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에서 찾은 작은 행복
아름다운 하프 선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생음악으로 듣는 하프 연주는 처음이었다. 여러 대의 하프가 동시에 울려 퍼지니 소리는 더욱 웅장했다. 공연장 콘서트도 아니었다. 동네 도서관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였다. 어린 학생들과 성인들이 함께 연주했고, 친구와 가족들이 이를 축하했다. 순간 ‘이건 그들만의 잔치인가?’ 싶어 어색했지만, 곧 음악에 빠져들었다.
그곳에는 나 같은 이방인도 모두 환영받았다. 선율이 흐르는 동안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학생으로서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만드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었다.
하와이를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바로 도서관과 바다.
한때 ‘제주도에서 아이와 한 달 살기’라는 책을 읽고 설렜다. 책 속 주인공은 아이와 함께 한 달 동안 제주에서 보냈다. 아침엔 바다에서 수영하고, 한낮엔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유명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빡빡한 여행이 아니었다.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여유를 즐겼고, 그것이 진정한 휴식처럼 느껴졌다.
그 책의 영향이었을까? 제주도 한 달 살기가 유행처럼 번졌다. 그 작가는 제주도를 넘어 캐나다까지 다녀왔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을 썼다. 부러웠다. ‘나도 언젠가 저런 삶을 살아볼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나는 하와이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하와이는 제주도의 바다와 캐나다의 영어 환경을 모두 갖춘 곳이었다.
하와이를 처음 찾는 사람들은 제주도를 떠올린다. 화산섬이고,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섬을 가로지르는 도로마저 제주도의 산간도로를 닮았다. 바람도 강하다. 바람, 돌, 여자로 유명한 제주처럼, 나는 하와이를 ‘바람, 바다, 도서관의 섬’이라 부르고 싶었다.
우리 가족은 원래 도서관을 좋아했다. 한국에서도 휴일이면 도서관 순례를 다녔다. 책을 읽다가 지루하면 구내식당에서 간식을 사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나처럼 심심한 스타일의 엄마에게 도서관은 최고의 육아 공간이었다. 아이들이 책을 읽는 동안 잠깐의 자유를 누릴 수도 있었다.
특히 아이들이 영어를 자연스럽게 익히길 바랐다. 한글을 따로 가르친 적 없었지만, 그림책을 보며 자연스럽게 익혔던 것처럼 영어도 그렇게 배우길 바랐다. 하지만 한국 도서관엔 쉬운 영어책이 많지 않았다. 인기 있는 책은 이미 대출되었거나 너무 낡아 있었다. 반면, 하와이 도서관에서는 원어민들이 실제 읽는 책을 마음껏 고를 수 있었다.
운 좋게도 우리가 살던 집에서 5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었다. 바로 맥컬리 모일릴리 공립 도서관(McCully-Moiliili Public Library). 2층에는 한인 도서관도 있어 한국 책도 빌릴 수 있었다. 심지어 교보문고와 연계된 전자책 서비스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집 임대 계약이 끝나고 하와이 주소를 받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족 수만큼 도서 대출증을 만들었다. 놀랍게도 대출 권수 제한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몇십 권 정도 빌리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이곳에선 무제한이었다. 다만, 반납 기한을 넘기면 매일 25센트씩 벌금이 부과됐다. 쉽게 빌릴 수 있는 만큼, 책임도 명확했다.
맥컬리 도서관은 오래된 건물이었고,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책에서는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고, 노숙자들도 종종 머물렀다. 깨끗한 신도시에서만 자란 아이들이 불편해할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정겹다고 했다. 낡았지만 청결하게 관리된 공간이었다.
도서관은 책을 빌리는 공간 그 이상이었다.
토요일 아침이면 영화가 상영됐다. 최신작은 아니었지만,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무엇보다 무료로 제공되는 팝콘과 음료수가 즐거움을 더했다.
또한, 음악 공연과 애니메이션 전시회도 열렸다. 여름방학에는 ‘책 읽기 챌린지’ 같은 이벤트도 진행됐다. 참여 인원 제한이 없어 언제든 참석할 수 있었다.
DVD 대여 코너도 인기였다. 1달러만 내면 영화를 빌릴 수 있었는데, 어린 시절 보던 명작들도 스크래치 하나 없이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아이들과 영화를 보며 함께 울고 웃었다. 도서관이 주는 문화적 풍요를 매 순간 만끽했다.
도서관을 나서면 아이들은 늘 나를 쳐다보았다. ‘쉐이브 아이스를 먹으러 가자’는 신호였다.
도서관에서 한 블록 아래에 있는 하늘색 가게, ‘와이올라 쉐이브 아이스(WAIOLA Shave Ice)’. 귀여운 그림이 그려진 이 작은 가게 앞엔 늘 길게 줄이 늘어섰다. 노동자 아저씨들부터 관광객까지,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면 어김없이 쉐이브 아이스를 먹었다. 가장 작은 사이즈를 주문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럽을 가득 뿌리고, 찹쌀떡이나 쿠키를 얹었다. 셋이 나란히 앉아 떠들며 먹는 순간이 소소한 행복이었다.
우리에게 도서관은 단순한 책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쉼과 위로를 얻었다. 공짜나 다름없는 책과 영화, 공연. 그리고 매번 들르는 쉐이브 아이스 가게까지. 도서관 덕분에 가난한 유학생 가족의 문화생활은 풍요로웠다.
하와이 기억 속엔 언제나 도서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