우리 집 부엌장. 찬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나를 가엾게 보던 남편은 근처 신축 아파트 시세가 나쁘지 않다며 한번 알아보느냐고 슬쩍 말을 붙이길래 나는 쌜쭉대며 노려보았다. 우리 집 부엌장을 찬장이라는 말 외에 달리 칭할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것도 꽤나 서글펐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부리고 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어느 날, 퇴근 후 뭔가를 찾는다고 전자레인지 위 상부장을 열어본 나는 깔깔대며 웃다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쩐지 그날따라 부쩍 피곤해 보인다 싶었던 집사 남편은 하루 온종일 상부장 속에 지저분하게 놓여있던 물건을 전부 들어내고, 1층은 라면, 파스타 재료 등 식료품으로, 맨 꼭대기인 2층은 휴지, 치약, 칫솔 등 화장실 물품으로 열 맞춰 정리를 해 두었다. 당장 쓰는 물품 외 여분으로 뭘 많이 사두는 집이 아니다 보니 공간이 꽤 많이 남았다. 팬트리를 만든다고 가뜩이나 저장 공간이 부족한 구축 아파트에서 자리 낭비한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렇게 우리 집에도 팬트리가 생겼고, 그 뒤로 우리는 그 상부장을 팬트리라고 부른다.


"여보, 팬트리에 라면 아직 남았잖아. 미리 주문할 필요 없지?" 이토록 자연스럽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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