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년기를 마주하는 자세
나에게도 왔다. 어른의 사춘기라는 갱년기.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받아들이면 늙어감을 인정해버릴 것만 같았다.
상사의 배려로 아이들 어릴 때 편안한 부서 배정을 받았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부서였다.
하지만 편안한 부서의 단점도 있었다. 승진이나 개인 발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배들이 앞서가고 업무상 필요한 지원도 무시 당하기 일쑤였다.
자존감이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이들 돌보기 나았기에 감사하게 생각했다.
하와이 유학을 다녀와서 복직을 하면서 원래 근무하던 부서를 지원했다.
법을 다루고 업무 난이도가 높아서 다들 도망가는 부서였지만,
우리 조직 존재의 근간이 되는 필수 부서였다.
십여년만에 업무를 맡으면서 제 자리로 돌아온 기쁨도 잠시,
뭔가 놓친 것이 없는지 걱정이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 한 시간마다 깨는 시간이 몇 달 흘렀다.
업무환경이 많이 바뀌었고, 처리방식도 그랬다.
무엇보다 내 마음은 십년 전 그대로였지만,
몸은 아니었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서서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
주말도 출근하는 나날이 이어지자
몸이 여기저기 고장을 드러냈다.
오래 앉아 있느라 요통이 생겨 숙일 수도 없었고,
체력이 방전되어 집에 가면 힘이 하나도 없고 드러눕기부터 했다.
살림은 커녕 아이들 얼굴도 못 보는 2년이 흘렀다.
갑상선 약을 먹게 되고 살은 6키로가 찐 상태로 몸이 무거웠다.
때때로 열이 확 올랐다 내려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갔더니 '갱년기'라 명명했다.
필요하면 약을 주겠다고 했다.
평생 갑상선 약을 먹으라는 말도 충격이었는데, 갱년기 약은 먹고 싶지 않았다.
아마, 마음으로 갱년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나 보다.
엄마는 아직도 이십대 같다는 아이들의 말을 믿고 싶었나 보다.
같이 일하는 후배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고 바둥거렸지만,
내 상태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리 기관의 원천인 그 업무를 할 수 있는 영광은 이제 후배들에게 겸허하게 드려야 했다.
미국에 오게 되면서 이십 년 몸 담은 직장에서 명퇴를 했다.
아쉬웠지만, 또 내 인생은 흘러감을 알았기에,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내 욕심으로 그 자리를 지킬 수 없음을 알았기에
감사하게 마무리지었다.
퇴직하고 미국생활에 천천히 적응하기로 마음 먹었다.
실컷 자고, 하와이 유학생활에 대해 책도 마무리지었다.
몸과 마음을 잘 추스리겠다고 했지만,
겨울이 너무나 긴 미시간에서 매일 흐리고 눈이 오는 추운 날씨는 견디기 힘들었다.
월세 좁은 집도 불편하고, 매일 밥해먹기도 지쳤다.
그리고 신랑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가 못마땅해졌다.
급기야 아이들 어릴 때 섭섭했던 것, 신혼 초 서운했던 일, 신혼여행 때 섭섭함까지 다 올라왔다.
크게 싸웠던 매 순간이 올라와 한 동안 나를 괴롭혔다.
결혼은 나와 맞지 않는 제도가 아니었나,
신랑은 다른 여자와 만났으면 더 잘 살았으려나.
"진짜 심각하네.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줄 몰랐어."
눈물을 짜내고 있는 나에게 신랑이 말했다.
그 때 내 행동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내 의심에 가득 찬 행동과 미움은 '갱년기 호르몬' 영향인 걸 그제야 알았다.
남자에게도 간혹 나타나는 갱년기이지만,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급격한 감소로 인해
특히 여자들이 많이 겪는다고 했다.
신랑과 갱년기에 관한 유튜브 영상을 함께 봤다.
신랑이 옆에서, "남자는 갱년기 없어? 저거 내 증상인데"하는 말에 코웃음이 났다.
"그 정도가 아니거든?"
갱년기는 '홍조'만이 그 증상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건, 우울함이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호르몬 영향 때문이었다.
그렇게 미워보이던 신랑이었는데, 그걸 안 순간 갑자기 미안했다.
이제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다.
갱년기를 인정하기로 했다.
갱년기는 젊음의 시기를 지나 새로운 노년기를 대비하기 위한 어른의 사춘기임을 이해했다.
왜 사춘기 아이와 갱년기 엄마가 팽팽하게 맞설 수 있는 지 깨달았다.
아이의 사춘기만 살펴보던 내가, 이제 나의 어른 사춘기를 살피기로 했다.
퇴직을 앞두고, 미국 생활에 자신만만해하던 나에게,
상담사가 한 말이 기억났다.
"갱년기 만만치 않을 거예요."
그 때 코 웃음 쳤던 내가 혹독한 갱년기 신고식을 치렀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잘못하면 멀쩡한 신랑과 멀어질 뻔 했는 걸.
아이들이 사랑하는 아빠를 잃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인걸 깨닫고,
갑자기 가슴을 쓸어내린다. 정말 다행이야.